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스튜를 만들기 위해 양파를 뒤적이던 클라우스는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재채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떨어트렸다. 안타깝게도 세 손가락은 양파를 잡고 견디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힘없이 떨어져 혼자 데굴데굴 굴러가던 양파는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클라우스는 소리의 근원을 걱정하기 이전에 양파를 집어 올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되면 클라우스의 우선은 다시 뒤바뀌게 된다.

 

울프?”

 

걱정스럽게 그를 불렀다. 사실, 클라우스는 커다란 소리가 무엇인지, 왜 들린 것인지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한파와 주로 밖에서 일을 하는 찰리는 클라우스가 생각하는 그 것. ‘찰리 울프가 감기에 걸렸다.’ 의 결론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였다. 그 외에도 증거는 많았다. 멋을 부린답시고 얇은 코트를 입고 다니고, 일 때문에 밖에서 몇 시간 동안 죽치는 것은 예사로 일어나는 일이고……. 클라우스는 속이 들끓는 것을 참으며 찰리가 처박혀있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 젠장, 몸이 무거워.”

 

찰리는 골골 앓으며 이마에 팔뚝을 올렸다. 클라우스는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찰리는 클라우스를 쫓아내기 위해 대충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좀 자두면 괜찮겠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 무슨 소리야. 난 멀쩡해.”

 

좀 더 말을 하려던 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목에서 나온 것은 평소같은 밉살 스러운 말이 아닌 커다란 기침소리였다. 찰리는 결국 말을 하는 것을 대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이불 밖으로 알아들을 수없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빠져나왔다.

 

찰리.”

 

클라우스는 걱정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찰리가 누워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으니 새빨갛게 열이 오른 찰리의 얼굴이 보였다. 클라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는 말 거짓말이었어.”

알고 있네.”

감기에 걸렸나봐.”

자네만 몰랐을 걸.”

이봐, 나 놀리려고 온 거야?”

 

클라우스는 대답대신 찰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찰리의 몸은 차가운 공기와 대조적으로 매우 뜨거웠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정도였다. 적당히 미지근한 클라우스의 손이 닿자 찰리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찰리는 눈을 감고 끙끙거리며 숨을 뱉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클라우스는 순간적으로, 까마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클라우스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베르트홀트.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 함박눈이 펑펑 오던 저녁, 말을 듣지 않고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고 들어온 그는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급히 주치의에게 연락을 넣었지만 이례적인 눈사태에 그는 도로에 갇혀 버리고 말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친정에서 안식일을 보내고 있어 그의 곁에 없었다. 클라우스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다. 저택에 남아있는 몇몇 고용인들이 처치를 준비하는 동안 몸이 불덩이 같은 아들을 품에 껴안고 기도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해?”

 

클라우스는 찰리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사실대로 말을 할까 고민하다,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닿았다.

 

저녁으로 고기 스튜를 준비할까 생각했었네. 뜨겁고, 국물이 있으니 자네도 먹기 편할 거 같아서.”

그거 좋지.”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아프니……. 고기와 양파를 썰을 수도 없더군. 칼질은 자네 전문이잖아.”

찬장에 통조림이 있을 거야. 가져와. 그건 내가 따줄게.”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근하던 그의 손은 찰리의 온도와 엇비슷해졌다. 그는 찰리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얼굴을 떼니 찰리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아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라고 말하는 표정일 것이다. 클라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아들을 생각한 탓이다. 감상에 흠뻑 젖은 클라우스는 잠시 찰리와 그의 아들을 혼동했다. 몸집만 커다랗고 제 멋대로 행동하던 그 모습이. 그리고 밤새 그를 껴안고 그가 나을 수 있도록 기도하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 이런……. 미안하네.”

 

침묵이 이어지자 클라우스는 덧붙였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찰리에게서 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는 나머지 우습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나빴다기 보다는 이상해서…….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람.”

통조림을 찾아봐야겠어. 약도 한번 찾아보겠네.”

