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제문 가장자리에 달린 종이 딸랑이며 내는 소리에 브라이언은 닦던 잔을 내려놓고 그 익숙한 걸음걸이를 반겼다.

 

왔어요?”

 

브라이언은 몸을 돌려 맥주병으로 가득 찬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차가운 한기가 몸을 한 번에 훑고 지나간다. 숀이 즐겨 마시는 병맥주를 꺼내 바에 얹어 놓았다. 브라이언은 바에 팔을 가볍게 걸치고 숀의 얼굴을 가까이 바라보았다. 희멀건 하게 뜬 눈은 초점이 없었고, 다크서클은 광대 위까지 내려 왔으며 얼마나 피곤했던 모양인지 입술은 허옇게 각질이 다 일어난 상태였다. 브라이언은 그런 숀의 꼴을 보고 두통이 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 무슨 일 있었어요?”

 

숀은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따지지 않은 병맥주를 마시려고 입을 대었다가, 뒤늦게 뚜껑이 따있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오프너를 찾았다. 보다못한 브라이언은 숀의 손에 쥔 병을 뺏어 뚜껑을 따 숀의 눈앞에 놓아주었다. 확실히, 숀은 제 정신이 아닌듯 싶었다.

 

술 마시고 온 거예요?”

 

이번에는 브라이언의 질문이 제대로 귀에 들어온 모양인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숀은 단번에 맥주를 반 쯤 들이마시고 다시 멍청하게 눈만 껌뻑였다. 브라이언은 불만스럽게 팔짱을 꼈다.

 

이봐요.”

?”

무슨 일 있었냐구요.”

아무 일 없었어요.”

 

빈 병을 확인 한 브라이언은 다시 병맥주 하나를 꺼내 숀 앞에 놓아주었다. 뚜껑을 따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숀은 고마워요. 라고 중얼거리고 다시 목을 축였다. 브라이언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고, 인내심 있게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맥주를 세 병 비웠을 때 쯤, 숀은 한숨을 푹푹 쉬며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 일 없는 게 문제예요.”

무슨 뜻이에요?”

 

다른 손님에게 나갈 토닉에 들어갈 오이를 썰고 있던 브라이언은, 숀이 꺼낸 이해 할 수 없는 말에 화들짝 놀라 손을 벨 뻔 했다.

 

아무 일이 없어요.”

 

브라이언은 저민 오이를 잔 안에 말아 넣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평소 숀은 남들에게 쉽게 잘 휘둘리는 성격이라, 잔뜩 우울한 얼굴로 들어와 술만 먹고 주저리주저리 말만 뱉는 이러한 상황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럴 때면 항상 오늘은 이러한 일이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요. 슬퍼요. 우울해요. 브라이언이 타 주는 칵테일이나, 싸구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하소연을 하는 게 숀의 일과 비스무리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아무 일 없었다며 우울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 왜 그럴까...”

 

브라이언은 드라이 진을 오이가 들은 잔에 따라 넣으며 숀의 상황을 천천히 되짚었다.

 

일이 너무 지겨워요?”

 

숀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홈런이구나. 아마 브라이언은 '숀 심리생태 전문가 코스'가 있다면 제일 첫 번째로 자격증을 땄을 것이다. 완성 된 진토닉을 가지러 온 주정뱅이에게 대충 눈인사를 한 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숀을 보았다.

 

바로 그게 권태라는 거죠. 이해해요.”

아무 일도 없고, 항상 똑같거든요. 아침마다 들리는 편의점, 출근해봤자 매일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일 끝나고 오는 윈체스터까지 지겨울 정도예요.”

 

, 아니. 물론 윈체스터에서 브라이언이 주는 술을 마시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아니 좋아요. 진짜. 숀은 그 정신에도 지겹다고 단언 한 것은 실수했나 싶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 이후로 숀은 말문이 트인 모양인지 뱉은 한숨과 함께 브라이언에게 넋두리를 털어놓았다.

 

내 인생에서 바뀌는 건 매일같이 들어오는 신형 전자제품밖에 없을 거예요.”

 


브라이언은 출근하는 숀에게 흰 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사직서요.”

윈체스터 그만 두게요? 근데 그걸 왜 저한테 줘요?”

내 사직서는 여기 있고.”

 

브라이언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지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숀은 브라이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과, 그의 여느 때와 같이 잘생긴 얼굴을 번갈아 세 번 정도 보았고, 브라이언은 그런 숀의 반응을 즐겼다.

 

이건 당신 거.”

잠깐, 나 지금 이야기의 흐름을 못 따라가고 있는데.”

나랑 같이 떠나요.”

어딜요?”

, 여기만 아니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권태로움에 바닥 긁는 숀이랑 브라이언이랑 열대 섬으로 이민 가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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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한 구석에서 고개를 꾸벅꾸벅 떨어트리며 졸고 있는 고양이를 언제 처음 봤냐고 물어본다면, 이단은 한참동안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 할 것이다. ‘원래부터 있었어.’ 어불성설한 말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또 옳은 말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단은 자신이 IMF에 갓 입사했을 때 모습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었다고 자주 묘사했었고, 그 고양이는 이단의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때. 그가 처음으로 집에 짐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테라스 밖으로 삐죽이 나온 작은 공간에서 제 몸을 눕히고 볕을 쬐고 있었다.

 

오전에는 먹이라도 찾아 돌아다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양이는 꼭 해가 제 모습을 탐스럽게 비추는 오후 두 시쯤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며 어슬렁어슬렁 골목을 돌아다녔다. 직업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이단은 아주 가끔마다 그 고양이와 마주쳤지만, 이단은 안타깝게도 동물 애호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단과 고양이는 같은 골목에 몸을 눕히고 사는 같은 주민임은 틀림없었지만 서로 친한 척은커녕 인사도 하지 않는 그런 무미건조한 사이였다.

