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지이단 전력: 포옹


진정해요.

 

제 눈앞에 놓인 상황과 다르게도 벤지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 내장이 나오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복부는 깊이 패여 있었다. 이단은 숨을 헐떡였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벤지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쇼크로 인해 온 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벤지는 이단의 몸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단은 물 밖으로 튀어나온 금붕어마냥 뻐끔거렸다. 쇠를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신음소리가 방을 울렸다.

 

움직이면 더 아플 뿐이에요.

 

달래듯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벤지의 손에는 날카롭게 길이든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피가 묻어있었다. 누구의 피 인지 상관할 바가 못 되었다. 수고했어요. 이단, 이제 아이엠에프는 끝이에요. 그 사람이 이겼어요. 라고 눈물을 흘리며 이단을 안던 벤지의 피. 손에 들은 나이프로 자신을 찌를 것을 직감했지만 그의 포옹을 피하지 않은 이단의 피. 이름 모를 누군가의 피.

벤지,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웃었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표정은 미소였다. 벤지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손바닥으로 이단의 얼굴을 문질렀다. 냄새가 옮겨 붙었다.

 

이제 나는 어떡하죠?

 

벤지는 이단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물었다. 이단은 죽었다. 질문을 할 사람도, 대답을 할 사람도 사라졌다. 벤지는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이단 헌트를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당신은 죽을 운명이었어요. 아무도 그 사람을 이기지 못해요. 아이엠에프, 그리고 그 사람이 당신을 붙잡아 손톱을 뽑고, 눈알을 파내는 지독한 고문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내준 거예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 사람은 이기지 못해요. 듣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이었다. 대답이 필요 없는 변명이었다.

 

벤지. 항상 감정에 휘둘리지 마.

 

이단은 죽었다. 벤지는 이단의 어깨를 붙잡고 울었다. 죽은 시체의 피는 아직도 따뜻했다. 벤지는 이단의 품 안에서 안정을 느꼈다.

이단을 처음 안았을 때를 떠올렸다. 순수한 의도였다. 벤지는 복구가 불가능하다 여겼던 디스크를 훌륭히 복원했고, 너무 신난 나머지 마침 옆에 있던 이단의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그를 꽉 껴안았다. 이단은 일부러 벤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뒤늦게 누굴 안았는지 깨달은 벤지는 머쓱하게 포옹을 풀었고, 너무 신난 나머지 실례를 범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단을 두 번째로 안았을 때를 떠올렸다. 더 이상 실수라는 변명은 소용이 없었다. 조용한 펍에서 루터와 이단, 벤지가 같이 술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루터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벤지는 자신이 느끼는 괴로운 감정을 이단에게 털어놓았고, 이단이 놀라운 해결책을 자신에게 답하기를 바랐다. 이단은 술에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벤지를 안아주었다. 위로나, 해법 따위는 없었다. 탄탄한 가슴팍이 벤지의 머리통에 닿았고 몇 번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벤지는 좀 더 시간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터가 들어왔고, 이단은 멋쩍게 웃으며 술에 취한 것 같다고 사과했다. 잘 풀릴 거라고도 말했다. 어떠한 해답보다 벤지에게는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


이단을 세 번째로 안았을 때를 떠올렸다. 이단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단은 벤지를 안아주었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너는 좋은 동료야.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잠깐 지나가는 것일 거야. 감정에 휘둘리지 마. 이번에는 실수가 아니었다. 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하니까 속은 시원하네요. 이런 말 들었다고 다음 미션에서 날 빼는 건 아니겠죠? 농담을 했고, 웃었다. 끝이 없는 관계라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단은 새로운 동료와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벤지는 이단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단은 피하고 싶은 사람에게서 자신의 몸을 숨기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벤지에게 접근했다. 그는 벤지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를 이용해야할지 잘 알았다. 벤지는 아직도 이단을 사랑했다. 이단이 자신을 피하는 것을 알았지만 고칠 용기는 없었다. 그 사람은 벤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단을 지키라고 유혹했다. 자신과 아이엠에프에게서. 항상 이용만 당하고 족쇄에 묶여있는 이단을 풀어줄 사람은 벤지 그밖에 없다며 설득했다. 벤지는 아이엠에프의 중요 정보를 빼돌리고, 그 사람은 이단 헌트를 점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사람은 벤지를 더 세게 몰았다. 이단 헌트를 지켜. 그는 인간이야. 뼈가 뒤바뀌는 고통을 겪게 하고 싶어? 차라리 고통을 겪기 전에 죽이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야. 벤지는 이단이 자신을 안아주었던 그 때를 생각했다. 벤지는 그 사람이 주는 작은 권총과 나이프를 품속에 넣었다.