 

클라우스는 황급히 방문을 닫고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도망쳤다. 이마에 키스를 한다. 적어도 그 행위는 찰리와 그의 관계 속에서 끔찍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섹스는 가능하지만 키스는 불가능하다? 그것도 입에 하는 질척한 것이 아닌, 짧고 담백한 입맞춤을. 찰리가 아픈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평소의 눈치가 빠른 찰리였다면 클라우스가 어떤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입을 맞추었는지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클라우스는 혼미한 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며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의자 위에 올라 선 클라우스는 통조림 몇 개와 함께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독일의 식료품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허브티였다. 클라우스는 통조림과 티를 챙겨 의자에서 내려왔다. 뜨거운 물을 끓여 잔에다 부은 후 티백을 넣어 충분히 우린 후, 다시 찰리가 누워있는 방으로 갔다. 누워있었던 찰리는 언제 일어났는지, 문가에 있는 테이블 옆에 앉아있었다. 클라우스는 챙겨온 것들을 찰리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이건 통조림이고, 이건 허브티라네.”

 

찰리는 의아한 눈으로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다. 클라우스는 찰리의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그에게 차를 권했다.

 

ErkältungsTee." 


클라우스의 입술에서 투박한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감기에 좋은 차라네. 내 모국에서 약 대신 자주 마시고는 하는데, 마침 집에 있더군.”

 

차에서는 뜨거운 김과 함께 진한 캐모마일 향이 풍겨왔다. 찰리는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아까 말인데…….”

울프. 뜨거울 때 다 마시게.”

 

클라우스는 단호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찰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시 잔을 들었다.

 

우리가 무슨 애들도 아니고, 그런 스킨쉽에 당황하다니. 자네도 보면 참 쑥맥 같군.”

 

찰리는 켁켁대며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애 취급 한 건 누군데?”

아이에게 아이 취급을 한 게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어.”

대령. 나는 그냥 그 때 뭘 생각했는지가 궁금했던 것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날 선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나보군.”

 

클라우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몽롱한 정신에 눈치 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클라우스의 생각보다 찰리는 좀 더 날카로웠다. 귀 끝에서 빨갛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클라우스의 머릿속에서 조차 뭐라 변명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찰리의 기침소리가 공간을 메꾸었다.

 

잠깐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네. 자네를 아이 취급한 것도 맞고.”

 

클라우스는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찰리의 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에게서 과거를 빼앗을 생각은 없어. 가끔은 이렇게 도움을 줄 때도 있으니까.”

 

찰리는 테이블 위에 텅 빈 잔을 내려놓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단지 나는 내가 그 사실에 질투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날 뿐이거든.”

울프.”

씨발. 골이 울려서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찰리는 통조림의 뚜껑을 따 클라우스에게 건넸다. 클라우스는 통조림을 받는 대신 찰리의 머리를 잡고 키스했다. 질척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뜨거웠다. 아랫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클라우스는 찰리의 어깨를 밀어냈다.

 

저녁을 준비해서 오겠네. 좀 누워있게.”

 

머리가 아픈 건 찰리가 아니라 클라우스일지도 몰랐다. 클라우스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서둘러 방 안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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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가 전 날 먹은 저녁 식사의 메뉴를 기억하지 못 하게 된 이후로 찰리는 그를 대령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그 이름에 관한 기억을 잃었다면 굳이 그 호칭을 사용해 부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찰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끄트머리부터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한숨을 집어 삼켰다.

 

클라우스의 기억은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지워졌다.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우스 그 자신이었다. 그는 뒤돌아서 분주히 움직이는 찰리의 이름을 부르려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클라우스는 결국 입을 다물고 찰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아니, 아무 것도 아니네.”

 

……. 울프.” 그리고 덧붙였다. 찰리는 평소 같은 얼굴을 한 체 뒤를 돌아보았고, 클라우스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이름이 찰리 울프라는 것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달 내내 사소한 개념들이 떠오르지 않았고 엄지 마디만한 두께의 책을 읽는 것도 앞 장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뒤적이기 일쑤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한쪽 손을 못 쓰게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모든 사람들은 기억을 하면서 존재한다. 기억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클라우스의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클라우스가 가 아니게 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보지 않았지만 생생한 아내의 얼굴이,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찰리 울프가 자신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날 클라우스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음을 느꼈다. 이유를 물을 기억 따위는 남아있지도 않았다. 클라우스에게 있어서 이 상황들, 모든 것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이 스트레스처럼 다가올 때 클라우스는 자신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모든 실수를 자신의 부주의로 돌리고 단순한 실수라 치부했다. 클라우스는 기억 속의 자신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거울 속에서 눈을 떼고, 무감각한 얼굴로 펜을 집었다. 펜이 집히지 않았다. 클라우스의 잘린 손목이 애처롭게 펜 위를 허우적대고 있었다.