 

이단이 그 고양이에게 관심을 준 것은 정말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아직도 생생했다. 동료들이 모두 죽어나갔다.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고, 그 충격은 크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글리츤, 클레어... 동료들의 이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단은 그 날 차에 치인 고양이와 마주쳤다. 이단은 자신의 몸에 딱 달라붙은 물에 홀딱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데면데면한 친구였던 고양이를 들여다보았다. 숨만 꼴깍이며 넘어갈 듯이 쉬고 있는 고양이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체다와 비슷한 탐스런 노란 빛깔 털에는 사고를 당한 시간이 꽤 오래 전 이었는지 딱딱하게 굳은 진한 갈색 피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가슴께에 핏방울이 동그랗게 번졌다. 고양이는 반항 할 힘도 없는지 주둥이만 뻐끔이다가 곧 눈을 감았다.



그 뒤로 여러 사건이 있었다. 고양이는 천성이 도둑고양이인 모양이었는지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며 며칠 이단의 집에서 지내다 훌쩍 떠났고, 이단은 그 뒤로 벌어진 수많은 일 따위에 휘말려 고양이를 떠올릴 세도 없었다.

 


고양이를 다시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이단은 식사로 자주 때울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을 사들고 가는 길이었고, 한 길로 이어진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 곳에서, 오랜 친구였던 고양이를 만났다. 그동안 아주 잘 먹기라도 한 것인지 저번에 본 것보다 몸집이 두 배는 불어있었다. 친하지도 않았지만, 그간 못 본 것이 뭐라고. 이단은 오랜만에 본 얼굴에 반가움을 느꼈다.

 

고양아.”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한 손에 쥔 채 무릎을 굽혀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는 망설이기라도 하듯 제 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이단의 옆으로 와 내민 손에 살짝 몸을 비벼 댔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생각 외로 좋아 이단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대도 하지 않고 건진 수확이라 느끼는 바는 더 컸다.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나랑 같이 갈래?”

 

물론 고양이가 대답을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단을 따라 갔고, 그 이후로 이단과 고양이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어.”

 

고양이는 말이 많았다. 운동하는 이단의 모습을 바라보며 야옹. 우걱우걱 피자를 씹어 먹는 이단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야옹. 샤워를 하고 허리에 가운을 걸친 모습을 보고는 뒤 돌아 꼬리를 붕붕 바닥에 쳐대며 야옹. 하지만 이단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미소를 머금고 한 저 말에는 고집스레 주둥이를 꾹 다물 뿐이었다.

 

결혼은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 결혼을 한다면. 그녀와 하지 않을까?”

 

이단은 고양이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과연 내가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해질 수 있을까?”

 

고양이는 자신을 매만지던 손가락을 아프게 깨물고 웅크려 있던 몸을 활짝 펴 이단의 손이 닿지 않는 창문 위로 뛰어 올랐다. 꽤 세게 물었던 탓인지 엄지손가락에 작은 송곳니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 고양이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단은 턱을 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며칠 뒤, 고양이는 다시 집을 나갔다. 이단은 가끔 그 고양이가 생각났지만 그의 천성을 생각하며. 보고 싶다는 마음을 겨우 눌러 내렸다. 그리고 이단은 그 것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벤자민 던 입니다!”

 

반가워요. 이단. 그동안 정말로 뵙고 싶었어요! 아주 오래 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반갑게 얼굴을 들이미는 신입 요원 덕에 이단은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이단은 재빨리 평정심을 유지하고, 입꼬리를 시원스레 올려 기대에 찬 눈으로 반짝이는 벤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

벤지요.”

벤지. IMF에 온 것을 환영해요.”

 

벤지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단과 맞잡은 손을 위 아래로 붕붕 흔들어댔다. 벤지는 그밖에도 IMF에 들어오고 싶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앞으로의 미션이 아주 기대된다는 등. 조잘조잘 열심히 떠들어댔다. 오랜만에 새로운 활기 넘치는 얼굴을 본 이단은 그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실제로 작은 동물이 말하듯이 끊임없이 떠드는 벤지의 얼굴을 보니, 예전에 살았던 작은 고양이가 떠오른 탓도 없지 않아 있었다.

 

, 미안해요.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죠?”

 

이단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그냥 반가워서 그랬어요. 이단,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저야말로 즐거웠어요. 이 부서에서 일하는 거죠? 가끔 찾아 올게요.”

 

그 말에 벤지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벤지는 이단을 말 그대로 오랜만에 만난 것 처럼 대했다. 이단은 아주 잠깐 속에서 피어오른 가벼운 의문에 뒷목을 긁적였지만 곧바로 떠오른 다른 생각에 금방 빠져들었다

이단은 바로 오늘, 줄리아에게 반지를 주며 청혼 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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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없는 것 마냥 철제문을 발로 쾅쾅 쳐대던 게리는 양 손은 물론이고 품에 한 가득 거대한 것을 들고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활짝 열린 문 앞에는 반쯤 벗어재낀 몸뚱아리에 제 덩치만 한 호피 가죽 코트를 걸친 스테이시가 있었다. 스테이시는 게리의 품에 들린 거대한 물건에 얻어맞지 않기 위해 뒤로 몸을 살짝 피하며 게리의 동향을 살폈다. 꽤 무거웠던 모양인지 게리의 관자놀이 위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물건은 놓치지 않겠다고 하는 듯이 잡은 손등에는 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스테이시가 안전하게 뒤로 물러나고, 제 눈앞에 물건을 놓을 자리가 생긴 것을 본 게리는 드디어 부들부들 떨리던 팔로부터 물건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스테이시는 빤히 게리를 쳐다보았다. 양 팔이 뻐근한지 한참동안이나 손목을 탈탈 털고, 어깨를 돌리던 게리는 뒤늦게 스테이시의 표정을 알아챘다.

 

다니다가 좋은 게 있어서 주워왔어.”

