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얼굴이지만 그는 여전했다. 다른 거라고는 섬 특유의 내리쬐는 햇볕에 까맣게 탄 얼굴과 몸뿐이었다. 벤지는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 아는 척 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기 위해 한참을 노력해야 했다. 반가움, 애틋함, 기쁨, 놀라움. 이단의 모습에서 이렇게나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가. 아니면 더 적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이단이 사라진 동안 벤지는 많은 것은 잃었다. 일부는 버린 것이기도 했다.


당신 정말 실종 되었던 게 맞기는 해요?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우스움이었다. 그토록 찾아다녔던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것들은 원망의 말밖에 없었다. 벤지는 초조하게 허벅지 위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섬의 햇빛은 도시와 다르게 강렬했다. 정수리에 땀이 맺히고 목구멍은 바싹 말라 침으로도 축여지지 않았다.

 

이단이 사라졌다. 이단이 사라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오랜 친우이자 연인이기도 한 벤지도 이단이 사라진 이유와, 그가 몸을 숨긴 장소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벤지는 이단을 믿고 있었다. 그가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은 연락을 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약 한 달 정도는.

일 년 후 벤지는 이단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벤지가 이단을 다시 마주친 것은 각종 식재료들이나 섬사람들이 만든 조잡한 기념품들을 늘어놓고 파는 시장에서였다. 그는 커다란 칼로 잡은 생선들의 머리를 자르던 중이었다. 이단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벤지를 보고, 멋대로 뜨내기손님일 거라 짐작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섬사람과 달리 벤지는 햇빛을 못 받고 자란 사람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오신 건가요?”

자신에게 말하는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벤지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은 잠시 생선을 손질하던 것을 멈추었다.

좋은 섬이죠. 공기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그리고는 장사꾼마냥 칼의 끝 부분으로 생선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요리만 잘 한다면 말이죠.”

씩 웃고는 섬 여러 곳의 가게들을 추천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했다. 단순히 외부인에게 보이는 호의라고는 생각 할 수 없었다. 벤지는 이단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재활중;;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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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배리먼 씰 이요? 마약을 밀수한다던?”

 

배리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는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배리먼 씰.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 확실히 맞았다. 하지만 그 뒤에 덧붙인 쓸데없는, 쓸데없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정보에는 허허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도 그가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세 번이나 예수를 부정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중요한 것은 배리의 마약밀수 사실은 예수의 업적에 비교할 바도,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배리는 그랬다.

 

배리 씰은 맞습니다만. 마약은 처음 듣는 소린데…….”

. 내숭은. 나는 찰리 울프요.”

 

기분이 상한 배리는 눈앞에 있는 사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빠르게 확인했다. 그는 조금 전에 뱉은 말로인해 정체불명의 사나이에서 무례한 사나이로 평가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빈약한 머리털에, 웃긴 콧수염.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는 CIA라고 하기엔 모를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킬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 통성명을 하는 킬러라? 거기다 이름이…… 울프? 늑대라니? 유치한 십 대도 짓지 않을 예명이었다.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듣도 보도 못한 요소들이었다. 이미 찰리는 데스크 앞의 접대용 쇼파에 눕다시피 앉아 방을 휘휘 둘러보는 중이었다. 배리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봐요. 울프씨.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할 말이 있다면 지금 말고 아침에 뵙는 걸로 하죠.”

말 잘했네. 당신은 나를 모르지.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뒷구멍으로 마약을 밀수하는 것까지 알 정도니까 말이야.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지. 지금은 밤이고, 경호원인지, 시장잡배들인지 모를 애들은 잠시 기절만 시켜뒀어. 출입은 죽어도 안 된다길래. 이게 아직도 뭘 뜻하는지 모르겠어?”

 

배리는 뒷목이 서늘했다. “날 죽이러 온 겁니까?”

 

찰리는 배리의 말이 우습다는듯 크게 웃었다. 배리가 뱉은 말의 무게와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과장된 몸짓으로 낄낄 웃던 찰리는 배리의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곤 웃음을 뚝 멈췄다. 찰리는 품속에서 돈 봉투를 꺼내 배리에게 건넸다. 보통 킬러는 자신이 죽일 사람에게 돈 따위를 건네지 않는다.

 

아니. 부탁이 있어서.”

당신은 평소에 부탁을 그렇게 하는 모양이군요.”

. 약간의 겁을 주면 더 잘 알아듣는 법이잖아? 어때?”