찰리가 클라우스의 상태를 눈치 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오늘이 며칠이지?”

 

찰리는 병원에서 준 몇 가지 질문이 적힌 종이를 뒤적이며 질문을 꼽았다. 주치의는 오는 주마다 클라우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찰리에게 간단하지만 중요한 숙제를 주었다. 에이 포 크기의 종이에 몇 가지의 질문을 클라우스에게 하면 되었다. 날이 갈수록 빠르게 지워져가는 그의 기억과 나빠지는 인지능력을 살펴보기에 좋은 지문들이었다. 오늘이 몇 년인지, 무슨 요일인지, 이 곳이 어디인지. 열 살 정도만 되어도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러지 못했다.

 

오늘은 날이 좀 춥군.”

클라우스. 얼른 하고 끝내자고. 며칠인지 기억해?”

 

클라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찰리의 시선을 피했다. 찰리는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클라우스는 이미 찰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몇 월인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찰리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난 번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종이를 넘겼다. 좋지 않은 결과였다. 고작 한 주 전에는 대답할 수 있었던 질문에 클라우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찰리는 코를 긁으며 종이를 책상에 집어 던졌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모두 다.

 

지금이 90년도라는 건 알고 있네.”

 

찰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맞았다. 정적을 깬 것은 찰리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벨소리였다. 적어도 찰리가 아는 90년대에는 이렇게 얇은 두께의 휴대폰은 존재하지 않았다. 찰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클라우스는 심상치 않은 찰리의 반응에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더 굳게 닫았다. “씨발,” 움츠러든 클라우스의 어깨를 본 찰리는 험악한 표정으로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져버렸다. 소용도 없는 설문지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찰리는 초조했으며 클라우스는 자신의 앞에서 씩씩대는 낯선 이가 두려웠다. 기억을 회복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주변을 둘러보던 찰리는 클라우스의 어깨를 붙잡고 벽면에 붙어있는 거울로 끌고 갔다. 찰리의 손아귀 힘에 끝까지 버티던 클라우스는 결국 휘청대며 찰리의 뜻대로 거울 앞에 섰다.

 

대령. 아니, 클라우스. 젠장. 클라우스. 거울을 봐. 90? 90년이라니.”

, 이봐. 자네…….”

 

클라우스의 눈동자가 힘없이 떨렸다. 시선은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찰리의 얼굴로 내리 꽂혔다. 아마 찰리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는 걸지도 몰랐다. 찰리는 클라우스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내 이름은?”

 

클라우스는 어깨에 올라와 있는 찰리의 손을 쳐냈다. 세게 쥐고 있는 것치고는 손쉽게 떨어졌다. 클라우스의 눈동자는 찰리의 얼굴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기억은 90년대에 머물러 찰리와 비슷한 생김새의 몇 사람을 골라내고 있었다. “존 소령?” 찰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맞췄다 생각한 건지 클라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찰리는 말문이 막혔다. 돌덩이라도 얹혔는지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내가 그 특이한 수염을 잊을 것 같았나. 그동안 뭐하고 지냈지?”

 

클라우스는 찰리의 표정변화를 보지 못한 체 마구 지껄였다. 찰리는 겨우 숨을 뱉어냈다. 본래 클라우스의 말투는 심하게 점잔을 떨며 고상하게 말하는지라, 그런 방식의 화법에 알러지가 돋는 찰리는 가끔은 클라우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입을 맞추고는 했다. 하지만 반가운 듯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멍청하게 서있는 찰리에게 가볍게 포옹을 한 클라우스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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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이는 불길에 예상은 했었지만. 집 안에 가득 찬 연기와 맞닥트렸을 때, 찰리는 제일 먼저 이것이 특수효과가 아닐까를 의심했다. 한참동안이나 상황을 살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한 체 가만히 서서 헛된 시간을 보냈다. 타는 냄새와 함께 싸구려 귀신의 집 바닥에 깔린 고체 이산화탄소에서 터지듯 나오는 수증기가 발목에 닿을 때쯤에나 찰리는 다시 현실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그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탈출은 한 걸까?