 

능청맞은 게리의 대답에 스테이시는 그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때고 정체불명의 물건에 관심을 주었다. 뒤집어엎어진 그것은 새까만 알루미늄 재질에 잡다한 버튼들, 그리고 군데군데 붙어있는 스피커가 강하게 자신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필하고 있었다. 스테이시가 제 어릴 적에 사탕보다 더 가까이 뒀던 물건을 알아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허리를 굽혀 엎어진 물건을 바로 돌렸다. 버려져 있던 것 치고 깔끔하게 유지 된 건반과 흑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건의 정체는 신디사이저였다. 스테이시의 검지 손가락에 건반 하나가 눌렸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물건을 다루듯이 자연스럽게 만지는 스테이시의 모습에 게리는 의문을 품었다.

 

네 거야?”

세상에 진정한 내 것이라는 게 존재 하는 건가?”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둘 다 아니라면... 그래, 선물이라고 하자.”

고맙게 받도록 하지.”

 

게리는 바닥에 얌전히 놓여있는 신디사이저를 다시 들어 올려 스테이시의 방으로 옮겼다. 게리. 왔어요? 거실에서 들리는 데이빗의 상냥한 목소리에 게리가 크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려고 했지만, 제 발등에 물건을 떨어트릴 뻔한 이후로 얌전히 스테이시의 방으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에 집중했다.

 

근데 이거 소리는 나는 거야?”

연결만 가능 하다면.”

 

말을 하는 동시에 스테이시는 바닥에 놓여져 있는 어뎁터 하나를 찾아 손에 쥐었다. 좌측에 달려있는 작은 구멍에 어뎁터를 꽂고 선을 연결했다. 게리는 가만히 스테이시가 하는 모양을 쳐다보았다.

 

근데, 거 칠 줄은 아는 거야?”

게리 킹. 네가 항상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게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스테이시는 얄밉게 너스레를 떠는 게리를 한 번 힐끗 보고 난 뒤, 물건의 전원을 천천히 밀어 눌렀다. 수 천 시간의 연습 덕분에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힌 손가락을 가볍게 건반 위로 올려놓고, 버튼 몇 가지를 돌려 맞추다가 게리가 지루함에 하품을 할 때 쯤. 미세한 강도까지 조절 할 수 있을 것처럼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내가 술과 섹스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음악이야.”

 

끝이 까진 검은 매니큐어 끝에 눌리는 건반 사이로 느릿느릿한 선율이 흐른다. 스테이시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 무표정 한 듯 보였지만, 집중하는 듯이 살짝살짝 흔들리는 고개와 버림받은 것 치고는 꽤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조금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기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원래는 밤에 듣는 음악이지만.”

 

게리는 하품을 하느라 쩍 벌렸던 입을 다물고 행여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선율 사이에 끼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짱을 꼈다.

 

가끔은 이런 낮에 듣는다고 그가 슬퍼하지 않겠지.”

누구?”

쇼팽.”

 

게리는 입을 다물었다. 스테이시의 말은 절반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넘겨 들어도 사는데 (주로 술을 마시거나, 섹스하거나.) 지장은 없었다. 게리는 스테이시의 말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뒤 방 안을 가득 채운 극적인 레치타티보를 즐겼다.

 

훌륭해.”

 

대답 대신 건반 위에 세워져있던 손가락을 떼고 몸을 돌려 게리와 눈을 마주쳤다.

 

더 훌륭한 것도 보여줄 수 있지.”

 

스테이시는 외투를 침대에 던져 놓으며 게리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내 연주를 보여 줄 차례구만. 게리는 헤벌쭉 벌어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문신이 새겨진 스테이시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아쉽게도 스테이시의 목적은 게리와 같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공중에 멈춰진 게리의 손과 그의 멍청한 표정을 힐끗 본 스테이시는 고개짓으로 얼른 따라오라며 재촉했다.

 

 

스테이시는 게리를 집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방에 끌고 갔다. 방문은 기름칠을 하지 않은 모양인지 쇠가 긁히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쌓인 먼지가 게리의 정수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털던 게리는 방 한 가운데 놓여있는 먼지로 뒤덮인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테이시는 삐그덕 거리는 피아노 의자를 끌어 앉았다. 게리는 그 주변을 천천히 돌며 피아노 지붕에 있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묻어나오는 것은 없었다.

 

꽤 마음에 드는 공간이야.”

 

확실히, 게리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스테이시를 본 것이 거의 처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었지만 미세하게 상기된 그의 볼은 여실히 그의 감정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게리는 방 한 구석에 창문 위로 두꺼운 커텐이 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한 손으로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코를 막고 커텐을 한 쪽으로 밀어 치웠다.

 

게리 킹을 위하여.”

 

게리의 앞으로 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며 창문이 모습을 보였다. 마침 해의 방향이 맞았던 모양인지 주황빛의 태양광이 방 안을 밝혔다. 오랫동안 연주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찾아와 튜닝을 해놓았던 덕분에 피아노의 선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처럼 가볍고, 탄성있게 튕겼다. 게리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고 서 스테이시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눈 위로 숱 많은 속눈썹이 깜빡이고. 왼쪽 가슴에 있어야 할 심장이 손가락에 있는 것 마냥 건반 위에서 생명을 얻어 날뛴다. 날뛰는 손가락 끝을 올라타서 단단히 근육이 잡힌 팔뚝, 험악한 용이 심장을 감싸고 있는 모양세로 그려진 가슴, 어젯밤 게리의 흔적이 남은 목덜미, 그리고 스테이시.

 

스테이시는 게리가 자신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손끝에서 나오는 음표들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었다. 스테이시는 고개를 살짝 돌려 게리를 쳐다보았다. 게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머리칼에 손을 집어넣고,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스테이시의 손가락이 가볍게 건반을 퉁퉁 튕기다가, 천천히 게리의 허리를 잡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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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팁 님의 빌런벤지이단을 보고 썼습니다.