 

배리는 찰리에게서 돈이 들은 봉투의 두께를 가늠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 일을 하며 늘은 건 배짱밖에 없죠. 원하는 게 뭡니까?”

 

찰리는 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중요한 내용물은 그 안에 들은 작은 지도 하나였다. 꾸깃꾸깃하게 접힌 그것을 펼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찰리는 지도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배리를 쳐다보았다.

 

나를 이 곳으로 데려다줘.”

저보고 사람을 밀수하라는 겁니까?”

 

찰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밤중에 찾아와 동료 셋을 기절시키고 흉흉한 눈빛으로 협박을 한 사람이 하지 않을 법한 부탁이었다. 배리는 당황했다. 적어도 최악의 경우,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매달 5%의 수익을 바쳐라. 아니면 메데인을 배신하라. 등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상상했었다. 허무맹랑한 부탁이 나오지 않음에 안심한 배리는 찰리의 손가락 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익숙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 곳은 배리가 코카인을 운반했던 곳이기도 했다. 땅이라면 모르지만 하늘이라면 배리의 손바닥 안이었다. 배리는 생각보다 쉬운 그의 부탁에 안도의 한숨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좋아요. 울프. 내일 아침 당장 출발하죠. 방은 남는 것이 있을 테니 잠은 거기서 자면 됩니다.”

안 돼.”

?”

 

찰리는 지도를 다시 수첩에 접어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지?”

찰리가 간과한 사실이 딱 하나 있었다. 지금 날씨에 비행기를 몰았다가는 둘 다 죽은 목숨에 가까웠다. 아무리 비행으로 날고 긴다 하는 배리라도 자연은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배리는 바람에 덜컹이는 창문을 힐긋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안전한 비행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해요. 날씨, 새가 없는 하늘, 안정적인 기류.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세 가지가 다 없죠. 죽고 싶으면 지금 당장 출발해도 돼요.”

무슨 소리야? 우리는 죽지도 않을 거고. 출발도 지금 할 수 있어.”

울프. 이건 억지를 부려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찾아 온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해? 최고의 파일럿이라며. 이름값은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배리는 옛날에 있었던 파블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최고의 파일럿이라며?’ 그랬다. 카르텔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불가능한 일을 성공 시켜야 됐을 때였다. 그때도 이랬다. 욱하는 성질은 어디가지 않는다. 자존심을 살살 긁는 그 말을 들은 배리는 팔을 걷어붙이고 비행은커녕 활강도 어려운 짧은 활주로를 달려 성공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아요! 가죠. 지금 출발합시다. 무사히 모셔다드리죠.”

 

운전대를 잡은 배리는 시동을 걸며 그 말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덜컹이는 좌석과 흔들리는 십자가 목걸이가 그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싶었다. 찰리는 불안한 모습의 배리와 달리 태평했다. “안에서 담배 피면 안 되나?” 배리는 찰리의 말을 무시하다 그가 담배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말렸다.

 

안 됩니다.”

젠장할.”

적어도 꼬박 하루는 걸릴 겁니다.”

 

기체가 극심하게 불안정한 것 치고는 비행은 순조로웠다. 배리는 창밖과 운전대를 번갈아보다 찰리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 그렇지. 설명하면 우리의 신뢰 관계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겠지?”

 

배리는 그렇게 거창한 의미로 말 한 건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찰리는 말을 고르는 듯 눈썹을 찡그리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직접 보는 게 아무래도 믿기 쉽겠지. 내 사정을 알기 싫어도 알게 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파일럿 양반.”

 

안정된 기류를 탔을 땐 이미 찰리는 코까지 골며 잠을 자고 있었고, 아슬아슬한 비행에 스트레치가 최고조로 달아올랐던 배리 또한 피곤에 찌든지 오래였다. 이미 반쯤 잠든 모양새였다. 배리는 비행을 자동으로 설정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잠에 빠져드는 것은 쉬웠다.

 

이봐. 배리먼 씰.”

 

배리는 찰리의 다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일어났다.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캄캄한 하늘에 가늘게 뜬 눈으로 급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히 기류는 안정적이었다. 기체에 문제도 없었다. 배리는 기내에 쾌쾌한 냄새가 뱄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담배 피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눈 때지 말고 잘 보라고. 내가 당신을 고용해 비행기를 타야 됐던 이유를 설명해 줄 테니까.”