불에 타 죽는 법은 아주 많았다. 더 나가지 않아도 연기에 질식해 죽는 방법도 아주 많았고. 찰리는 불과 관련 된 죽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철저함을 강조하는 의뢰인은 일처리가 전문 킬러의 소행이 아닌 단순한 사고로 위장되기를 바랐고 언제나 그랬듯이 찰리는 돈이 되는 일은 기분 좋게 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휘발유를 잔뜩 몸에 묻히고 잠에 취한 타겟의 위로 담뱃불만 던지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타기 좋은 재질로 되어있는 커텐이나, 원목 탁자가 있으면 더 쉬운 일이었다. 대부분 그들은 돈을 처바른 넓은 집에서 도움도 되지 않는 경호원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고는 했으니 조건은 어느 정도 만족 된 셈이었다. 그렇게 불을 질러놓고 그 장소에서 빠져 나가면, 며칠 내로 지역 신문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연기에 질식해 죽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찰리의 집 또한 그들의 집과 비슷한 환경이라는 것 또한 안타까운 점이었다. 제기랄. 집에 대한 걱정은 뒤로 미뤄두고 그가 있을 방으로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문고리는 이미 열기에 달아오른 쓰잘데기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찰리는 욕을 짓씹으며 있는 힘껏 문에 몸을 들이 박았다. 문 대신 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얼얼한 어깨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몸을 부딪치려 했을 때, 그의 노력이 무상하게도 이 불을 지른 장본인에 의하여 문은 쉽게 열려버리고 말았다.



 

집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슈타우펜이 홀랑 태워먹은 집은 어차피 아주 잠시 동안 머물던 곳이었고, 보석과 금은 따로 보관하는 곳이 있었기에 커다란 손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찰리는 속에서 들끓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수고를 들여 제정신이 아닌 슈타우펜을 끌고 임시 거처에 밀어둔 자신의 수고가 고생스럽게 느껴서도 아니었다. 찰리는 애꿎은 벽에 총을 몇 번 갈겨주고 나서야 대화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이성이 돌아왔음을 느꼈다.


내가 잘못했네.”


슈타우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손가락밖에 없는 손바닥은 한계점까지 오른 고철덩어리를 덥썩 만져버린 탓에 살가죽이 다 까져 있었다. 약 기운이 가시자 서서히 고통은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통은 이성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과 함께 분노한 찰리를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약에 존나게 취해서 불을 지르고, 한가하게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와서 한다는 말이 잘못했네.’ 라고?”


슈타우펜은 찰리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그는 아직도 방바닥이 아닌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매달려있는 바로 앞은 낭떠러지라서, 집을 집어 삼킨 화마보다 더 무섭게 화를 내고 있는 찰리를 피해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손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슈타우펜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찰리는 악을 지르며 방 안을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이제 더 이상 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수없이 한 말이지만 그를 잡고 있던 건 찰리였다. ‘내가 나가서 아사를 하거나 동사를 해도 어차피 남일 뿐일세. 자네는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하면 돼.’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남이다. 우리 관계는 무엇이지?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의 예비군 참모이자, 왼쪽 눈과 손가락 두 개, 오른손 하나가 없는 전직 대령. 이제는 약에 취해 집에 불을 지른 약쟁이. 슈타우펜은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도록 잘려진 손가락에 새겨놓았다.


집에 불 지른 것도, 약에 손을 댄 것도 모두 내 의지였네. 하지만 날 이제까지 살려둔 건 자네야. 난 울프, 자네가 나에게 어떠한 처벌을 한다고 해도 달게 받아들이겠네. 더 이상 불을 지르지 못하게, 약을 먹지 못하도록 나머지 손가락을 없애버리는 것도 좋겠군.”