이단을 구할 차례였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자국으로 엉망인 얼굴을 보며, 벤지는 이단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온 몸이 딱딱하게 굳기 전에 그의 자세를 고쳐주었다. 문 너머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도 섞여 들렸다. 벤지의 차례였다.


맞아요. 난 또 감정에 휘둘리고 말았어요.


벤지는 이단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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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도 온라인으로 바뀌지 않는 표시에 잭은 암담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잭은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닫은 후 다시 한 번 문자를 보내보았다. ‘데이빗,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그리고 보내기 버튼. 오 분 정도 기다리다가, 다시. ‘혹시 내가 실수라도 한건가요? ;(’ 고민하다가 슬픈 표정까지 넣어서. 이제 진짜로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핸드폰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었다. 온라인 채팅 어플리케이션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건 꼴불견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 소용없는 혼잣말로 환기가 될 속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잭은 자신이 데이빗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데이빗은 말 그대로 흔해빠진 온라인 채팅 어플리케이션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잭이 데이빗이라고 부르는 이름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잭이 데이빗을 데이빗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아이디가 ‘david76’ 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빗이 실명이라면 아마 그 뒤의 숫자는 그가 태어난 년도겠지. ,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잭이 아는 데이빗은 즐겁고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조니 미첼과 모네의 진품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을 좋아하고, 스노우 보드를 즐겨 탄다고 했다. 데이빗을 알기에는 그것들이면 충분했다. 잭은 쉽게 그의 유려한 말솜씨에 빠져 들어갔고 그를 만나기를 원했다. 잭은 자신이 충분히 외로워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새로운 만남을 원했다.


머리를 감싸 쥐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어디 사냐고 물어볼 걸. 이와 비슷한 수많은 후회들이 잭을 잡고 흔들었다. 피하지 않고 흔들렸다. 차라리 실체가 있는 무언가가 정신이 없을 정도로 흔들어줬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그 뒤에 테이블을 뒤집어 흔들 만큼의 큰 진동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대도시와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운 광경에 잭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메시지에 적혀있던 주소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메시지에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잭이 사는 곳에서 새벽에 비행기를 탄다면 이른 오후에 도착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잭은 다시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막연히 생각했다. 생김새는 모르지만 그 외의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잭이 당도한 곳은 꽤 커다란 주택 앞이었다. 잭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문을 두드렸다. 안은 조용했다. 잭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세 번 정도 반복했을 때, 드디어 문이 열렸다. 잭의 눈앞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잭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의외의 인물께서 친히 주신 주먹이 날아왔다. 무방비 상태였던 잭은 그대로 얼굴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봐.”


온 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위험하게 풍기는 남자는 방금 잭을 때렸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꽤 친근한 말투로 잭을 불렀다. 당황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잭의 앞에 있는 남자는 데이빗이 아니었다.


데이빗?”


그는 잭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잭은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어보였다. 하지만 잭은 지푸라기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찌됐던 그는 데이빗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잭은 한순간의 분노로 일을 망칠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저기.”


젠장, 방금 목소리는 모자란 사람이 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스테이시.”


하지만 스테이시는 신경을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직도 현관에서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잭을 힐끗 본 스테이시는 그를 내버려두고 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초대받지 않은 곳에 온 기분이었다. 현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잭은 조심스럽게 그의 집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색하게 앉은 잭에게 스테이시는 맥주를 던졌다. 잭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작위적인 몸짓으로 테이블 위의 병따개를 집었다. 스테이시는 노골적으로 잭의 얼굴을 훑었다. 마치 심판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잭은 최대한 그의 시선을 모르는 척 하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스테이시. , . 그러니까, 말이죠.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너의 가슴 속 불꽃을 찾으러 온 거겠지.”

?”


입 안에 머금은 맥주를 바닥에 깔린 카펫에 흘릴 뻔 했다. 잭은 겨우 추스르고 스테이시를 쳐다보았다. 스테이시는 여전히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내가 널 초대했어. 그 것을 찾을 수 있도록.”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스테이시. 잭은 듣는 것을 관두었다. 잭은 이곳에 온 이유를 곧 잊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넓은 집에 스테이시 혼자 사는 것은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짐작이 맞았다.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려 잭은 맥주병에 고정했던 시선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스테이시와 비슷한 얼굴을 했지만 반쪽이 망가진 남자. 그는 잭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숨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다지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자동차 바퀴가 두 번은 밟고 지나간 것처럼 찌그러진 얼굴은 다시 스테이시에게 향했다.


?”


형제군. 잭은 속으로 생각했다.


데이빗. 이 쪽은 잭이야.”


처음 듣는 이름만 늘어간다. 아니, 데이빗

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국 카펫에 남은 맥주를 잔뜩 흘려버리고 말았다. 이번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데이빗이라구요?