 

찰리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배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설명을 해준다고 해놓고 보라고 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지만……. 배리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찰리를 응시했다. 해가 뜨고 있었다……. 멀리서 구름 위로 커다란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찰리의 등 뒤로 밝게 빛나는 햇빛이 비추었다.

그는 늑대로 변했다.

 

으악!”

 

한순간이었다. 좁은 좌석이 꽉 찰 정도로 자리를 차지한 늑대는 아주 새까맣고 풍성한 털을 가지고 있었다. 배리는 놀라 비명을 지르다 팔꿈치로 운전대를 돌려버렸다. 순간 중심을 잃은 기체가 옆으로 기울었다. 늑대가 깨갱이며 배리가 앉아있는 좌석으로 기대왔다. 배리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무시하기 위해 노력하며 황급히 운전대를 붙잡았다. 다시 중심을 잡자 늑대는 배리를 흘겨보며 자신의 좌석에 얌전히 앉았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늑대는 무서운 눈길로 배리를 쳐다보기만 할뿐 공격을 할 의사는 없어보였다.

 

말은 알아 듣는 겁니까?”

 

배리는 늑대가 찰리 울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바로 눈앞에서 그 생명체로 변했으니까. 아무리 해가 뜨던 순간 눈이 부셔서 일어난 착각이라 할지라도 사실에서 눈을 돌릴 순 없었다. 배리는 늑대에게 말을 거는 자신의 모습이 멍청해보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중얼중얼 말을 계속 이어갔다.

 

사람으로 돌아오긴 돌아오는 거예요?”

 

늑대는 배리의 질문을 알아 듣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입맛을 다시며 배리를 쳐다보았다. 배리는 묵묵히 비행을 하는 것을 택했다.

 

아슬아슬하게 지속되던 비행은 해가 지고 나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찰리는 날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다시 인간으로 변했다. 배리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손으로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지친 상태였다. 배리는 찰리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후에도 한참이나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뒤이어 좌석시트에 돈이 들은 봉투가 던지듯 놓여졌다. 배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지만 그는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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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스튜를 만들기 위해 양파를 뒤적이던 클라우스는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재채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떨어트렸다. 안타깝게도 세 손가락은 양파를 잡고 견디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힘없이 떨어져 혼자 데굴데굴 굴러가던 양파는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클라우스는 소리의 근원을 걱정하기 이전에 양파를 집어 올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되면 클라우스의 우선은 다시 뒤바뀌게 된다.

 

울프?”

 

걱정스럽게 그를 불렀다. 사실, 클라우스는 커다란 소리가 무엇인지, 왜 들린 것인지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한파와 주로 밖에서 일을 하는 찰리는 클라우스가 생각하는 그 것. ‘찰리 울프가 감기에 걸렸다.’ 의 결론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였다. 그 외에도 증거는 많았다. 멋을 부린답시고 얇은 코트를 입고 다니고, 일 때문에 밖에서 몇 시간 동안 죽치는 것은 예사로 일어나는 일이고……. 클라우스는 속이 들끓는 것을 참으며 찰리가 처박혀있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 젠장, 몸이 무거워.”

 

찰리는 골골 앓으며 이마에 팔뚝을 올렸다. 클라우스는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찰리는 클라우스를 쫓아내기 위해 대충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좀 자두면 괜찮겠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 무슨 소리야. 난 멀쩡해.”

 

좀 더 말을 하려던 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목에서 나온 것은 평소같은 밉살 스러운 말이 아닌 커다란 기침소리였다. 찰리는 결국 말을 하는 것을 대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이불 밖으로 알아들을 수없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빠져나왔다.

 

찰리.”

 

클라우스는 걱정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찰리가 누워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으니 새빨갛게 열이 오른 찰리의 얼굴이 보였다. 클라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는 말 거짓말이었어.”

알고 있네.”

감기에 걸렸나봐.”

자네만 몰랐을 걸.”

이봐, 나 놀리려고 온 거야?”

 

클라우스는 대답대신 찰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찰리의 몸은 차가운 공기와 대조적으로 매우 뜨거웠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정도였다. 적당히 미지근한 클라우스의 손이 닿자 찰리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찰리는 눈을 감고 끙끙거리며 숨을 뱉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클라우스는 순간적으로, 까마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클라우스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베르트홀트.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 함박눈이 펑펑 오던 저녁, 말을 듣지 않고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고 들어온 그는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급히 주치의에게 연락을 넣었지만 이례적인 눈사태에 그는 도로에 갇혀 버리고 말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친정에서 안식일을 보내고 있어 그의 곁에 없었다. 클라우스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다. 저택에 남아있는 몇몇 고용인들이 처치를 준비하는 동안 몸이 불덩이 같은 아들을 품에 껴안고 기도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해?”

