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끝나면 바로 와요. 이단.


벤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정리 된 파일을 건내주었다. 으응. 피곤한 모양인지 손등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이단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뭐라도 도움을 더 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타깃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 밖에 없었다. 위험해지면 당장 빠져 나오는 거예요. 알겠죠? 벤지는 걱정스러운 투로 파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당부했다.


위험 할 일은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니까,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계획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면 이단은 진즉에 미션을 끝냈을 것이고, 벤지도 애꿎은 달력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단은 돌아오지 않았고, 벤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던 12월은 끝나고 달력이 한 장 뜯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씨는 서서히 추워지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꽂아 넣으며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벤지는 이단이 없는 삶에 서서히 적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예로, 퇴근 후 저녁으로 사가는 저녁거리로 이단의 몫을 사지 않는다. , 주말 늦게 일어나서 이단을 부르는 일도 눈에 띄게 적어졌다. 하지만 벤지는 항상 이단이 당분간은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좋아하는 달달한 간식류를 한 두 개씩 사와 찬장에 묵혀두는 버릇은 관두지 못했다. 그 덕분에 벤지는 흥미가 없는 과자나 젤리, 케이크를 입에 물리도록 먹고는 했다.


그 날도 평소와 똑같았다. 최근 들어 벤지에게 있어서 평소란 이단이 없는 하루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사무실에서 늦장을 부리다가 저녁 늦게 쯤 집에 들어간다. 벤지가 불이 켜지지 않은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tv를 켜는 일이었다. 한참동안 샤워도 하고, 식탁에 올려놓은 달달한 과자 몇 개를 집어먹으며 쇼파에 눕는다. 그리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깨닫지도 못한 체 해가 뜨면 아이패드로 메일을 확인하며 일처리가 밀려있는 IMF 내로 출근을 한다. 벤지는 그 날 아침도 자신과 챗바퀴 안의 햄스터의 차이점을 고민하다가 생각하기를 관뒀다.


신입 요원들의 데이터 분석은 애저녁에 끝났지만 벤지는 상황실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저 분이 전설의 요원 이단헌트님의 동료분이시래...


새로 들어온 요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벤지는 못 들은 척 커피를 홀짝였다. 자기들끼리 몇 번 말을 주고받더니 그 중 머리를 짧게 쳐내고 눈매가 꽤 사납게 생긴 여성 요원이 벤지에게 말을 걸어왔다.


벤지?”


말을 걸어오는 건 예상 못했는데. 벤지는 컵에서 입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신체 변화량 정리 해주시는 거. 벤지가 하는 거 맞죠? 고맙다고 하고 싶어서요.”

고맙긴요. 할 일인데... 물론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입사한지 몇 년 안 됐지만 당신 팀 이야기 많이 들어왔어요. 솔직히 대단하잖아요? 크렘린 궁은 말 할 것도 없고.”

그거 폭발했는데.”

그만큼 화끈하단거죠!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정말... 꿈만 같아요.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소문이라뇨? 그거 때문에 고생했던게 아직도 생각난다구요.”


또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비행기 안이 아니라 밖에 매달린 것도, BMW 타고 세 바퀴 굴러 떨어진 것도. 미친 놈을 이단이 잡지 않았다면 지구가 터질 뻔 한 것도. (술렁술렁) 벤지는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제 앞에서 눈을 반짝이는 병아리 같은 요원에게 지금까지 겪었던 미션들을 말해줬다. 멀리서 눈치만 보던 신입들도 벤지와 동기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고, 벤지는 몇 가지 기밀은 교묘히 숨기며 위험했던 사건들을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대부분 이단의 자랑이었으며, 간간히 벤지는 자신의 자랑도 끼워 넣었다.


그 이야기가 끝을 보인 것은 소재가 떨어져서도, 벤지나 요원들의 흥미가 떨어져서도 아니었다. 어느새 뚱한 얼굴을 하고 다가 온 브랜트가 벤지의 뒤통수를 치고 잔소리를 해댔다. 열심히 벤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요원들은 벤지의 이야기를 경청한 적도 없었던 것 마냥 조용히 브랜트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임마, 애들한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 사실이잖아?”

저러다가 제 흥에 빠져 사고치는 애들도 있거든. 지들이 이단헌트인 줄 알고. 괜히 바람만 불어 넣지마. 훈련 안 된 요원은 폭탄보다 더 위험하니까.”


벤지는 잠깐 투덜거렸지만 브랜트의 말도 일리가 있었으므로 수긍했다.


근데 웬일로 날 찾아온건데?”

넌 왜 집에 안 들어간건데? 이단이 도착했어. 그거 알려주려고 왔지. 니가 가서 잘 좀 돌봐주라고.”


이단이 도착했어. 그 말 밖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벤지는 브랜트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불이 켜져 있었다.


이단!”


이단은 쇼파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까치집마냥 잔뜩 엉켜있는데다가 얼굴에는 정체 모를 까만 것들이 묻어있었고 다크서클은 눈보다 더 크게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신발을 겨우 벗은 벤지는 한걸음에 이단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이단도 천천히 눈을 떴다.


이단, 꼴이 말이 아니에요. 잠은 제대로 잔 거예요? 씻은 건 언제고? 아니 일이 잘 안 풀린거예요? 다친데는 없고?”

질문은 한가지만.”

보고싶었어요.”


벤지는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보이는 이단을 꼭 끌어안았다. 이단은 벤지의 그 말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벤지는 조금 더 그를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최대한 자제한 체 이단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상처는 없고 팔뚝과 목에 경미한 타박상만 남아있었다. 오른쪽 볼에 묻은 검댕이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준 다음 옷으로 가려진 몸을 확인하기 위해 이단의 팔을 자신의 목에 걸은 뒤 이단의 옷을 슬쩍 들어올렸다.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했죠?”

이단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려 벤지의 허리를 매만졌다.

으음, 벤지. 살 찐 것 같은데...”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말도 어물거리는 걸 보니 잠결에 대답하는 것이 분명했다. 벤지는 허리에 닿는 이단의 손을 치우며 최근에 이단 대신 먹었던 달달한 간식들을 떠올렸다. 초코 케이크, 프라푸치노, 마카롱. 어쨌든 이단이 그 간식들을 보며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일단 제대로 된 대화는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단이 마저 상의를 벗는 것을 도와줬다.


씻고 자요. 졸린 건 알겠는데 일단 씻는게 좋을 거 같아요.”

나중에. 벤지.”


이단이 예고도 없이 벤지를 자신의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벤지가 이단에게 안기는 꼴이 되는 건 쉬운 문제였다. 벤지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불편한 자세를 취했다.


으으, 말 안 듣죠. 듣고있는 거 다 알거든요?”


이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 올려본 이단은 평온한 얼굴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벤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단이 요구하는 것을 따랐다. 잘자요. 보고싶었다는 말은 내일 해도 되겠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잡으며 이단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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