약간 어지러울 거예요. 목소리는 한 곳에 모이지 않고 안개처럼 희뿌옇게 흩어졌다. 벤지는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바닥에 무릎을 굽혀 이단과 눈을 마주했다. 이단은 웃옷을 벗은 채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차고 기둥에 묶여 쓰러지다시피 앉아 있었다. 벤지는 조심스럽게 그의 몸뚱이를 살펴 내려갔다. 다행히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반증하듯 가슴팍이 아주 느린 속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눈꺼풀은 온 세상의 중력을 혼자 다 받는 것 마냥 무거워 뜨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은 굽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벤지는 그제야 제가 한 짓에 대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미 엄지손톱은 사포나 톰 따위의 날카로운 것을 가져다 긁은 것처럼 닳아 있었다. 입 안에 까끌까끌하게 남아있는 손톱 쪼가리를 침과 함께 바닥에 뱉으며 벤지는 천천히 이단에게 다가갔다.

 

이단?”

 

그가 항상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동경과 애정이 반 쯤 섞인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인지 이단의 얇은 눈두덩이 아래에서 눈알이 꿈틀대며 움직였다. 벤지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을 멈췄다. 이단의 갈라진 입술이 효과적으로 신음을 뱉기 위해서 약하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벤지는 조심스럽게 이단의 볼 위로 손을 뻗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벤지는 모로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단은 벤지의 무모한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이단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일이 끝난 후에도 끝끝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벤지는 이단을 구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단을 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벤지는 영원히 그를 내보이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볼에 닿는 차갑고 축축한 손에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톱날처럼 깎인 손톱이 이단의 턱 끝을 긁어댔다. 이단은 약 기운이 듬뿍 묻은 숨을 천천히 뱉어냈다. 벤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고, 이단은 울상인 벤지의 얼굴을 보고 안심하라는 듯이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며 웃어주었다.

 

으윽, 일단. 이것 좀 풀어줄래?”

 

웃어주었다. 이것은 이단의 웃음이 아니었다. 벤지는 수갑을 들어 보이며 신음하는 이단을 보고 웃어주었다. 이단은 자신이 약기운에 몸이 절어져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악 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일단, 이 곳에서 빠져나가자.

 

어딜 가요?”

 

벤지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이단은 그제야 불분명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의 존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단은 벤지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무릎을 꿇다시피 앉아있는 자신의 하체를 내려 보았다. 복숭아뼈와 발뒤꿈치를 보이지 않게 가린 붕대 위로는 짙은 갈색의 피딱지가 응고되어 있었다. 이단은 천천히 무릎을 들어, 일어나기 위해 시도를 했다. 단단한 굳은살의 흔적이 박힌 발바닥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꺾였다. 이단이 고통스럽게 한숨을 뱉었음에도 벤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약을 생각보다 많이 탔나 봐요. 엄청 걱정했어요.”

벤지?”

이름 좀 그만 불러요.”

“내 질문에 대답 해.”

 

이단은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부정하듯이 몸을 바르작댔다. 단단한 손목이 수갑에 긁혀 생채기가 났다. 벤지는 이단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단은 벤지의 손이 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뜨겁고, 칼날로 표피를 긁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벤지의 손이 닿은 곳마다 타오르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냥, 근육을 살짝 자른 것 뿐이에요.”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는 단어를 이용해 내뱉는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단은 벤지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단을 위해서예요.”

제발. 장난은 그만해.”

장난이라구요?”

일단 이것 좀 풀고...”

 

벤지는 이단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간단히 힘을 주자 주사기의 액체는 재빠르게 그의 근육 속으로 흡수되었다.

 

전 언제나 진심이었어요.”

, 망할. 이게 무슨...”

조금 졸릴 거예요.”

 

커다란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들어가 있다. 분노, 배신감, 불신, 절망. 눈동자에 비치는 벤지의 모습 위로 그것들이 반짝였다. 벤지는 그의 눈을 사랑했다. 애정뿐만이 아닌 모든 감정을 알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보이는 이단의 눈빛은 가장 열정적이며, 아름다웠다. 벤지는 텅 비어버린 주사기를 뽑아 바닥에 던져놓고 이단의 얼굴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랑에 빠진 표정, 분노에 차오른 표정이 바로 앞으로 맞닿았다. 벤지는 이단의 뒷덜미를 강한 힘으로 붙잡아 고정시킨 뒤 입을 맞췄다. 갈라진 입술이 찢어져 핏방울이 맺혔다. 아주 작은 방울이었음에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착각을 주었다


이단은 수마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어깨를 비틀어 혀를 섞어오는 벤지를 떼어내려 했지만 결박 된 상태에서 제 힘을 발휘하기 쉬울 리가 없었다. 목덜미를 집어 누르는 손이 이단의 반항을 내려찍기라도 하듯 더 힘을 주었다. 피와 타액이 섞여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이단은 벤지의 입 속에서 쿨럭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단은 이를 세워 뱀처럼 꿈틀거리는 벤지의 혀를 깨물었다.

 

벤지가 비명을 지르며 입을 떼어냈다. 이단은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진홍색의 침을 뱉었다. 벤지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벤지는 손바닥에 힘을 실어 이단의 뺨을 내리쳤다.

 

이해해요. 아직 적응을 못한 거 같아요. 그렇죠?”

 

이단은 벤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오른쪽 뺨은 얼얼하고, 공간이 뒤틀리고 몸이 공기 중으로 부유하는 것이 느껴진다. 벤지의 말대로 약효는 굉장했다. 이단은 수마를 이기기 위해 눈에 핏줄을 세우며 벤지를 쳐다보았다. 몸이 휘청이며 고정 된 수갑이 부딪혀 듣기 싫은 금속음을 크게 질러댔다.


벤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붕대가 감긴 발목 위로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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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가 굵은 손바닥이 약 올리듯 시야를 어지럽혔다. 깊숙이 들어간 주름 잡힌 손금은 두꺼운 밧줄이 되어 목을 졸라왔다. 어둠이 몸을 짓눌렀다. 차단된 시각 속에서 촉각은 제 기능보다 훨씬 뛰어난 힘을 발휘했다. 까슬까슬한 밧줄이 점점 면적을 넓히며 목젖 위를 감싸왔다. 폐로 들어가는 산소의 양은 극심한 부족을 호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28개의 뼈마디, 그 위를 덮는 뜨거운 근육과 감싸는 차가운 피부. 그렇게 서서히 변해갔다. 목을 감싸 쥔 손은 노예에게 낙인을 찍듯이 불타올랐고 녹아 흘러내렸다.