결국 고통을 이겨버렸다. 슈타우펜은 독일어가 섞인 엉망인 문장을 토하듯 뱉어버렸다. 실제로 토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이후의 일은 기도에 토사물이 들어가 질식한 후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설마 살인은 싫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강하게 목을 조르는 손길을 느꼈다. 슈타우펜은 저릿저릿하게 풀리는 사지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 느낌이라면 오른 손으로 글씨라도 쓸 수 있겠어. 눈꺼풀이 덜덜 떨리며 의식이 멀어졌다. 타격이 많이 간 체력은 살짝만 손을 데도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슈타우펜은 어두운 공간 속 떠오르는 것이 니나가 아닌 찰리의 얼굴이라는 것에 실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슈타우펜이 눈을 떴을 때는 깨끗하게 갈아입혀진 옷과 함께였다. 왼 손에는 붕대도 감겨져 있었다.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군. 딱히 상대를 정해놓고 하는 타박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는 아세트아미노펜계열의 알약과 함께 휘갈긴 필체로 글씨가 적힌 돈 뭉텅이가 있었다. 나중에 덮쳐올 속쓰림보단 당장의 고통이 중요했다. 슈타우펜은 급하게 알약을 털어 삼킨 뒤 찰리가 남겼을 것이 분명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생각이 있다면 도와줄게. 3시까지 주소- 로 와.

물론 안 와도 됨.

 

그 와중에 다리도 다친 것이 분명했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택시를 잡아 기사에게 찰리가 적은 주소를 말해주었다. 택시는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에서 슈타우펜을 내려주었다. 찰리의 예민한 성격 상 그는 번화가에 거처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택시가 내려준 곳은 예의상 한적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빌딩숲 속이었다.


이봐.”


슈타우펜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왜 놀라는 거야? 원해서 왔으면서.”


찰리는 슈펜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성큼성큼 슈타우펜을 앞질러 걷다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걸음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속도를 늦춰주었다


멀쩡한 게 하나도 없군.”


찰리는 심통스럽게 말을 한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몸짓으로 슈타우펜을 부축했다. 슈타우펜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딘지 모를 주소와 건물,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찰리의 태도.


대령, 히트맨 일이 왜 좋은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까지. 슈타우펜은 복잡한 머릿속에 질문을 받을 여유는 두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찰리는 지친 모양인지 제멋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돈이 썩어빠지게 많다는 점이지. 돈이 많다는 건 말이야, 집을 몇 번이고 태워먹어도 괜찮다는 뜻이고. 어제 일은 별로 화 낼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야.”


사람이 없는 모양인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빠르게 문이 열렸다.


원한다면 약도 계속 할 수 있어. LSD, 코카인, 헤로인... 난 싸구려 약은 취급도 안 한다니까.”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목적지는 팔 층이었고 지금은 육 층이었다. 육 점 삼분에 일 층. 찰리는 팔 층에 다가갈수록 초조하게 말에 속도를 붙였다.


, 씨발. 이게 아니라... 내가 여태까지무관심했던거미안하고좀더신경쓸게. 상담은 이주일에 한 번이야. , 다 왔다.”


찰리는 머리를 헤집으며 말을 하다가 멍하니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슈타우펜을 내버려 두고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슈타우펜은 갑작스레 밀려온 정보 덕에 머리에 과부화가 걸린 체 가만히 서있던 참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찰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싫어?”

싫다기보다는... 너무 빠르게 말해서 못 알아 들었네.”

상담! 적절한 약물치료와 꾸준한 상담이 필요하다고 넌. 그리고 나도.”


찰리와 어울리지 않는 상식적인 어투였다. 찰리는 닫히기 위해 애를 쓰는 문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누가 더 많이 변한 건지는 자기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선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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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의 품에 가득히 안겨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눈동자를 봤을 때, 찰리는 그 작은 짐승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 저거 웬 거야?”

귀엽지 않나? 보다시피 강아지일세. 강아지라고 하기는 조금 큰 것 같기도 하지만.”

 

클라우스의 해답은 찰리가 원한 답이 아니었다. 사실 찰리는 작은 짐승의 품종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출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귀에 검정색과 하얀색의 무늬를 지닌 개는 한술 더 떠 찰리를 향해 컹컹대며 짖었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허벅지 한 가득을 차지하고 있는 개의 귀 사이와 등허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털 사이로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쁜 사람은 알아보는 모양이야. 그렇지?”

나 개 알러지 있어. 당장 쫓아내.”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클라우스는 밤마다 맡던 개 비린내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뒤늦게 찰리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알아채고 머쓱하게 클라우스와 개를 번갈아 보았다. 개는 안정이 된 모양인지 찰리를 힐긋 보는 것 빼고는 더 이상 짖지 않았다.