? ?”


데이빗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빗?”


다시 한 번.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스테이시가 술병을 흔들며 대답했다.


내가 초대했어.”


초대라. 이 상황과 제일 안 어울리는 단어가 틀림이 없었다. 데이빗은 머리가 아파오는 모양인지 관자놀이를 몇 번 누르다가 잭을 불렀다. 데이빗은 비틀거리며 잭을 안내했다


기다란 복도 벽에 조니 미첼과 모네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잭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아주 좋은 취향이에요.”

.”

이렇게 직접 보니까 더. 당신도 마찬가지...”

관둬요.”


데이빗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 잭을 쳐다보았다. 끔찍한 침묵이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끔찍하지 않았다. 그래서 잭은 데이빗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르지만. 놀랍지는 않아요.”

놀랍지 않다니. 그거야말로 아주 놀라운 이야기네요.”

놀란게 딱 하나 있다면. 생각보다 키가 좀 작은 걸요? 운동을 즐긴다고 해서 저는 덩치 큰 사람이 나올까 겁을 먹었었는데, 다행이네요. , 기분 나쁘다면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능청스럽게 조잘조잘 말하는 잭의 모습에 데이빗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 과거죠. 얼굴이 이렇게 망가지기 전에 이야기에요. 미안해요. 당신을 속였어요.”

전 속은 적 없어요.”

그만 위로해줘도 돼요. 마찬가지에요. 익명 뒤에 이런 얼굴이 숨어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데이빗.”

아무튼, 스테이시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당신이 이렇게 찾아올줄 몰랐어요. 방에 들어가서 술 좀 더 마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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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지는 항상 모든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미션 또는 연애. 아니면 둘 다. 하이스쿨 시절 벤지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미식축구부원과 사귈 때도 벤지는 그에게 이끌려가는 쪽이었다. 주말에 영화관 갈까? 좋아. 에일리언 어때? 벤지는 외계인이라면 끔찍이 진저리를 쳤지만. 그래, 네가 좋다면 그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지. 며칠 뒤 헤어졌다. 공터를 휘어잡는 쿼터백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로맨티스트였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었다.


나이를 먹고. 아이엠에프에 취직을 하고. 벤지는 여전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즐기며 최대한 게으름을 즐기고 있었다. 데스크에 앉아 현장요원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퇴근한 뒤에는 쇼파에 누워 감자 칩을 씹으며 하루를 보내는 식이었다. 무언가를 책임져야한다는 것은 벤지에게 있어서 아주 큰 부담이었고 피할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벤지는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겠지만, 젊은 현장요원인 이단 헌트를 보기 전까지는. 벤지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었다. 이단에게 첫 눈에 반한 이후로 만족이라는 단어는 과거가 된 것이다.


줄리아와 결혼 한 이단을 행복하게 해주자 싶었고, 이단이 줄리아와 이혼을 한 이후에는 자신이 이단과 행복을 만들어가 보자고 결심했다.

어설프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이단은 벤지에게 웃어주었다.

 

이게 시작이라면 아주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힘든 일은 관계를 더 굳건하게 만들어주었다. 위험한 미션에서 벤지는 이단을 여러 번 구해주었고 그것은 이단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이단을 벤지는 끌어안았다. 정말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미션에서 이단이 살아 돌아왔을 때. 벤지는 참지 못하고 이단에게 키스했다. 이단도 벤지에게 키스했다. 시간이 멈추는 걸 느꼈다. 잔뜩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자신보다 더 운이 좋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살자.”

 

그답게 투박한 고백이었다. 세상에. 벤지는 단어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눈을 멍청하게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이런 기분을 전에 느껴본 적이 있었다. 두바이 빌딩에서 모로에게 제압당할 때, 벤지는 모로의 강한 발차기에 머리를 얻어맞고 바닥으로 쓰러졌었다


그래. 그 기분이다. 이제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었다.


싱글 킹 사이즈의 좁은 침대는 건장한 성인 남자 두 명이 눕기에 좁았다. 별다른 무늬가 새겨지지 않은 이불을 턱 끝까지 덮고 옆에 누워있는 이단의 향을 맡았다. 이단의 바디 샴푸 향은 코코넛 향이었다. 벤지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단은 피곤했던 모양인지 몇 번 눈을 뜨려는 시도를 하다 바로 잠들었다. 이단의 속눈썹 하나하나를 세어볼 것처럼 얼굴을 보던 벤지는 눈을 감았다.

 

이단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동그란 뒤통수를 한참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이렇게 평화롭다니. 벤지는 부운 눈을 몇 번 비비다가 이단의 어깨에 턱을 걸쳐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뭐해요? 묻지 않았지만 이단은 벤지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았다.