벤지는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 그런 이유로, 늦잠을 잤어요.”

 

벤지는 하얀 꽃이 곱게 조각칼로 새겨진 접시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접시는 카르텔의 비밀계좌를 추적하기 위해 이단과 벤지가 스위스에 밀입국 했을 때, 잠시 들른 제네바의 주 마다 열리는 시장에서 구매 한 것이었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접시에는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식기 세척기와 접시를 번갈아보던 벤지는 개수대의 물을 틀어 표면에 붙어있는 먼지들을 흘려보냈다.

 

이거, 기억나요?”

 

벤지는 마른 식기닦이 행주로 접시를 공들여 닦은 뒤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카르텔한테 쫓기는 건 기본이고, 밀입국한 게 꼬여서 국제 경찰한테도 쫓겼잖아요. 그 때.”

 

오랫동안 쓰지 않아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덕분에 접시는 어제 산 것 마냥 광택을 내고 있었다.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니까요?”

 

벤지는 후라이 팬을 들어 베이컨 두 장과 스크램블 에그를 접시 위로 조심스럽게 덜어 옮겼다.

 

, 어쨌든 이렇게 살아서 이런 접시에 아침도 챙겨 먹을 수 있고, 좋은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벤지는 나머지 접시에도 베이컨 두 장과 스크램블 에그 대신 발사믹이 뿌려진 양상추를 가득 올려놓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유리컵에 담긴 우유, 가운데 접시에 미리 덜어놓은 잘 구운 토스트 네 조각. 꽤 그럴듯한 아침식사였다.

 

그 동네 경찰한테 쫓기지만 않는다면스위스는 참 아름다운 도시일 것 같지 않아요?”

 

토스트를 한 입 크게 베어물고, 베이컨을 입에 우겨 넣었다. 마지막 말은 입 안에 들어가있는 음식을 씹는 소리에 웅얼거리며 잘 들리지 않았다. 벤지는 우유 대신 콜라를 따를 걸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입 안에 든 것을 삼켜 넘겼다.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벤지는 가루가 잔뜩 묻은 손바닥을 털어 버린 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장자리가 새까맣게 탄 토스트 두 조각, 소스가 잔뜩 뿌려진 시들어 빠진 양상추. 말라 비틀어진 베이컨.

 

이 쪽에서 일이 다 끝나면, 스위스에 가서 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벤지는 아무도 건들이지 않은 접시 위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일을 나오는 거야? 그런 일을 겪고도?”

“벤지는 안 좋은 일을 충분히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사건을 안 좋았던 일로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모두들 좋은 아침! 벤지는 목에 걸었던 카드 텍을 빼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루터와 그의 동료 직원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벽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어 선 루터는 고개를 살짝 까닥여 벤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벤지의 손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 두 잔이 들은 종이박스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좀 늦었네?”

오늘 아침을 성대하게 차려 먹었거든요. 늦지 않을 수가 없었죠.”

 

벤지는 그 날 아침 악몽을 꾼 것을 말하려다, 금방 관두었다. 루터는 더 이상 벤지를 잡을 생각이 없었고, 그것은 벤지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오른쪽 눈썹을 크게 까닥인 벤지는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루터는 벤지의 그 얼굴에서 익숙한 그의 오랜 친우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 벤지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벤지는 캐리어에서 커피 두 잔을 꺼냈다. 시럽을 넣지 않은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 헤이즐넛 시럽 세 펌프를 넣은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 이단의 것이었다. 벤지는 데스크톱 전원을 키며 자신의 몫으로 사 온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 오늘도 별 일 없겠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벤지는 서류철 위에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커피를 올려놓았다.

 

이봐, 벤지.”

듣고 있어요.”

 

벤지는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루터는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알아 듣고 그의 공간으로 침입했다. 벤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벤지 그 자신조차도 그 예민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남은 커피, 내가 마셔도 될까?”

남았다구요?”

그래. 두 개 사왔잖아.”

남았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벤지.”

 

벤지는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은 모니터의 백그라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루터는 차분하게 벤지의 이름을 불렀다.


벤지.

벤지.

벤지.


이단은 제 뜻이 벤지의 고집에 가로막혀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이렇게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것이 사건을 해결 해 줄수 있는 마법의 열쇠 인 것처럼. 그냥 이름을 부르고 벤지와 눈을 마주했다.

 

이단 헌트는 죽었다.

 

나도 알아요.”

 

벤지는 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영원히 그 속에 묻어 나오지 않을 사람처럼. 루터가 자리를 뜰 때까지. 계속.

 

 

지금 21세기인 거, 알고 있죠?”

 

벤지는 아무도 앉지 않은 쇼파 위에 신문을 던졌다.

 

이상한데서 고집이 세단 말이에요. 이단은.”

 

전 미국의 헤드라인이 적힌 신문지는 받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 바닥 위에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요즘은 패드로 뉴스 보는게 훨씬 편해요.”

 

벤지는 이단 헌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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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미션의 결과에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승리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주체가 이단 헌트일 경우 더더욱. 미션이 얼마나 어렵다든가, 얼마나 불가능하다든가는 몇 십 년 경력의 전설적인 현장요원에게 있어서 문제 따위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정확한 문제는 이단의 나이에 있었다. IMF는 언제나 이단에게 해결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 무리한 미션, 일반인이나 다른 보통 현장요원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미션을 변함없이 던져주었고, 그것은 이단이 고등학생 때, 스무 살, 서른 살. 그리고 쉰의 나이가 될 때까지. 변함없었다.