 

클라우스는 찰리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사실대로 말을 할까 고민하다,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닿았다.

 

저녁으로 고기 스튜를 준비할까 생각했었네. 뜨겁고, 국물이 있으니 자네도 먹기 편할 거 같아서.”

그거 좋지.”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아프니……. 고기와 양파를 썰을 수도 없더군. 칼질은 자네 전문이잖아.”

찬장에 통조림이 있을 거야. 가져와. 그건 내가 따줄게.”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근하던 그의 손은 찰리의 온도와 엇비슷해졌다. 그는 찰리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얼굴을 떼니 찰리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아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라고 말하는 표정일 것이다. 클라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아들을 생각한 탓이다. 감상에 흠뻑 젖은 클라우스는 잠시 찰리와 그의 아들을 혼동했다. 몸집만 커다랗고 제 멋대로 행동하던 그 모습이. 그리고 밤새 그를 껴안고 그가 나을 수 있도록 기도하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 이런……. 미안하네.”

 

침묵이 이어지자 클라우스는 덧붙였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찰리에게서 급하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는 나머지 우습게 느껴질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아니, 그냥. 나빴다기 보다는 이상해서…….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람.”

통조림을 찾아봐야겠어. 약도 한번 찾아보겠네.”

 

클라우스는 황급히 방문을 닫고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도망쳤다. 이마에 키스를 한다. 적어도 그 행위는 찰리와 그의 관계 속에서 끔찍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섹스는 가능하지만 키스는 불가능하다? 그것도 입에 하는 질척한 것이 아닌, 짧고 담백한 입맞춤을. 찰리가 아픈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평소의 눈치가 빠른 찰리였다면 클라우스가 어떤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입을 맞추었는지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클라우스는 혼미한 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며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의자 위에 올라 선 클라우스는 통조림 몇 개와 함께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독일의 식료품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허브티였다. 클라우스는 통조림과 티를 챙겨 의자에서 내려왔다. 뜨거운 물을 끓여 잔에다 부은 후 티백을 넣어 충분히 우린 후, 다시 찰리가 누워있는 방으로 갔다. 누워있었던 찰리는 언제 일어났는지, 문가에 있는 테이블 옆에 앉아있었다. 클라우스는 챙겨온 것들을 찰리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이건 통조림이고, 이건 허브티라네.”

 

찰리는 의아한 눈으로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다. 클라우스는 찰리의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그에게 차를 권했다.

 

ErkältungsTee." 


클라우스의 입술에서 투박한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감기에 좋은 차라네. 내 모국에서 약 대신 자주 마시고는 하는데, 마침 집에 있더군.”

 

차에서는 뜨거운 김과 함께 진한 캐모마일 향이 풍겨왔다. 찰리는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아까 말인데…….”

울프. 뜨거울 때 다 마시게.”

 

클라우스는 단호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찰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시 잔을 들었다.

 

우리가 무슨 애들도 아니고, 그런 스킨쉽에 당황하다니. 자네도 보면 참 쑥맥 같군.”

 

찰리는 켁켁대며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애 취급 한 건 누군데?”

아이에게 아이 취급을 한 게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어.”

대령. 나는 그냥 그 때 뭘 생각했는지가 궁금했던 것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날 선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나보군.”

 

클라우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몽롱한 정신에 눈치 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클라우스의 생각보다 찰리는 좀 더 날카로웠다. 귀 끝에서 빨갛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클라우스의 머릿속에서 조차 뭐라 변명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찰리의 기침소리가 공간을 메꾸었다.

 

잠깐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네. 자네를 아이 취급한 것도 맞고.”

 

클라우스는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찰리의 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에게서 과거를 빼앗을 생각은 없어. 가끔은 이렇게 도움을 줄 때도 있으니까.”

 

찰리는 테이블 위에 텅 빈 잔을 내려놓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단지 나는 내가 그 사실에 질투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날 뿐이거든.”

울프.”

씨발. 골이 울려서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찰리는 통조림의 뚜껑을 따 클라우스에게 건넸다. 클라우스는 통조림을 받는 대신 찰리의 머리를 잡고 키스했다. 질척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뜨거웠다. 아랫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클라우스는 찰리의 어깨를 밀어냈다.