 

무난한 디자인이 좋겠지?”

 

모니터 안에는 킹사이즈 침대 카탈로그가 나열되어 있었다. 결국 벤지는 참지못하고 이단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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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AU (벤지이단 전력)


도둑질로 하루를 버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닭을 잡아먹거나 닭이 없다면 시궁쥐 따위의 것들의 털을 뽑고 잘 손질해 식탁 위에 올리고는 했다. 여우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다. 특히 도시에 사는 여우일수록 더더욱! 벤지는 이단이 한 무더기 가져온 사과를 흐르는 물에 씻으며 생각했다. 며칠 째 사과만 먹고 있잖아. 이단이 도둑질로 생활을 연명하지 않겠다고 선언 한 이후로. 이렇게 살다가 굶어 죽는 것은 아닐까? 요즘 이단의 피부도 퍼석퍼석하고 기운도 없이 다니는 것이 벤지로서는 아주 안타까운 일이 아닐 리가 없었다.

그랬다. 벤지는 고기가 먹고 싶었다.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당장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의 비곗덩어리가 먹고 싶었다. 교양이 있는 현대 여우는 불을 이용하여 고기를 익혀 먹고는 했지만 몇 주, 몇 달 동안 육식이라고는 구경도 못 한 여우는 그런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주둥이로 크게 사과를 베어 물었다. 정확히 반이 갈린 사과 속에 딱딱한 씨앗이 보였다. 씨앗을 빼서 멀리 던져버렸다. 비실비실 날아가는 씨앗 뒤로 농장이 보였다. 양계장, 사과주 농장, 칠면조 농장. 벤지는 응큼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농장 한 번, 사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이단의 얼굴을 떠올리고, 결심했다. 응큼하게 지었던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단을 속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네 발을 사용해 재빠르게 집으로 달려갔다.

미스터 헌리가 일거리를 준댔어요.”

그래?”

두더지의 시력과 집 안 환경의 관련성에 대한 칼럼인데, 돈도 바로 준대요.”

잘 생각했어.”

이단은 신문을 읽던 것을 접어 식탁 위에 내려놓고 벤지를 쳐다보았다.

좀 어때요?”

불경기라 그런지 일자리가 없더라. 다른 일을 알아봐야할 것 같아.”

예를 들어?”

눈치를 보았다. 괜히 온 몸의 털을 박박 긁으며 이단의 대답을 요구했다.

도둑질은 아니야.”

그럼 그렇지.

 

 

밤이다. 벤지는 눈과 주둥이 세 쪽에 구멍이 뚫린 복면을 뒤집어쓰고 조심스럽게 집을 나섰다. 어깨에는 푸대자루를 메고 발 윗꿈치로만 살살 걸으며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단은 자는 듯싶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농장과 거리는 멀지 않았다. 후다닥 달려가 철조망을 넘고, 경비견을 피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백 덤블링을 하고. 어찌저찌 들어왔다. 꽥꽥꽥. 닭이 떠드는 소리가 경쾌하다.

 

 

돈 받았어?”

책이 불티나게 팔린대요.”

어제까지만 해도 텅텅 비어있던 저장소가 잘 손질된 닭들로 넘쳐났다. 잠이 덜 깬 표정이던 이단은 저장소를 한 번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먹음직스러운 닭고기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미스터 헌리 덕이죠.”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으며 능청맞게 대답했다.

 

 

벤지의 어깨 위로 사과주가 가득 담긴 푸대자루가 무겁게 흔들렸다.

 

이단이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벤지 던. 한 동안 먹을 식량도 비축해 놓았고, 이단을 더 이상 속이기도 싫었다. 다시 한 번 주둥이와 눈구멍이 세 개 뚫린 복면을 뒤집어썼다. 네 발로 재빠르게 뛰어 칠면조 농장으로 들어갔다. 경비견도 없었고, 보초병도 없었다. 조용하게 움직였다. 개구멍 사이로 잔뜩 몸을 낮춰 들어갔다.

이 여우 녀석, 드디어 잡았구나.”

물론 칠면조가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벤지는 알 수 있었다. 함정이구나. 들켰구나! 칠면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엽총을 든 괴팍하게 생긴 노인네 세 명이 벤지를 둘러쌌다. 벤지는 뒷걸음질을 치며 자신이 들어온 개구멍을 보았지만 세 명의 노인 중 한 명이 그 구멍을 막아섰다.

올 겨울은 이 녀석의 털로 목도리를 만들어 버틸 수 있겠군.”

살아있는 상태에서 털을 벗겨야해.”

고통스럽게 털을 벗기자. 고통 속에서 털을 벗기면 더 윤기가 날거야.”