 

덕분에 이단은 미션이 끝나고 한차례씩 꼭 겪는 홍역처럼 침대에 누워 골골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이를 핑계대거나 짬밥을 내세우며 자신의 밑에 있는 요원들에게 일처리를 내려 보낼 수도 있었지만 이단은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이번 일도 어렵다며 걱정하는 벤지에게 어깨만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벤지는 며칠 째 똑같이 침대에 엎드려서 숙면을 취하고 있는 이단을 보고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일처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회전을 보여줬으면서, IMF와 관련 된 일에서는 미련할 만큼 수용범위가 넓었다. 혹시라도 이단의 잠이 깰 세라 조용히 넥타이를 벗어 걸어놓고, 셔츠도 벗어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으려던 차에 그가 베개에 묻었던 얼굴을 느릿하게 들어 벤지를 반겼다.

 

아직도 아파요?”

 

허리에 느껴지는 둔통을 호소한지가 벌써 이틀 전이다. 벤지는 셔츠를 벗다 말고 이단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이단은 벤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단의 표정이 아니라, 벤지의 표정이.

 

언제 은퇴 할 거예요? 나이도 생각해야죠.”

아직 날 찾는 사람이 많잖아.”

 

고개를 드는 것이 힘든지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웅얼 대답했다. 이단은 이십 삼 층 건물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아주 살짝 허리를 삔 것 같다고 했었다. IMF에서 제공하는 직원 복지를 위한 건강검진에서는 수많은 미션으로 인해 쌓인 피로와 노화로 인한 근력 약화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라는 진단을 했다. 어찌 되었든 둘 다 벤지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걔네들이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맨날 누명 씌우고 쫓아다니기만 하지. 벤지가 망신창이가 된 이단을 보고 분노를 숨기지 않을 때면 이단은 그냥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불편하게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바로 누웠다. 이단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뻐근함에 끙, 하고 신음을 했다. 벤지는 이단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저녁은 먹었냐고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이단은 방금 먹은 우유 한 잔을 기억하고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벤지는 그 어정쩡한 반응이 언제나 불만이었다. 항상 남을 위하고, 자신의 존재는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 마냥 대답하는 것들.

 

그래서, 벤지는 조금 고민을 했다. 피로에 지친 애인을 위해 벤지 던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지? 대신 그의 일을 해주기. 벤지는 이단과 똑같은 현장요원이었지만 이건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벤지 던이 아니라 이단 헌트로 태어나던가. 대신 사표 내주기. 헌리가 사표를 수리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헌리뿐만 아니라 브랜트 부터 길길이 날 뛰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 외에도 해결책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대부분 시덥잖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벤지는 일을 그만둔다던가, 대신 일을 해주는 등 근본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인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단. 허리 아직도 아프댔죠?”

어제보단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서 찾아 낸 해결책이. 바로 마사지였다. 벤지는 셔츠를 단단히 걷어 올리며 바로 누워 자신을 쳐다보는 이단을 다시 돌려 눕혔다. 이단은 벤지의 속셈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눈만 꿈뻑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벤지는 긴장 풀라는 듯이 이단의 어깨를 퉁퉁 쳐댔다.

 

허리 통증에 좋다고 해서요.”

 

벤지는 이단의 허리 위로 올라 타 살짝 깔고 앉았다. 궁금했던 모양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는 이단의 고개를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쓰다듬었다. 이단은 얌전히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허리 통증이 심할 경우 어깨나 목에까지 퍼질 수 있대요.”

 

풍성한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두꺼운 목덜미에 손바닥을 올려 힘을 주었다. 이단은 피부 위로 묵직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손바닥이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벤지의 손바닥은 이단의 목덜미에서부터 어깨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꾸준한 운동 덕에 근육이 잘 잡힌 어깨가 벤지의 손 안에 만져졌다. 조금더 밑으로 내려가, 톡 튀어나온 견갑골부터 살짝 들어간 척추까지. 벤지는 손목에 힘을 실어 마사지에 집중했다. 이단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시원해요?”

으응.”

 

이단은 벤지의 질문에 답하기 귀찮았던 모양인지 그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대답했다. 꼭 섹스가 아닌, 다른 평범한 행위에서 자신의 밑에서 물렁물렁 할 정도로 늘어져있는 이단을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벤지.”

?”

혹시, 엉덩이 만지는 것도 마사지에 포함 되어 있는 거야?”

 

. 벤지는 숨을 들이키며 이단의 엉덩이에 붙어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뜨거운 것이라도 쥔 듯이 재빨리 떼어냈다. 벤지 그 자신도 이단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었다. 정말로 의식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다는 듯이 손을 등 뒤로 돌리고, 머쓱한 웃음.

 

너무 밑으로 내려갔죠?”

나쁘지는 않아.”

아니에요...”

 

벤지는 이단의 허리 위에서 내려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벤지의 마사지 덕인지, 그의 귀여운 반응 덕인지. 이단은 몇 시간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어깨와 함께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허리의 통증도 같이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벤지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단 덕분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바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워?”

아니, 아니요. 그냥,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이단이 오해할까봐.”

그럴 의도 있었으면 뭐 어때서?”

그만 놀려요...”

 

결국 크게 웃고만 이단은 침대의 비어있는 공간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며 벤지에게 누워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에라, 모르겠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벤지는 이단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그의 옆에 누웠다.

 

은퇴는, 생각 해 볼게.”

정말요?”

 

벤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지금까지 열심히 IMF의 부당함과 동부에 바다가 보이는 집을 사놓았다는 등 열심히 이단을 설득했던 벤지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반응에 이단은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네 속까지 썩여가면서 일하고 싶지는 않거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목숨이 여러 개인 것 마냥 구는 이단이라도 자신의 사랑스런 애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에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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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베스 님의 언더테일 au를 기반으로 합니다.

- 약간의 스포주의



발등에 느껴지는 촉감은 아직도 생생했다.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와 햇볕을 받고 싱싱하게 피어 오른 넝쿨들. 30년 전. 찢겨진 종이위에 한 컵의 물을 부어버린 것 처럼 흐려져 확실치 않은 기억들. 하지만 그 당시에 느꼈던 촉감들만은 아주 생생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발등을 휘감고, 인간은 구덩이에 떨어졌다.

 

* 이 세상은 죽거나 죽이거나야!