 

저녁을 준비해서 오겠네. 좀 누워있게.”

 

머리가 아픈 건 찰리가 아니라 클라우스일지도 몰랐다. 클라우스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서둘러 방 안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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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가 전 날 먹은 저녁 식사의 메뉴를 기억하지 못 하게 된 이후로 찰리는 그를 대령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그 이름에 관한 기억을 잃었다면 굳이 그 호칭을 사용해 부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찰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끄트머리부터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한숨을 집어 삼켰다.

 

클라우스의 기억은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지워졌다.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다름 아닌 클라우스 그 자신이었다. 그는 뒤돌아서 분주히 움직이는 찰리의 이름을 부르려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클라우스는 결국 입을 다물고 찰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아니, 아무 것도 아니네.”

 

……. 울프.” 그리고 덧붙였다. 찰리는 평소 같은 얼굴을 한 체 뒤를 돌아보았고, 클라우스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이름이 찰리 울프라는 것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달 내내 사소한 개념들이 떠오르지 않았고 엄지 마디만한 두께의 책을 읽는 것도 앞 장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뒤적이기 일쑤였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한쪽 손을 못 쓰게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모든 사람들은 기억을 하면서 존재한다. 기억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클라우스의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클라우스가 가 아니게 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보지 않았지만 생생한 아내의 얼굴이,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찰리 울프가 자신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날 클라우스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음을 느꼈다. 이유를 물을 기억 따위는 남아있지도 않았다. 클라우스에게 있어서 이 상황들, 모든 것은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이 스트레스처럼 다가올 때 클라우스는 자신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모든 실수를 자신의 부주의로 돌리고 단순한 실수라 치부했다. 클라우스는 기억 속의 자신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거울 속에서 눈을 떼고, 무감각한 얼굴로 펜을 집었다. 펜이 집히지 않았다. 클라우스의 잘린 손목이 애처롭게 펜 위를 허우적대고 있었다.

찰리가 클라우스의 상태를 눈치 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오늘이 며칠이지?”

 

찰리는 병원에서 준 몇 가지 질문이 적힌 종이를 뒤적이며 질문을 꼽았다. 주치의는 오는 주마다 클라우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찰리에게 간단하지만 중요한 숙제를 주었다. 에이 포 크기의 종이에 몇 가지의 질문을 클라우스에게 하면 되었다. 날이 갈수록 빠르게 지워져가는 그의 기억과 나빠지는 인지능력을 살펴보기에 좋은 지문들이었다. 오늘이 몇 년인지, 무슨 요일인지, 이 곳이 어디인지. 열 살 정도만 되어도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그러지 못했다.

 

오늘은 날이 좀 춥군.”

클라우스. 얼른 하고 끝내자고. 며칠인지 기억해?”

 

클라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찰리의 시선을 피했다. 찰리는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클라우스는 이미 찰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몇 월인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찰리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난 번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종이를 넘겼다. 좋지 않은 결과였다. 고작 한 주 전에는 대답할 수 있었던 질문에 클라우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찰리는 코를 긁으며 종이를 책상에 집어 던졌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모두 다.

 

지금이 90년도라는 건 알고 있네.”

 

찰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맞았다. 정적을 깬 것은 찰리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벨소리였다. 적어도 찰리가 아는 90년대에는 이렇게 얇은 두께의 휴대폰은 존재하지 않았다. 찰리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클라우스는 심상치 않은 찰리의 반응에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더 굳게 닫았다. “씨발,” 움츠러든 클라우스의 어깨를 본 찰리는 험악한 표정으로 종이를 테이블 위에 던져버렸다. 소용도 없는 설문지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찰리는 초조했으며 클라우스는 자신의 앞에서 씩씩대는 낯선 이가 두려웠다. 기억을 회복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주변을 둘러보던 찰리는 클라우스의 어깨를 붙잡고 벽면에 붙어있는 거울로 끌고 갔다. 찰리의 손아귀 힘에 끝까지 버티던 클라우스는 결국 휘청대며 찰리의 뜻대로 거울 앞에 섰다.

 

대령. 아니, 클라우스. 젠장. 클라우스. 거울을 봐. 90? 90년이라니.”

, 이봐. 자네…….”