가장 괴팍하게 생긴 노인네가 벤지의 앞으로 다가왔다. 벤지는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다. 막다른 골목. 죽음. 이단이 생각났다. 후회해봤자 늦었다. 벤지는 눈물을 흘렸다. 노인네들이 여우가 겁에 질린 모습이 역겹다며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꼬리를 잡혔다. 버둥거렸지만 팔뚝에 작은 상처만 나게 할 뿐 그다지 효과적인 반항은 아니었다. 노인네들은 철장에 벤지를 가두었다. 벤지의 머리속에 여우 목도리가 된 꼬리, 박제가 된 머리, 닭처럼 털이 빠진 처참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단. 도둑질은 더 이상 안 된다며 우리의 힘으로 돈을 벌어보자던 이단.

노인네들은 축배를 들자며 장소를 빠져나갔다. 벤지는 앞발로 땅바닥을 쾅쾅 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이단이 보고 싶었다. 코를 팽팽 풀며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끝까지 도둑질을 끊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다.

벤지.”

이단이 보고 싶어 목소리까지 들린다. 벤지는 눈물로 흐려진 눈을 비비며 이단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단?”

진짜 이단이었다. 이단은 앞발로 팔짱을 낀 체 벤지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빠져 나가자.”

이러다가 이단도 잡히고 말아요. 안 돼요. 혼자라도 얼른 빠져나가요.”

바닥을 봐.”

바닥이요?”

바닥을 보았다. 평범한 흙바닥이었다.

그래. 바닥.”

꽁꽁 막혀 있는 걸요.”

벤지. 아무리 현대- 여우라고 해도, 자신의 본능을 잊어버릴 필요는 없어.”

이단은 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고, 드디어 깨달았다. 땅을 파서 탈출하면 되는구나. 벤지를 괴롭히던 여우 꼬리 목도리와 박제가 된 머리 그리고 털가죽이 벗겨져 알몸이 된 자신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실망했어.”

이런 말을 들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았을 거야. 벤지는 눈 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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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상자는 벤지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충분하고 심지어 흘러 넘쳤다. 벤지는 혹시나 상자 안에 들은 것이 포장지만 그럴듯한 폭탄이라든가 총이라든가. 그 무엇도 아니라면 설마, 진짜 포장지에 적혀있는 그대로의 것? 진짜? 한참동안 상자 겉을 살핀 벤지는 궁금함을 내리 누르는 데 온 힘을 더했다.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물건의 주인은 뻔했다. 이단 헌트. 벤지는 이단이 올 때까지 얌전히 바닥이나 쇼파에 누워 물건 개봉의 순간만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 덕에 몸을 퍼득이며 일어났을 때, 이단은 벤지의 바로 옆에서 잔뜩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왔어요? 이단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는 척 하다가 대답했다. 한 시간 전에. 많이 기다렸어? 벤지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이단은 잔뜩 젖은 수건으로 덜 젖은 머리를 몇 번 더 털었다. 바닥에 미처 닦지 못해 떨어진 물방울들을 대충 손으로 훔쳐 닦았다. 그리고 다시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 맞다. 벤지의 혼이 빠진 소리에 이단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거 말인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이 덜 깬 탓이었다. 이단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저녁 먹었냐구? 아니요. 첫 번째 답은 틀렸다. 벤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일 보기로 한 영화? , 영화관 앞에 멕시코 음식점이 새로 생겼어요. 내일 같이 가요. 근데,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에요. 두 번째 답도 틀렸지만 전혀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벤지는 거의 머리를 쥐어뜯듯이 하고 있었고 이단은 머리 대신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있는 보, ……. 상자요! 웬 거예요? 손가락이 딱 하고 마주치는 소리와 함께 답이 나왔다. 그거? 보드게임인데. 그럴줄알았, ? 이단은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일어난 김에 벤지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상자도 챙겼다. 총이라도 들었을까봐? 이단은 벤지의 머릿속에서 사는 것이 분명했다. 벤지는 정곡을 찔린 것이 부끄러워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폭탄두요. 민망할 정도로 크게 웃어버린 이단은 달아오른 벤지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괜히 헛기침을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친척이 딸을 낳아서 선물로 샀는데, 게임을 즐기기에는 너무 어린……. 벤지는 그만 말을 끊고 말았다. 친척? 친척이요?? 자신의 생각에 빠져든 이단은 벤지의 얼빠진 표정을 보지 못했다. 자세히 따지자면 어머니 쪽이지. 벤지는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단의 가족이요? 이단은 뒤늦게 벤지의 물음에 담긴 경악을 알아챘다. 벤지, 난 외계인이 아니야. 헌트라는 성도 물려받은 거고. 이단은 주절주절 말하는 벤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 안에 들어오는 얼굴은 달아오른 것보다 더 뜨거웠다. 뺨이 눌린 탓에 발음이 잔뜩 뭉개졌다. 외계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물론 알죠.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건 다르다구요. 뭐가 다른데? 이단은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이단 헌트였을 것 같아서요. 이단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뻔한 생각이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벤지. 벤지는 자신의 뺨에 올라와있는 이단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익숙해진다구? 이번에는 이단이 물을 차레였다. 잡은 양 손을 몇 번 주무르다가 대답했다. 당신도 사람이잖아요.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가끔은 취미로 게임도 즐기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요. 그걸 자꾸 잊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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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거대한 털뭉치를 보았을 때, 찰리에게 떠오른 감정은 충격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까웠다. ? 그 덫은 타깃을 위한 것이었지, 늑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 놓은 인간을 위한 교묘한 덫에 짐승 따위가 걸려드니 찰리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찰리는 천천히 늑대를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위험한지 판단하기 위하여. 늑대는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르렁 거리는 가래 낀 소리는 덤이었다. 눈 한 쪽은 일자로 그어진 흉터와 함께 감겨 있었고, 코는 건조하게 일어난 것이 건강이 좋아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다. 찰리는 기다란 총으로 늑대의 배를 콕콕 쑤셔대며 건드렸다.


