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면, 어떤 길을 선택하겠어? 그 질문에 벤지는 눈알을 굴리며 꽤 시간을 들여 대답했던 것 같았다. 일단은 안전한지를 살펴봐야겠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보라는 말도 있잖아요. 상대방은 간단한 추임새를 내고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선택 했을 때 무엇을 잃는지도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던 것 같다. 경험으로 배웠던 건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뼈가 빠지게 굴러왔던 현장에서 배운 것? 단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대답은 필요했다. 그 때쯤 결심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실 결심 따위를 했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이야기다. 어설픈 한숨 소리만 빠져나올 뿐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게 선택을 할 권리는 있는 걸까요?

이 대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이 익숙하지 않아?

그러게요.

다시 한 번 선택을 했다.

 

 

, 무슨 일이 있었나보네.”

 

지구가, 세계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이 망한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 황폐화 된 도시 위에서 제일 첫 번째로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슬프거나, 놀랍다는 생각 따위는 나중에 찾아왔다. 언젠간 이럴 줄 알았어. 항상 보던 것이었다. 세계를 정화하겠다고 설치는 광신도들, 막대한 자금을 손에 쥐고 흔드는 악당들, 세계정부의 손에서 무분별하게 생산되는 핵폭탄 따위의 무기들.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뿐이다. 벤지에게 있어서는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제까지 실패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패는 예견되어 왔었고, 벤지는 실패를 막을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단이라면 다르겠지.


이단 헌트. 벤지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름과 동시에 불안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단이라면 그 실패를 눈앞에서 직접 보았을 것이다. 가로등이 바닥에 처박혀있고, 콘크리트 바닥은 알 수 없는 파편에 의해 반으로 갈라지는, 그 속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도. 이단은 제일 먼저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이단은 해결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은 희망이었다.

벤지의 주 분야는 해킹이었다. 동시에 이 시점에서는 제일 필요가 없어진 분야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과 온갖 기기들의 버튼을 눌러 확인했지만 역시나. 멸망한 세계에서 전파가 통할 거란 생각을 했다니. 안일했다. 바닥으로 던진 노트북을 발로 대충 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웠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손을 뗄 용기가 없었다. 이단은 살아 있을까. 그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그라면 세계가 망한 것을 보고 제일 먼저 어디에 갈까?

 

꿈이었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오는 길에 시체 몇 구와, 알 수 없는 출처의 덩어리를 물고 달아나는 쥐새끼 몇 마리만 보았을 뿐이다. 총을 허릿춤에 찔러 넣은 체로 단단히 무장하고 나온 것이 머쓱할 정도였다. 벤지의 걸음이 멈춘 곳은 IMF 내에 존재하는 지하벙커였다. 커다란 철문은 누가 들어간 흔적을 보여주듯 반쯤 열려있었다. 지문이나 홍체 인식기는 이미 고철이 된지 오래였다. 문이 열려있다는 뜻은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경계가 필요했다. 벤지는 손에 쥔 총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걸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벽이나 바닥에 커다란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우당탕. 듣기 싫은 소리에 벤지는 인상을 썼다. 아니면, 몸싸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벤지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걸음 소리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들리는 소음에 묻혀버렸다. 벤지는 뛰기 시작했다.

 

이단!”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에 환호성을 질렀다. 멸망한 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기쁨은 더 오래 갔겠지. 그건 이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고철덩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벤지에게 다가갔다. 그 다음은 포옹이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이단의 포옹을 받던 벤지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의 양 볼을 잡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이단이 두 번째로 꺼낸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말이 끝나자마자 벤지는 무심코 그의 눈꺼풀을 뒤집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탁한 부분은 없고 초점도 잘 맞는다. 맑고 또랑또랑 한 것이, 평소의 이단과 같다. 이단은 벤지의 반응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 그의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말투만 듣고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떻게요?”

이 기계를 사용해서.”

 

이단이 가리킨 곳에는 군데군데 부품이 비어있는 추레한 고철덩이가 있었다. 안 그래도 없었던 현실감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벤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타임머신?”

정확히 말하면 다르지만.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

비현실적이네요.”

나도 알아.” 들어본 적 없는 낮은 목소리였다. 벤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기계는 내 전문이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이단.”

그 말을 들은 이단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 날 밤부터 작업이 시작했다.

 



이단이 며칠 째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지 않았다? 우스운 말이 틀림없었다. 벙커는 집이 아니었다. 이단이 며칠 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벤지는 초조하게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이단이 희망을 걸고 있는 기계를 좀 더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벤지는 이단을 믿고 있었기에 이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낭비 할 시간이 없었다. 이단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벤지가 이단의 몫을 해야 될 때였다.

부품을 채워 넣어 거의 완성 된 기계는 현실의 물건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놀라운 성능을 보여줬다. 기계의 핵심 능력은 단 하나였고, 독보적이었다.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 드라이버를 들고 기계 앞에서 설치던 벤지는 전류가 흐르는 전선의 피복에 손가락을 뎀과 동시에 드라이버를 떨어트렸다. 바로 기계의 성능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결을 따라 피부가 재생이 됐다. 화상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동시에 떨어지지도 않았다는 것 마냥 드라이버는 여전히 벤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매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이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IMF 내에 이런 물건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단이 이것을 어떻게 찾아낸 건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실행조차 하지 않은 기계의 위력이 이 정도라면, 부품을 모두 채워 넣는다면 그의 가설은 성공할 것이 분명했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헛된 희망이 아니었다.

 

 

 

이단이 돌아왔다.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말이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운 뒤 마지막 부품들을 벤지에게 건넸다. 벤지의 손에 검붉은 피가 옮겨 묻었다. 손바닥에 묻은 이단의 것이 분명한 혈액을 확인한 벤지는 발이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끝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줘. 벤지.”

 

마지막 말이었다.

벤지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이단의 뜻을 이루는 것. 이단이 했어야 되는 일을 하는 것. 마지막 부품을 끼워 넣은 벤지는 망설임 없이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버튼은 눌리고, 시간은 되돌아 갈 것이다. 이단이 원했던 대로. 모든 해결책이 과거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 마냥. 과거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세계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단은 살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건 바뀔 것이다. 작은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곧 희망에 의해 짓밟혀버렸다. 벤지는 다시 망설임을 버리고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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