 

길을 잃고 이 곳까지 따라왔더군. 잘생긴 것이 품종도 있어 보이는 개 같고. 분명 주인이 있을 거야. 주인을 찾을 때까지 여기서 맡아주는 게 좋겠어.”

 

찰리는 자신이 온 이후로 클라우스의 눈길이 계속해서 개에게 가 있는 걸 눈치 챘다. 한 쪽짜리 눈으로 얼마나 다정하게 개를 쳐다보는지. 누가 보면 주인인줄 알겠네, 알겠어. 중얼중얼 질투를 속으로 삼킨 찰리는 드디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 올 생각을 했다.

 

원래 개를 그렇게 좋아했었나?”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클라우스는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작게 한숨을 쉬는 듯싶더니 곧이어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내 아들이 항상 개를 키우고 싶어 했지.”

 

클라우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과 표정은 찰리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약간의 침묵 끝에 찰리는 손사래를 쳤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찰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클라우스는 안심하며 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잘 다듬어진 발톱이 바닥을 기분 좋게 긁었다. 개는 새로 등장한 얼굴의 채취를 기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찰리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바짓단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찰리는 허리를 숙여 개와 눈을 마주치고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너 내가 누군지 알면 이러지 못할걸.”

 

새까만 눈은 찰리의 말에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이어 찰리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얼굴을 핥았다.

 

난 이래서 개들이 싫어.”

엄밀히 말하면 자네도 개과가 아닌가.”

난 특별하다고.”

그래.”

진짜라니까.”

알겠다고 했네.”

 

찰리는 멈추지 않고 툴툴거렸다.

 

개 밥은 줬어?”

물론. 자네가 오기 전에 사료를 사왔어. 자넨 먹었나?”

아니.”

난 먹었으니 알아서 챙겨먹게.”

 

클라우스는 밖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를 복도에 던지며 그것을 개가 물어오기를 기다렸다. 꽤 훈련이 잘 된 모양인지 개는 단번에 나뭇가지를 주워 클라우스에게 가져다주었다. 놀고들 있네. 찰리는 걸치고 있던 자켓을 집어던지고 부엌으로 갔다.

 

옷은 옷걸이에 걸어야지.”

 

뒤에서 들리는 클라우스의 잔소리는 귀를 긁으며 무시했다.

찰리가 대충 끼니를 때우고 나올 때까지 클라우스는 개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앉아. . 엎드려. 명령을 하니 말도 단번에 알아듣는다. 훈련이 잘 된 모양이 틀림없었다. 클라우스가 개에게 간식을 보여주자 개는 단번에 그의 얼굴 위로 폴짝폴짝 튀어 오르며 간식이 잡혀있는 손을 마구 핥아댔다.

 

당장 개 주인을 찾는 전단지를 만들어야겠어.”

그러게나.”

사진 좀 찍게 비켜봐.”

 

찰리는 괜히 큰 소리로 둘의 사이를 방해했다.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는 마지못해 잠시 개와 떨어졌다. 결국 클라우스의 손을 침 범벅으로 만들어놓고 간식을 얻어먹은 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찰리에게 사진이 찍혔다.

사실 클라우스는 아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변을 맴도는 찰리를 눈치 채고 있었다. 방법이 어찌됐든 이 개가 주인을 빨리 찾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지. 남을 속이는 직업을 하고 있는 자가 저렇게 표정을 숨기지 못할 줄이야. 클라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개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짧게 지켜보던 찰리는 전단지 작업을 하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완성 한 전단지를 들고 온 찰리는 전단지 몇 부를 클라우스에게 보여주며 당장 밖으로 나가서 뿌리고 오겠다고 말했다.

 

너무 늦지 않았나?”

이봐, 이 녀석의 주인이 분명 얘를 애타게 찾고 있을 거라고.”

 

빨리 다녀오겠다며 찰리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어지간히도 싫나보군.”

 

어느새 동그랗게 몸을 말고 숙면에 들어간 개를 보며 중얼거렸다.

 



 

바로 다음 날 개의 주인은 사례금을 들고 클라우스와 찰리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큰 액수에 찰리는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돈을 받으려고 했지만 클라우스의 만류에 결국 사료 값만 받고 주인과 개를 돌려보냈다.