살아있나?”


혼잣말이었다.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찰리는 총을 거둬들었다. 총알을 낭비 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덫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고, 비쌌다. 찰리에게 이런 것은 매우 중요했다. 비싼 것 그리고 싼 것. 찰리는 죽어가는 늑대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좋은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 덩치에 저 정도로 윤기 나는 털가죽이면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무두질은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그만한 값은 톡톡히 해주었다. 말만 잘 하면 덫 두세 개는 더 놓을 정도의 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찰리는 조심스럽게 늑대의 앞으로 다가갔다.


찰리가 다가가자 늑대의 주둥이가 위로 들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였다. 위협적인 소리에 찰리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뒷꿈치에 밟히는 미끄러운 눈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씨팔. 상스러운 목소리로 욕을 했다. 늑대는 끊임없이 목을 울렸다. 찰리는 계속해서 욕을 뱉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늑대의 목숨은 찰리의 한 손에 들려있었다. 늑대는 찰리에게서 도망가려 몸을 일으키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새까만 털 곳곳에 새하얀 눈이 묻었다.


자세히 보니, 한 쪽 다리가 성하지 못하다. 찰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병신한테 농락당한 꼴이군. 바지에 묻은 축축한 눈덩어리를 거칠게 털었다. 늑대의 숨은 더 가빠졌다. 찰리는 다시 총을 들었다. 깔끔한 뒤처리, 깔끔한 죽음. 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죽음의 냄새를 맡았나봐?”


찰리는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늑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프지 않게 해줄게. 그 편이 좀 더 값을 더 받겠지.”


장전했다. 가늠쇠 한 가운데에 늑대의 머리통이 오게 두고,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찰리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총을 살폈다. 총알이 없었다. , 젠장. 바보 같은 실수를 했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지 주머니와 재킷을 살펴보았지만 여분은 없었다. 괜히 신경질을 부린다고 시체에 총알을 여러 발 더 쏜 탓일 것이다. 찰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덫은 산 속 깊은 곳에 있었고, 쫓던 타깃은 이미 멀리 도망갔을 테고, 덫은 소용없게 되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다 죽어가는 거대한 늑대 한 마리. 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 여기 가만히 있을 거지?”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어디 갈 곳도 없으니까.”


혼잣말이었다

늑대는 대답 같은 것을 하지 못하니까. 찰리는 발목까지 쌓인 눈을 푹푹 밟았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찰리는 당황했다. 확실히 당황했다. 늑대는 사라졌다. 대신 덫에는 인간이 걸려있었다. 뒤질 때가 됐나. 헛것이 보이네. 두꺼운 장갑을 벗어 눈까지 비비며 자신의 눈앞에 쓰러져있는 덫에 걸린 벌거벗은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피부는 힘이 잘못 닿는다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찰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며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 정신 좀 차려봐.”


손가락으로 뺨을 쿡쿡 찔렀다. 찰리는 그제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눈 한 쪽은 일자로 그어진 흉터와 함께 감겨 있었고 야윈 광대뼈와 살갗이 일어났지만 꽤 다부진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찰리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뭉툭하게 잘린 손목.


, 말도 안 되는데. ...”


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에게 들은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가죽을 벗겨 파는 것보다 이런 것에 취향이 있는 사람에게 팔아 넘기는게 더 돈이 되겠다.