 

클라우스의 눈동자가 힘없이 떨렸다. 시선은 아무 것도 없는 천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찰리의 얼굴로 내리 꽂혔다. 아마 찰리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는 걸지도 몰랐다. 찰리는 클라우스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내 이름은?”

 

클라우스는 어깨에 올라와 있는 찰리의 손을 쳐냈다. 세게 쥐고 있는 것치고는 손쉽게 떨어졌다. 클라우스의 눈동자는 찰리의 얼굴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기억은 90년대에 머물러 찰리와 비슷한 생김새의 몇 사람을 골라내고 있었다. “존 소령?” 찰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맞췄다 생각한 건지 클라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찰리는 말문이 막혔다. 돌덩이라도 얹혔는지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내가 그 특이한 수염을 잊을 것 같았나. 그동안 뭐하고 지냈지?”

 

클라우스는 찰리의 표정변화를 보지 못한 체 마구 지껄였다. 찰리는 겨우 숨을 뱉어냈다. 본래 클라우스의 말투는 심하게 점잔을 떨며 고상하게 말하는지라, 그런 방식의 화법에 알러지가 돋는 찰리는 가끔은 클라우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입을 맞추고는 했다. 하지만 반가운 듯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멍청하게 서있는 찰리에게 가볍게 포옹을 한 클라우스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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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지스터 au (스포일러 있음)





순식간이었다. 사람이 칼. 아니, 거대한 검에 찔리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것이다. 그는 죽었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범인들은 달아났다. 아마 범인들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찌르고 싶었던 모양이지. 이단 헌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죽을 땐 말이야. 아니, 우리들이 사람이던가? 전산으로 입력 된 사람인 척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사람이 죽을 때는. 시체가 남는다. 이 곳은 장례를 치룰 필요가 없었다. 실체가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는 죽었다. 불쌍한 벤자민 던. 이단 헌트를 찌르기 위한 검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죽음을 몰랐던 탓이겠지. 단순히 찾아오는 어둠이라거나, 침묵. 사라지는 것들 등등. 사람이 아니었기에 피가 튀기거나 창자가 튀어나오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예전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의 몸통에 꽂힌 검을 제외하면 그는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정신 차려요!

 

심지어 말도 멀쩡하게 하잖아. 사람 몸통만한 검이 빛을 내며 웅웅 거렸다. 유쾌한 목소리는 여전하다. 앞으로 할 일도, 앞일도 모르겠는데 어쩌지? 이단은 그제서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도 부작용 중 하나일까? 바이러스의 일종? 아니면 버그? 클라우드 뱅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벤지는 이단의 마음을 아는 듯 웃었다. 여기서 제일 태평한 사람을 꼽으라면 의심 할 여지도 없이 벤지일 것이다. 죽지만 않았다면.

 

일단 내 몸에서 내 몸 좀 꺼내줄래요?

 

이단은 벤지의 말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오늘의 불쾌한 경험 두 번째. 검이 바닥에 끌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거대한 모습과는 달리 가벼운 무게였다. 적당히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무게. 구점 육 킬로그램 정도 되는. 이단은 벤지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바닥에 죽어있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감상에 젖을 틈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걸 찾으러 온 것 같네요. 이단을 죽이기 위해 던졌던 검. 그리고 벤지를 찔렀던 검.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바이러스들을 보며 이단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과, 목소리를 얻은 검이라니.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이단은 바이러스에 감염 된 프로세스들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사실 가다듬었다는 표현은 잘못 된 표현이었다. 애초부터 가다듬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가다듬는 척을 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단은 그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뿐이고.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기?

 

벤지는 고개를 돌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로 옆에 이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이단 헌트가. 표정을 보니 후자는 절대 아니겠군.

 

복수?

, 그건 진짜 안 좋은데.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피자 가게는 정상 영업이라니!

 

코너에서 얼핏 보이는 가게는 아직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정상 영업합니다. 배달지와 메뉴를 고르세요. 먹음직스러운 피자를 눈앞에 두고 지나치는 사람은 없다. 특히 그 가게의 이름이 정 션 피자일 때는 더더욱. 아무리 복수극이라도, 이런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단은 망설임 없이 단말기 앞으로 다가갔다. 배달지는 집. 메뉴는.

 

여기 메뉴가 왜이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파인애플 피자가 유일한 것 같은데요.

 

역시, 무난하게 페퍼로니로배달 완료시까지 4:00. 이단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벤지의 투덜거림도 잠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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