 



 

클라우스는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찰리라면 문을 열고 들어올텐데. 아니면 찾아올 사람이 있나? 마을과 동떨어진 곳까지 굳이 시간을 내어 찾아 올 사람은 없었다. 찰리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 빼고는. 짧게 생각을 마친 그는 서랍에서 총을 꺼내 등 뒤로 숨기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작은 틈 사이로 새카만 주둥이가 문을 열어 재꼈다. 커다란 덩치에 클라우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총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려 날아갔다.

 

울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건만 늑대의 모습을 한 찰리는 사람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이라도 했는지 클라우스의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킁킁대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콧잔등이 클라우스의 온 몸을 훑었다. 건강함의 표식인 축축한 코 덕분에 클라우스는 온 몸이 간지러웠다. 클라우스는 결국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온 몸에 힘을 풀고 그의 빳빳하게 선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의중을 알 수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클라우스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은 건지 모르겠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위에서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는 찰리를 건드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사실 예상이 가는 게 하나 있었다. 그래도 설마. 애도 아니고. 클라우스는 결국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개 때문인가?”

 

주둥이를 막는 뭉툭한 손목을 핥던 찰리는 자신의 귀에 박힌 단어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뭐라 항변을 하고 싶은 모양인지 컹컹 짖는 소리를 낸다. 클라우스는 웃음이 나려는 걸 겨우 참으며 헛기침을 해댔다.

 

, 물론 자네도 자네 나름의 매력이 있다네.”

 

아마 사람이었으면 능글맞게 맞받아쳤겠지만, 아쉽게도 찰리는 늑대의 모습을 벗어날 생각이 아직은 없는 듯싶었다.

 

저녁은 먹었나?”

 

그 물음에 찰리는 드디어 클라우스의 위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 그저께 먹다 남은 고기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냉장실에 넣은 고기가 있는 걸 기억해낸 클라우스는 찰리를 위해 고기를 꺼내주었다. 찰리는 클라우스가 던져주는 고기를 열심히 씹어 먹었다. 아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씹지도 않고 삼키느라 목덜미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늑대 흉내를 낼 건가?”

 

찰리는 고기에게서 주둥이를 떼고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주둥이에 묻은 고기의 살점을 혀로 낼름 집어먹은 찰리는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클라우스는 그가 그로 변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을 살짝 감았다 뜨니 건방진 자세로 다리를 꼰 찰리가 앉아있었다.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벌거벗은 찰리에게 그의 옷을 던져 준 클라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대령님. 비위 맞춰주느라 죽겠다니까.”

내가 할 말을 그대로 하는군.”

어련하시겠어.”

 

곧이어 찰리는 자신은 생고기보다 익힌 고기를, 닭고기보다 돼지고기가 좋다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클라우스는 익숙하게 그의 말을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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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가장 예산이 적게 들며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그들에게 훈장을 내리는 것이었다. 전쟁이 심각한 국면을 띌 때마다 히틀러는 예산서의 한 귀퉁이에다가 명예로운 자들을 위한 훈장의 값어치를 조금 더 매겨 내리고는 했다. 죽은 자들의 훈장. 반편이가 된 몸뚱아리를 위한 훈장. 죽음의 표식이 새겨진 훈장. 나치의 훈장. 그것들을 집어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눌러냈다. 금테가 둘러진 훈장 위를 세 손가락을 쓸어보았다. 매끄럽고, 그 매끄러운 촉감은 나를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새하얗게 다려진 정복을 갖추어 입었다. 수돗물로 깨끗하게 씻은 보조물을 왼쪽 눈알에 끼웠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딱딱하게 서 있는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준비가 다 됐으니 들여보내게.”

 

기름칠이 되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두 쌍의 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마스, 지미, 찰리. 원래는 세 명의 군인이 작전실 안에서 훈장을 받을 계획이었지만 결국 이곳에 들어온 것은 두 명뿐이었다. 지미는 극심한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로 인하여 작전실에 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전형적인 독일계 청년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성년이 되자마자 입대를 결심했고, 지난주에 있었던 폭격의 파편에 맞아 영원히 다리 한 쪽을 절게 된 불쌍한 청년이었다.