외투를 벗어 그의 몸에 덮었다. 죽은 시체는 반값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데려가야 했다. 덫에 걸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패인 발목을 급히 수습했다. 엉성한 손놀림으로 건드리니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겨우 붙잡아 떼어 냈다. 그는 정신이 들었는지 흐릿한 눈으로 찰리를 올려다보았다.


수인이라고 미리 말하지 그랬어.”


그는 입을 열기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찰리는 낄낄 웃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럼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집이라고 하기는 그런 은신처였다. 몸을 눕힐만한 장소가 있었고, 음식을 해먹는 장소는 먼지가 두껍게 쌓인지 오래였다. 찰리는 등 뒤에 업은 남자를 두툼하게 깔린 이불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놓았고, 덕분에 그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차. 뒤늦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름이 뭐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어설픈 영어에 찰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

편한대로 부르게. 클라우스 아니면 슈타우펜.”

슈펜이 좋겠어. 꽤 친해보이잖아?”


슈타우펜은 입을 다물었다.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은 찰리의 취향이 아니었다. 찰리는 다소 성급해 보이는 몸짓으로 방 안을 빙빙 돌며 슈타우펜에게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대부분의 질문은 무시당하거나, 단답으로 끝났다.


왜 그곳에 있었지?”


쉽게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막상 슈타우펜이 입을 다물고 있는 꼴을 보니 찰리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특히 밤새 눈보라를 온 몸으로 맞고 있던 사람이라면 더욱

말하기 싫으면 천천히 말해도 돼.” 

덧붙였다.

상처가 회복되면 당장 떠나겠네.”

떠나겠다고?”


어색하게 웃었다. 세워놓은 계획이 백지로 돌아갈 판이었다. 찰리는 슈타우펜에게 옷가지를 건네며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 늑대인줄 알고 그랬던 건 미안해. 난 또, 수인. 아니, 사람인줄 몰랐지 뭐야.”

익숙하니까 괜찮다네.”

그으래.”


찾아온 적막. 옷가지와 마른 몸이 부딪혀 버석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 삼 자의 입장에서 보건데, 찰리는 정말이지 어색했다. 찰리는 삐그덕대는 자신의 몸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분간은 마음 편히 있으라구.”


당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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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예상답안은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마스크 쓸 수 있는 거예요?”


벤지는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환호성을 질렀고, 이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니, 마스크는 쓸 수 없어. 벤지는 서글픈 눈으로 이단을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똑같았지만.

이번 미션은 아주 간단했다. 라스베가스 중심부에 있는 휘황찬란한 럭키 38 카지노의 보스를 대면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아주 작은 생체 도청기를 삽입하는 것. 여기서 드는 의문은 단 한가지다. 주로 이단 헌트나 브랜트의 백업을 맡는 벤지가 왜 선두에 나서는 것이지? 이에 대한 해답도 미션만큼이나 간단했다. 이단은 럭키 38 카지노에서 이미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사였고, 흔해빠진 마스크는 그들의 보안 시스템으로 들키는 가장 첫 번째 방어막이었다. 금속이나 플라스틱 따위로 만들어진 총보다 먼저. 브랜트는 헌리의 일을 돕느라 얼굴을 비추지 못한 지 몇 주 째였고, 덕분에 그 일은 자연스럽게 벤지에게 넘어갔다.


다시 상황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드디어 마스크 쓸 수 있는 거예요?”


이단은 곤란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마스크는 쓸 수 없지만, 대신 재밌는 건 할 수 있지.”


둘 사이의 중간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라온 것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포커 카드였다. 벤지는 이단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 들어 위 아래로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이단은 얼굴에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무슨 트릭이 숨겨져 있는 카드에요?”

트릭?”

무조건 이기게 만드는 카드라던가. 아니면 모서리에 독이 묻어서... 이건 좀 심했죠?”

영화 같고 멋있네, 벤지. 안타깝게도 어제 저녁에 월 마트에서 사온 평범한 카드야. 같이 장 봤는데 기억 안 나?”

이제 기억나요.”


벤지의 손에 들려있던 카드는 다시 이단의 손으로 옮겨갔다. 이단은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가볍게 섞이는 카드는 이단의 손에 밀착된 것 마냥 손쉽게 합쳐졌다. 벤지는 집중해서 그 행동을 관찰했다. 마디가 굵고 이곳저곳에 칼로 베인 흉터나 화상 따위가 가득이었다. 더해서 굳은살까지 박혀있는 손은 카드와 어울리지 않았다. 몇몇 개의 상처는 출처를 알 수 있었고, 대부분의 상처는 벤지가 이단을 알기도 전에 그가 얻은 상처였다.


벤지?”


