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이는 불길에 예상은 했었지만. 집 안에 가득 찬 연기와 맞닥트렸을 때, 찰리는 제일 먼저 이것이 특수효과가 아닐까를 의심했다. 한참동안이나 상황을 살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한 체 가만히 서서 헛된 시간을 보냈다. 타는 냄새와 함께 싸구려 귀신의 집 바닥에 깔린 고체 이산화탄소에서 터지듯 나오는 수증기가 발목에 닿을 때쯤에나 찰리는 다시 현실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그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탈출은 한 걸까?


불에 타 죽는 법은 아주 많았다. 더 나가지 않아도 연기에 질식해 죽는 방법도 아주 많았고. 찰리는 불과 관련 된 죽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철저함을 강조하는 의뢰인은 일처리가 전문 킬러의 소행이 아닌 단순한 사고로 위장되기를 바랐고 언제나 그랬듯이 찰리는 돈이 되는 일은 기분 좋게 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휘발유를 잔뜩 몸에 묻히고 잠에 취한 타겟의 위로 담뱃불만 던지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타기 좋은 재질로 되어있는 커텐이나, 원목 탁자가 있으면 더 쉬운 일이었다. 대부분 그들은 돈을 처바른 넓은 집에서 도움도 되지 않는 경호원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고는 했으니 조건은 어느 정도 만족 된 셈이었다. 그렇게 불을 질러놓고 그 장소에서 빠져 나가면, 며칠 내로 지역 신문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연기에 질식해 죽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찰리의 집 또한 그들의 집과 비슷한 환경이라는 것 또한 안타까운 점이었다. 제기랄. 집에 대한 걱정은 뒤로 미뤄두고 그가 있을 방으로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문고리는 이미 열기에 달아오른 쓰잘데기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찰리는 욕을 짓씹으며 있는 힘껏 문에 몸을 들이 박았다. 문 대신 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얼얼한 어깨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몸을 부딪치려 했을 때, 그의 노력이 무상하게도 이 불을 지른 장본인에 의하여 문은 쉽게 열려버리고 말았다.



 

집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슈타우펜이 홀랑 태워먹은 집은 어차피 아주 잠시 동안 머물던 곳이었고, 보석과 금은 따로 보관하는 곳이 있었기에 커다란 손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찰리는 속에서 들끓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수고를 들여 제정신이 아닌 슈타우펜을 끌고 임시 거처에 밀어둔 자신의 수고가 고생스럽게 느껴서도 아니었다. 찰리는 애꿎은 벽에 총을 몇 번 갈겨주고 나서야 대화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이성이 돌아왔음을 느꼈다.


내가 잘못했네.”


슈타우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손가락밖에 없는 손바닥은 한계점까지 오른 고철덩어리를 덥썩 만져버린 탓에 살가죽이 다 까져 있었다. 약 기운이 가시자 서서히 고통은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통은 이성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과 함께 분노한 찰리를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약에 존나게 취해서 불을 지르고, 한가하게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와서 한다는 말이 잘못했네.’ 라고?”


슈타우펜은 찰리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그는 아직도 방바닥이 아닌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매달려있는 바로 앞은 낭떠러지라서, 집을 집어 삼킨 화마보다 더 무섭게 화를 내고 있는 찰리를 피해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손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슈타우펜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찰리는 악을 지르며 방 안을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이제 더 이상 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수없이 한 말이지만 그를 잡고 있던 건 찰리였다. ‘내가 나가서 아사를 하거나 동사를 해도 어차피 남일 뿐일세. 자네는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하면 돼.’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남이다. 우리 관계는 무엇이지?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의 예비군 참모이자, 왼쪽 눈과 손가락 두 개, 오른손 하나가 없는 전직 대령. 이제는 약에 취해 집에 불을 지른 약쟁이. 슈타우펜은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도록 잘려진 손가락에 새겨놓았다.


집에 불 지른 것도, 약에 손을 댄 것도 모두 내 의지였네. 하지만 날 이제까지 살려둔 건 자네야. 난 울프, 자네가 나에게 어떠한 처벌을 한다고 해도 달게 받아들이겠네. 더 이상 불을 지르지 못하게, 약을 먹지 못하도록 나머지 손가락을 없애버리는 것도 좋겠군.”


