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스튜를 만들기 위해 양파를 뒤적이던 클라우스는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재채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떨어트렸다. 안타깝게도 세 손가락은 양파를 잡고 견디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힘없이 떨어져 혼자 데굴데굴 굴러가던 양파는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클라우스는 소리의 근원을 걱정하기 이전에 양파를 집어 올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되면 클라우스의 우선은 다시 뒤바뀌게 된다.

 

울프?”

 

걱정스럽게 그를 불렀다. 사실, 클라우스는 커다란 소리가 무엇인지, 왜 들린 것인지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한파와 주로 밖에서 일을 하는 찰리는 클라우스가 생각하는 그 것. ‘찰리 울프가 감기에 걸렸다.’ 의 결론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였다. 그 외에도 증거는 많았다. 멋을 부린답시고 얇은 코트를 입고 다니고, 일 때문에 밖에서 몇 시간 동안 죽치는 것은 예사로 일어나는 일이고……. 클라우스는 속이 들끓는 것을 참으며 찰리가 처박혀있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 젠장, 몸이 무거워.”

 

찰리는 골골 앓으며 이마에 팔뚝을 올렸다. 클라우스는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찰리는 클라우스를 쫓아내기 위해 대충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좀 자두면 괜찮겠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 무슨 소리야. 난 멀쩡해.”

 

좀 더 말을 하려던 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목에서 나온 것은 평소같은 밉살 스러운 말이 아닌 커다란 기침소리였다. 찰리는 결국 말을 하는 것을 대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이불 밖으로 알아들을 수없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빠져나왔다.

 

찰리.”

 

클라우스는 걱정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찰리가 누워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으니 새빨갛게 열이 오른 찰리의 얼굴이 보였다. 클라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는 말 거짓말이었어.”

알고 있네.”

감기에 걸렸나봐.”

자네만 몰랐을 걸.”

이봐, 나 놀리려고 온 거야?”

 

클라우스는 대답대신 찰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찰리의 몸은 차가운 공기와 대조적으로 매우 뜨거웠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정도였다. 적당히 미지근한 클라우스의 손이 닿자 찰리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찰리는 눈을 감고 끙끙거리며 숨을 뱉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클라우스는 순간적으로, 까마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클라우스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베르트홀트.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 함박눈이 펑펑 오던 저녁, 말을 듣지 않고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고 들어온 그는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급히 주치의에게 연락을 넣었지만 이례적인 눈사태에 그는 도로에 갇혀 버리고 말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친정에서 안식일을 보내고 있어 그의 곁에 없었다. 클라우스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다. 저택에 남아있는 몇몇 고용인들이 처치를 준비하는 동안 몸이 불덩이 같은 아들을 품에 껴안고 기도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해?”

 

클라우스는 찰리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사실대로 말을 할까 고민하다,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닿았다.

 

저녁으로 고기 스튜를 준비할까 생각했었네. 뜨겁고, 국물이 있으니 자네도 먹기 편할 거 같아서.”

그거 좋지.”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아프니……. 고기와 양파를 썰을 수도 없더군. 칼질은 자네 전문이잖아.”

찬장에 통조림이 있을 거야. 가져와. 그건 내가 따줄게.”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근하던 그의 손은 찰리의 온도와 엇비슷해졌다. 그는 찰리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얼굴을 떼니 찰리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아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라고 말하는 표정일 것이다. 클라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아들을 생각한 탓이다. 감상에 흠뻑 젖은 클라우스는 잠시 찰리와 그의 아들을 혼동했다. 몸집만 커다랗고 제 멋대로 행동하던 그 모습이. 그리고 밤새 그를 껴안고 그가 나을 수 있도록 기도하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 이런……. 미안하네.”

 

침묵이 이어지자 클라우스는 덧붙였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찰리에게서 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는 나머지 우습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나빴다기 보다는 이상해서…….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람.”

통조림을 찾아봐야겠어. 약도 한번 찾아보겠네.”

 

클라우스는 황급히 방문을 닫고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도망쳤다. 이마에 키스를 한다. 적어도 그 행위는 찰리와 그의 관계 속에서 끔찍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섹스는 가능하지만 키스는 불가능하다? 그것도 입에 하는 질척한 것이 아닌, 짧고 담백한 입맞춤을. 찰리가 아픈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평소의 눈치가 빠른 찰리였다면 클라우스가 어떤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입을 맞추었는지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클라우스는 혼미한 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며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의자 위에 올라 선 클라우스는 통조림 몇 개와 함께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독일의 식료품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허브티였다. 클라우스는 통조림과 티를 챙겨 의자에서 내려왔다. 뜨거운 물을 끓여 잔에다 부은 후 티백을 넣어 충분히 우린 후, 다시 찰리가 누워있는 방으로 갔다. 누워있었던 찰리는 언제 일어났는지, 문가에 있는 테이블 옆에 앉아있었다. 클라우스는 챙겨온 것들을 찰리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이건 통조림이고, 이건 허브티라네.”

 

찰리는 의아한 눈으로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다. 클라우스는 찰리의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그에게 차를 권했다.

 

ErkältungsTee." 


클라우스의 입술에서 투박한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감기에 좋은 차라네. 내 모국에서 약 대신 자주 마시고는 하는데, 마침 집에 있더군.”

 

차에서는 뜨거운 김과 함께 진한 캐모마일 향이 풍겨왔다. 찰리는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아까 말인데…….”

울프. 뜨거울 때 다 마시게.”

 

클라우스는 단호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찰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시 잔을 들었다.

 

우리가 무슨 애들도 아니고, 그런 스킨쉽에 당황하다니. 자네도 보면 참 쑥맥 같군.”

 

찰리는 켁켁대며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애 취급 한 건 누군데?”

아이에게 아이 취급을 한 게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어.”

대령. 나는 그냥 그 때 뭘 생각했는지가 궁금했던 것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날 선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나보군.”

 

클라우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몽롱한 정신에 눈치 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클라우스의 생각보다 찰리는 좀 더 날카로웠다. 귀 끝에서 빨갛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클라우스의 머릿속에서 조차 뭐라 변명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찰리의 기침소리가 공간을 메꾸었다.

 

잠깐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네. 자네를 아이 취급한 것도 맞고.”

 

클라우스는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찰리의 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에게서 과거를 빼앗을 생각은 없어. 가끔은 이렇게 도움을 줄 때도 있으니까.”

 

찰리는 테이블 위에 텅 빈 잔을 내려놓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단지 나는 내가 그 사실에 질투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날 뿐이거든.”

울프.”

씨발. 골이 울려서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찰리는 통조림의 뚜껑을 따 클라우스에게 건넸다. 클라우스는 통조림을 받는 대신 찰리의 머리를 잡고 키스했다. 질척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뜨거웠다. 아랫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클라우스는 찰리의 어깨를 밀어냈다.

 

저녁을 준비해서 오겠네. 좀 누워있게.”

 

머리가 아픈 건 찰리가 아니라 클라우스일지도 몰랐다. 클라우스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서둘러 방 안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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