 

약간의 속임수와 살의를 품은 공격.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공격을 대신 맞아준 털뭉치. 덕분에 인간은 단 하나의 생체기도 얻지 않았다. 악의를 가득 품은 꽃이 저주를 내리며 자리를 피한 후에도 인간과 괴물, 그 둘은 한참이나 서로의 몸을 포갠 그 상태로 있었다. 인간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혼란스러운 정신을 제대로 잡을 때 까지 기다려 줄 수도 있었지만, 복슬복슬한 털의 주인은 인간과 달리 참을성이 많지 않았다. 공격을 맞은 부위에서스믈스믈 올라오는 둔통을 무시하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인간을 쳐다보았다. 교과서 속에서나 보고 배웠던 처음 보는 생명체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꺼내 불러보았다.

 

* 인간?

* 맙소사, 내가 살아있는 인간을 보고 있는게 맞는 건가?

 

그래. 더 이상 기억이 나질 않았다.

 



UNDERTALE AU


 


* 이 곳에 떨어지는 인간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도록 한다.

 

벤지는 왕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는 괴물이었다. 지난 20년간 그는 구덩이를 통해 떨어지는 인간을 물어 죽이고, 이 지하세계에서 제일 풍성한 털을 가지고 있는 괴물 왕에게 그들의 영혼을 가져다 바쳤다. 그가 이 지하세계에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는 떨어진 인간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는 작은 꽃이 인간의 영혼을 가로채려 꾀를 부리는 것만 아니라면, 항상 비슷하거나 똑같은 하루였다.

 

폐허에 유일하게 햇볕이 비치는 공간은 공교롭게도 인간이 자주 발을 헛디디는 구덩이 바로 밑이었다. 벤지는 떨어지는 인간을 잡기 위해서, 또는 그 곳에서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낮잠을 자기 위해서. 폐허의 끝자락에 있는 집에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일과였다. 벤지는 그 짓을 몇 십년간 반복 하면서도 단 한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인간의 영혼을 회수하는 일에 단 한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제 단 하나. 단 하나의 인간의 영혼만 있으면 괴물들은 지상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영혼을 받은 왕이 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태 괴물들을 가두어 놓았던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고, 작은 구덩이에 내리쬐는 한 줌의 햇볕이 아닌 지상에 가득 내리쬐는 햇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괴물들은 그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벤지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착한 구덩이 틈으로 비추는 햇살은 바닥에 떨어진 인간의 등을 잡아먹을 듯이 내리쬐고 있었고, 벤지는 최대한 걸음 소리를 죽여 인간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떨어지는 동안 돌덩이에 부딪혀 작은 내상을 얻었는지 인간의 단단한 어깨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벤지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숨겨진 주둥이를 벌려 인간의 목덜미에 서서히.

 

서서히 자신이 떨어진 공간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든 인간의 익숙한 얼굴에 벤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왜 이 인간이 다시떨어진 것이지?

 

벤지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멀리는 아니고, 인간과 딱 다섯 걸음이 떨어진 곳에. 인간의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의 어둠 속에서 바닥에 손을 짚고 등을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간을 관찰했다. 벤지는 인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상의 인간들과 괴물들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을 때, 이단은 지하에 떨어진 첫 번째 인간이었다.

 

지금은 마지막 인간이 될 수도 있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수백가지의 갈등이 벤지를 둘러 쌓았다. 혼란스러웠다. 왜 이단이 이 곳에 다시 온 걸까? 이단은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괴물들을 미워할까? 이단은 그 때 있었던 그 일을 기억할까? 벤지는 이단을 죽일 수 없었다. 이 곳에 떨어지는 인간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도록 한다. 봉인으로 결계가 닫히고, 피가 잔뜩 묻은 벤지의 털을 쓰다듬으며 왕이 피눈물물과 함께 했던 그 말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어떡하지? 나는 어떡하지? 벤지는 쏟아지는 모순과 불안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동시에 검은색의 도톰한 육구가 꿈틀거리며 인간의 손으로 탈피했다. 온 몸에 탐스럽게 기른 털은 피부가 갈라지며 그 안으로 들어가 평범한 인간이 입고 있는 옷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벤지는 이단을 죽일 수 없었다. 벤지는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던 인간의 이름을 불렀다.

 

이단?”

 

이단은 벤지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이단의 손에는 진짜 칼이 들려져 있었다. 벤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단이 괴물들을 죽일 수 있을까? 평범한 괴물들에게는 이미 성인의 체형을 한 이단을 막을 수 있는 힘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단이 괴물들을 죽인다고 말하면, 나는 이단을 죽일 수 있을까?

 

“벤지에. 기억 나요?”

, 괴물인가? 걱정 마. 헤칠 생각은 없어.”

무기를 들고 그런 말을 하면, 아마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이단은 오른 손에 쥐고 있는 칼을 내려보았다. 전혀 위협을 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천천히 바닥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벤지는 진정하라는 듯이 이단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른 뒤, 자신의 이름이 벤지라는 것을 소개했다. 벤지는 만에 하나 혹시, 이단이 제 이름을 듣고 모든 것을 기억할까 싶었지만 이단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 없었다.

 

잠깐, 날 알고 있어?”

이단. 당신을 여태까지 기다렸어요.”

이 곳에 옛날에 온 기억이 있어.”

알아요. 내가 그 때...”

 

괴물이다!’ ‘괴물이 인간 아이를 납치했어!’ 

악몽같은 그 기억들이 등 뒤를 타고 기어 올랐다. 벤지는 입을 다물고 이단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단, 이 곳은 말 하기가 좋지 않은 곳이에요. 괜찮다면 집으로 초대해도 될까요?”

 

 

 

이 곳에는 왜 온 거예요?”

 

벤지는 다시.‘ 라는 단어를 붙이려다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을 골랐다.

 

6명의 사람이 이 지하로 떨어진 이후로 돌아오지 않고 있어. 나는 그 사람들을 찾으러 온 거고. 무엇보다 나는 이 곳에서 살아 나온 적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벤지는 자신이 죽이고 영혼을 빼앗은 6명의 인간을 떠올렸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평소에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명령은 덤이었다. 표정이 일그러질 뻔 한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이제, 내가 질문 할 차례야.”