결국 고통을 이겨버렸다. 슈타우펜은 독일어가 섞인 엉망인 문장을 토하듯 뱉어버렸다. 실제로 토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이후의 일은 기도에 토사물이 들어가 질식한 후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설마 살인은 싫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강하게 목을 조르는 손길을 느꼈다. 슈타우펜은 저릿저릿하게 풀리는 사지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 느낌이라면 오른 손으로 글씨라도 쓸 수 있겠어. 눈꺼풀이 덜덜 떨리며 의식이 멀어졌다. 타격이 많이 간 체력은 살짝만 손을 데도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슈타우펜은 어두운 공간 속 떠오르는 것이 니나가 아닌 찰리의 얼굴이라는 것에 실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슈타우펜이 눈을 떴을 때는 깨끗하게 갈아입혀진 옷과 함께였다. 왼 손에는 붕대도 감겨져 있었다.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군. 딱히 상대를 정해놓고 하는 타박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는 아세트아미노펜계열의 알약과 함께 휘갈긴 필체로 글씨가 적힌 돈 뭉텅이가 있었다. 나중에 덮쳐올 속쓰림보단 당장의 고통이 중요했다. 슈타우펜은 급하게 알약을 털어 삼킨 뒤 찰리가 남겼을 것이 분명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생각이 있다면 도와줄게. 3시까지 주소- 로 와.

물론 안 와도 됨.

 

그 와중에 다리도 다친 것이 분명했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택시를 잡아 기사에게 찰리가 적은 주소를 말해주었다. 택시는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에서 슈타우펜을 내려주었다. 찰리의 예민한 성격 상 그는 번화가에 거처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택시가 내려준 곳은 예의상 한적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빌딩숲 속이었다.


이봐.”


슈타우펜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왜 놀라는 거야? 원해서 왔으면서.”


찰리는 슈펜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성큼성큼 슈타우펜을 앞질러 걷다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걸음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속도를 늦춰주었다


멀쩡한 게 하나도 없군.”


찰리는 심통스럽게 말을 한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몸짓으로 슈타우펜을 부축했다. 슈타우펜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딘지 모를 주소와 건물,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찰리의 태도.


대령, 히트맨 일이 왜 좋은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까지. 슈타우펜은 복잡한 머릿속에 질문을 받을 여유는 두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찰리는 지친 모양인지 제멋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돈이 썩어빠지게 많다는 점이지. 돈이 많다는 건 말이야, 집을 몇 번이고 태워먹어도 괜찮다는 뜻이고. 어제 일은 별로 화 낼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야.”


사람이 없는 모양인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빠르게 문이 열렸다.


원한다면 약도 계속 할 수 있어. LSD, 코카인, 헤로인... 난 싸구려 약은 취급도 안 한다니까.”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목적지는 팔 층이었고 지금은 육 층이었다. 육 점 삼분에 일 층. 찰리는 팔 층에 다가갈수록 초조하게 말에 속도를 붙였다.


, 씨발. 이게 아니라... 내가 여태까지무관심했던거미안하고좀더신경쓸게. 상담은 이주일에 한 번이야. , 다 왔다.”


찰리는 머리를 헤집으며 말을 하다가 멍하니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슈타우펜을 내버려 두고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슈타우펜은 갑작스레 밀려온 정보 덕에 머리에 과부화가 걸린 체 가만히 서있던 참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찰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싫어?”

싫다기보다는... 너무 빠르게 말해서 못 알아 들었네.”

상담! 적절한 약물치료와 꾸준한 상담이 필요하다고 넌. 그리고 나도.”


찰리와 어울리지 않는 상식적인 어투였다. 찰리는 닫히기 위해 애를 쓰는 문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누가 더 많이 변한 건지는 자기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선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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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면, 어떤 길을 선택하겠어? 그 질문에 벤지는 눈알을 굴리며 꽤 시간을 들여 대답했던 것 같았다. 일단은 안전한지를 살펴봐야겠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보라는 말도 있잖아요. 상대방은 간단한 추임새를 내고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선택 했을 때 무엇을 잃는지도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던 것 같다. 경험으로 배웠던 건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뼈가 빠지게 굴러왔던 현장에서 배운 것? 단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대답은 필요했다. 그 때쯤 결심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실 결심 따위를 했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이야기다. 어설픈 한숨 소리만 빠져나올 뿐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게 선택을 할 권리는 있는 걸까요?

이 대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이 익숙하지 않아?

그러게요.

다시 한 번 선택을 했다.

 

 

, 무슨 일이 있었나보네.”

 

지구가, 세계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이 망한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 황폐화 된 도시 위에서 제일 첫 번째로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슬프거나, 놀랍다는 생각 따위는 나중에 찾아왔다. 언젠간 이럴 줄 알았어. 항상 보던 것이었다. 세계를 정화하겠다고 설치는 광신도들, 막대한 자금을 손에 쥐고 흔드는 악당들, 세계정부의 손에서 무분별하게 생산되는 핵폭탄 따위의 무기들.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뿐이다. 벤지에게 있어서는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제까지 실패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패는 예견되어 왔었고, 벤지는 실패를 막을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단이라면 다르겠지.