벤지의 표정이 약간 변화한 것을 알고는 이단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벤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집중해야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은 다 섞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신과 벤지의 앞에 카드 두 장을 나누어주었다. “기본적인 룰은 알지?”


당연하죠.”


벤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게임은 진행됐다.


목표는 단 한가지야. 너는 게임에서 무조건 이겨야해.”

가능해요?”

당연하지.”

어떻게?”


이단은 잘생긴 얼굴로 벤지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지었다. 벤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동안 바빴던 탓에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다. 벤지는 마음 같아서 미션이고 뭐고 다 때려치운 후에 이단과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지만, 그럴만한 배짱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룰은 단 두 가지야. 커다란 행운과.”


이단은 테이블 가운데에 놓아져 있는 카드 세 장을 한꺼번에 펼쳤다. 하트 A, K 그리고 Q. 이단은 자신의 손에 들린 카드 두 장을 벤지의 눈앞에 놓았다. 테이블 앞에 놓인 것은 하트 J10. 로얄 플러시. 벤지는 놀란 눈으로 이단과 카드를 번갈아 보았다.


장난하는 거죠?”


이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작은 손기술.”


이단은 어디서 뺀 것인지도 모를 스페이드 A와 하트 7을 벤지에게 건넸다.


상대방을 잘 보고 있어야지.”

걸리면 어쩌려구요?”

걸리면? 그러면 걸리지 말아야지.”

, 아주 간단한 방법이네요. 이거 실패할 것 같아요. 분명 걸려서 카지노 밑에 있는 비밀스러운 감옥에 갇혀서 여생을 보내고 말 걸요. 아니면 죽던가.

꽤 간단한 게임이야. 그 곳의 보스는 이 게임을 가장 좋아하거든. 너가 연속으로 풀하우스를 터트리면 바로 널 부를 거고, 너는 준비 된 작은 기계로 보스에게 칩을 삽입하면 돼. 모기한테 물린 것 같을걸.”

이단 헌트라면 가능하지만, 벤지 던은 불가능해요. 손기술은 연습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단처럼 타고난 도박사는 아닌 걸요. 운도 없구요.”

운이 없다고?”


벤지의 태도는 꽤 단호했다.


저번에 루터랑 술내기로 인디언 포커를 했는데 제 카드가 어떻게 나왔는줄 알아요? 카드에 5보다 큰 숫자가 안 보이더라구요.”

내가 이 손장난을 누구한테 배운지 알아?”

설마. 오, 설마. 아니죠?”

루터야.”

, 젠장. 내 돈.”

루터의 손장난을 모른 게 패배의 한 수였지.”


끝이 아니었다. 벤지는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이 겪은 나쁜 일들을 회상하기 위해 노력했다.


, 그저께 걷다가 껌도 밟았는데.”

벤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죄 없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손은 자신감이 없어보였다. 덮어져있는 카드를 펼쳐보았다. 스페이드 A, 하트 3 그리고 하트5. 벤지는 손에서 카드를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봐요. 아무 것도 아니네요.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신이 없어요.”

넌 충분히 잘 해낼수 있어.”

벤지는 이단이 아니라 벤지라구요. 벤지 던.”

네가 왜 운이 안 좋다고 생각해?”


이단은 정말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벤지를 바라보는 것이 벤지의 속마음조차 읽을 것 같았다. 벤지는 이단의 눈을 같이 쳐다보다가, 꼬리를 내리고 테이블에 놓여있는 카드더미 위에 안착했다.


네 앞에 있는 사람을 봐. 그리고 그게 누군가 생각해봐.”

이단 헌트.”

정말 네가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드디어 벤지는 이단의 뜻을 알아 챌 수 있었다. IMF의 전설적인 요원, 잘생긴 미소와 굵은 눈썹이 눈에 띄는 요원. 벤지 던이 현재 사귀고 있는, 10년간의 짝사랑 끝에 벤지 던의 애인이 된 이단 헌트. 그의 의도를 알자마자 벤지는 얼굴 위로 올라오는 열기를 감출 수 없었다. 적어도 벤지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문제였다.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네 이야기니까 나오는 거지.”

하지만...”

다 같은 규칙으로 싸우는 거야. 너나, 나나.”


벤지는 다시 카드를 집어 들고 이단이 했던 것처럼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어설픈 손놀림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이단은 벤지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카드 두 장을 빼고, 세 장을 펼친다.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은 벤지를 상상했다. 잘 다듬은 수염과, 상황을 지켜볼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검정색 뿔테 안경. 여유로운 표정이나 걸음걸이까지. 이단의 머리 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작은 미션 하나를 줄게.”


벤지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벤지는 행동을 멈추고 이단을 쳐다보았다.


이 미션에서 성공해. 그리고 나를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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