 

귀관은 저번 전투에서 훌륭한...”

 

전투라기에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독일군이 입은 피해는 아주 컸다. 그 지옥과도 같은 폭격 속에서 살아온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표현 할 수 없었다. 뻔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그의 오른쪽 가슴에 달릴 훈장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불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찰리. 그는 이 작전실에 있는 사람 중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류에 쓰인 국적도, 정체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게 돌아가지 않는 독일군은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제일 멀쩡했다.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잘 다듬은 콧수염에, 상황과 어울리지 않은 여유 있는 미소까지.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기시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군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용병이라면 모를까.

 

마찬가지로 저번 전투에서 훌륭한 공을 세웠더군.”

 

명령을 받을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이미 받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난 전투에서 죽인 영국군의 숫자는 한 부대에 담아도 모자를 정도였다. 찰리는 가라앉은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씩 웃으며 휘장을 쳐다보았다.

그 적나라한 시선이 닿는 끝은 결국 손가락이었다.

 


 


막사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보고를 받았다. 짐승의 소행인 것 같다. 피해자들은 목덜미가 잔인하게 찢겨 발긴 채로 발견이 되었고 현장은 아무리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피비린내로 어지러울 정도라는 보고였다. 보고서에 서명을 하며 아주 짧게 묵념을 했다. 다른 보고서에는 탈영병들의 소식이 적혀있었다. 여러 이름들 사이로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가장 눈에 뛰는 건 역시 그 이름이었다. 찰리 울프. 몇 주 전에 직접 훈장을 달아주었던 군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인보다는 용병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독일군은 패배를 향해 곤두박질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봤자 별 이득이 될 거란 생각도 안 들었겠지. 마저 서명을 하고 서류철을 닫아 책상 한쪽에 가지런히 두었다. 할 일이 많았다.

 



 

왼쪽 팔뚝을 관통한 총알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차려입은 정복은 식은땀으로 젖었고 멀쩡한 다리는 덜덜 떨려 제자리에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배신자. 반역자. 즉결 심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돌로 된 차가운 바닥은 멀어져가는 정신을 잡게 해주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당당한 모습으로 한 치의 흠결도 없는 죽음. 마지막은 군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두꺼운 천 위로 새까만 피가 새어 올라왔다.

숨을 몰아쉬었다. 과다출혈 따위로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 할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건 가족들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상상으로나마 보는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운 풍경이었다. 점점 정신은 혼미해져갔다. 죽음 앞에 선 신체에서 내뿜는 아드레날린은 심장을 멈추지 않고 빠르게 뛰게 해주었다.

쇠창살이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환각인가?

튼튼하게만 보이던 쇠창살은 연약한 쇠꼬챙이처럼 보였다. 바깥에는 윤기가 나는 새까만 털의 늑대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팔을 물고 있었다. 갓 뜯은 모양인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에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손에는 감옥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가 쥐어져 있었다.

늑대는 선심이라도 쓰듯 팔을 바닥에 던져놓은 뒤 사라졌다.

 


 


제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과 코를 막아버린 거친 손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먹힌 소리는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다시 목구멍을 틀어막고. 찢어졌다. 팔까지 절단이 날 거라는 공포심은 서서히 나를 좀먹고 있었다. 찰리 울프. 열쇠를 던져주고 탈출의 길을 열어준 것은 그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이 팔뚝에 쑤셔 박혔다. 이리저리 돌리며 고문을 하더니 다시 쑥 빼버린다. 날붙이 밑으로 무언가가 뚝뚝 떨어진다. 찰리는 손톱을 이용해 살덩이 속에서 무언가를 빼내었다. 찰리는 얼굴을 막았던 손을 떼어냈다.

고통은 끝이 났다.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헉헉대며 바닥에 헛구역질을 해댔다. 뺨 위에 먼지와 함께 축축한 것들이 묻었다. 그제야 주변의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릿한 냄새와 풀 냄새가 섞여 역겨운 향이 났다.

찰리는 품속에서 철제 플라스크를 꺼내어 내 입가에 가져다댔다. 뭐든 좋았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고통에는 이게 직통이지.”


찰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비린내는 알코올 냄새에 씻겨 내려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었다.

살아남았다. 그 안도감에 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엉엉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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