이단 헌트. 벤지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름과 동시에 불안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단이라면 그 실패를 눈앞에서 직접 보았을 것이다. 가로등이 바닥에 처박혀있고, 콘크리트 바닥은 알 수 없는 파편에 의해 반으로 갈라지는, 그 속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도. 이단은 제일 먼저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이단은 해결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은 희망이었다.

벤지의 주 분야는 해킹이었다. 동시에 이 시점에서는 제일 필요가 없어진 분야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과 온갖 기기들의 버튼을 눌러 확인했지만 역시나. 멸망한 세계에서 전파가 통할 거란 생각을 했다니. 안일했다. 바닥으로 던진 노트북을 발로 대충 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웠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손을 뗄 용기가 없었다. 이단은 살아 있을까. 그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그라면 세계가 망한 것을 보고 제일 먼저 어디에 갈까?

 

꿈이었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오는 길에 시체 몇 구와, 알 수 없는 출처의 덩어리를 물고 달아나는 쥐새끼 몇 마리만 보았을 뿐이다. 총을 허릿춤에 찔러 넣은 체로 단단히 무장하고 나온 것이 머쓱할 정도였다. 벤지의 걸음이 멈춘 곳은 IMF 내에 존재하는 지하벙커였다. 커다란 철문은 누가 들어간 흔적을 보여주듯 반쯤 열려있었다. 지문이나 홍체 인식기는 이미 고철이 된지 오래였다. 문이 열려있다는 뜻은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경계가 필요했다. 벤지는 손에 쥔 총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걸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벽이나 바닥에 커다란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우당탕. 듣기 싫은 소리에 벤지는 인상을 썼다. 아니면, 몸싸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벤지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걸음 소리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들리는 소음에 묻혀버렸다. 벤지는 뛰기 시작했다.

 

이단!”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에 환호성을 질렀다. 멸망한 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기쁨은 더 오래 갔겠지. 그건 이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고철덩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벤지에게 다가갔다. 그 다음은 포옹이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이단의 포옹을 받던 벤지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의 양 볼을 잡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이단이 두 번째로 꺼낸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말이 끝나자마자 벤지는 무심코 그의 눈꺼풀을 뒤집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탁한 부분은 없고 초점도 잘 맞는다. 맑고 또랑또랑 한 것이, 평소의 이단과 같다. 이단은 벤지의 반응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 그의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말투만 듣고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떻게요?”

이 기계를 사용해서.”

 

이단이 가리킨 곳에는 군데군데 부품이 비어있는 추레한 고철덩이가 있었다. 안 그래도 없었던 현실감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벤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타임머신?”

정확히 말하면 다르지만.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

비현실적이네요.”

나도 알아.” 들어본 적 없는 낮은 목소리였다. 벤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기계는 내 전문이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이단.”

그 말을 들은 이단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 날 밤부터 작업이 시작했다.

 



이단이 며칠 째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지 않았다? 우스운 말이 틀림없었다. 벙커는 집이 아니었다. 이단이 며칠 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벤지는 초조하게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이단이 희망을 걸고 있는 기계를 좀 더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벤지는 이단을 믿고 있었기에 이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낭비 할 시간이 없었다. 이단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벤지가 이단의 몫을 해야 될 때였다.

부품을 채워 넣어 거의 완성 된 기계는 현실의 물건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놀라운 성능을 보여줬다. 기계의 핵심 능력은 단 하나였고, 독보적이었다.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 드라이버를 들고 기계 앞에서 설치던 벤지는 전류가 흐르는 전선의 피복에 손가락을 뎀과 동시에 드라이버를 떨어트렸다. 바로 기계의 성능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결을 따라 피부가 재생이 됐다. 화상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동시에 떨어지지도 않았다는 것 마냥 드라이버는 여전히 벤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매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이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IMF 내에 이런 물건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단이 이것을 어떻게 찾아낸 건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실행조차 하지 않은 기계의 위력이 이 정도라면, 부품을 모두 채워 넣는다면 그의 가설은 성공할 것이 분명했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헛된 희망이 아니었다.

 

 

 

이단이 돌아왔다.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말이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운 뒤 마지막 부품들을 벤지에게 건넸다. 벤지의 손에 검붉은 피가 옮겨 묻었다. 손바닥에 묻은 이단의 것이 분명한 혈액을 확인한 벤지는 발이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끝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줘. 벤지.”

 

마지막 말이었다.

벤지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이단의 뜻을 이루는 것. 이단이 했어야 되는 일을 하는 것. 마지막 부품을 끼워 넣은 벤지는 망설임 없이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버튼은 눌리고, 시간은 되돌아 갈 것이다. 이단이 원했던 대로. 모든 해결책이 과거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 마냥. 과거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세계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단은 살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건 바뀔 것이다. 작은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곧 희망에 의해 짓밟혀버렸다. 벤지는 다시 망설임을 버리고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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