이단...”

“30년 전에, 괴물 하나가 꽤 오래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 하나를 물고 지상에 올라왔다고 전해 들었어. 마을 사람들은 퍼져있던 흉흉한 소문이 괴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고, 힘을 합쳐 괴물을 물리치고 지하를 봉인했다고 했지.”

 

그 날이 아직도 생생했다. 벤지는 의도적으로 이단의 눈길을 피했다. 죄책감과 그리움이 섞여 벤지의 속을 매스껍게 만들었다. 이단은 제가 하는 말에 빠져 벤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람은 깨어났지만 지하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어. 마을 사람들은 제 멋대로 깨어난 사람을 걱정하고 동정했지만... 하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어.”

 

이단, 이단은 이 곳에서 살기 너무 연약해요.’

원래 살던 곳에 데려다줄게요. 하지만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에요. 이단은 언제나 이 곳으로 놀러 올 수 있잖아요?’

 

네가 날 구해준 그 괴물이지?”

 

벤지는 정말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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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끝나면 바로 와요. 이단.


벤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정리 된 파일을 건내주었다. 으응. 피곤한 모양인지 손등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이단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뭐라도 도움을 더 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타깃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 밖에 없었다. 위험해지면 당장 빠져 나오는 거예요. 알겠죠? 벤지는 걱정스러운 투로 파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당부했다.


위험 할 일은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니까,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계획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면 이단은 진즉에 미션을 끝냈을 것이고, 벤지도 애꿎은 달력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단은 돌아오지 않았고, 벤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던 12월은 끝나고 달력이 한 장 뜯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씨는 서서히 추워지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꽂아 넣으며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벤지는 이단이 없는 삶에 서서히 적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예로, 퇴근 후 저녁으로 사가는 저녁거리로 이단의 몫을 사지 않는다. , 주말 늦게 일어나서 이단을 부르는 일도 눈에 띄게 적어졌다. 하지만 벤지는 항상 이단이 당분간은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좋아하는 달달한 간식류를 한 두 개씩 사와 찬장에 묵혀두는 버릇은 관두지 못했다. 그 덕분에 벤지는 흥미가 없는 과자나 젤리, 케이크를 입에 물리도록 먹고는 했다.


그 날도 평소와 똑같았다. 최근 들어 벤지에게 있어서 평소란 이단이 없는 하루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사무실에서 늦장을 부리다가 저녁 늦게 쯤 집에 들어간다. 벤지가 불이 켜지지 않은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tv를 켜는 일이었다. 한참동안 샤워도 하고, 식탁에 올려놓은 달달한 과자 몇 개를 집어먹으며 쇼파에 눕는다. 그리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깨닫지도 못한 체 해가 뜨면 아이패드로 메일을 확인하며 일처리가 밀려있는 IMF 내로 출근을 한다. 벤지는 그 날 아침도 자신과 챗바퀴 안의 햄스터의 차이점을 고민하다가 생각하기를 관뒀다.


신입 요원들의 데이터 분석은 애저녁에 끝났지만 벤지는 상황실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저 분이 전설의 요원 이단헌트님의 동료분이시래...


새로 들어온 요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벤지는 못 들은 척 커피를 홀짝였다. 자기들끼리 몇 번 말을 주고받더니 그 중 머리를 짧게 쳐내고 눈매가 꽤 사납게 생긴 여성 요원이 벤지에게 말을 걸어왔다.


벤지?”


말을 걸어오는 건 예상 못했는데. 벤지는 컵에서 입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신체 변화량 정리 해주시는 거. 벤지가 하는 거 맞죠? 고맙다고 하고 싶어서요.”

고맙긴요. 할 일인데... 물론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입사한지 몇 년 안 됐지만 당신 팀 이야기 많이 들어왔어요. 솔직히 대단하잖아요? 크렘린 궁은 말 할 것도 없고.”

그거 폭발했는데.”

그만큼 화끈하단거죠!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정말... 꿈만 같아요.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소문이라뇨? 그거 때문에 고생했던게 아직도 생각난다구요.”


또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비행기 안이 아니라 밖에 매달린 것도, BMW 타고 세 바퀴 굴러 떨어진 것도. 미친 놈을 이단이 잡지 않았다면 지구가 터질 뻔 한 것도. (술렁술렁) 벤지는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제 앞에서 눈을 반짝이는 병아리 같은 요원에게 지금까지 겪었던 미션들을 말해줬다. 멀리서 눈치만 보던 신입들도 벤지와 동기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고, 벤지는 몇 가지 기밀은 교묘히 숨기며 위험했던 사건들을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대부분 이단의 자랑이었으며, 간간히 벤지는 자신의 자랑도 끼워 넣었다.


그 이야기가 끝을 보인 것은 소재가 떨어져서도, 벤지나 요원들의 흥미가 떨어져서도 아니었다. 어느새 뚱한 얼굴을 하고 다가 온 브랜트가 벤지의 뒤통수를 치고 잔소리를 해댔다. 열심히 벤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요원들은 벤지의 이야기를 경청한 적도 없었던 것 마냥 조용히 브랜트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임마, 애들한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 사실이잖아?”

저러다가 제 흥에 빠져 사고치는 애들도 있거든. 지들이 이단헌트인 줄 알고. 괜히 바람만 불어 넣지마. 훈련 안 된 요원은 폭탄보다 더 위험하니까.”


벤지는 잠깐 투덜거렸지만 브랜트의 말도 일리가 있었으므로 수긍했다.


근데 웬일로 날 찾아온건데?”

넌 왜 집에 안 들어간건데? 이단이 도착했어. 그거 알려주려고 왔지. 니가 가서 잘 좀 돌봐주라고.”


이단이 도착했어. 그 말 밖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벤지는 브랜트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불이 켜져 있었다.


이단!”


이단은 쇼파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까치집마냥 잔뜩 엉켜있는데다가 얼굴에는 정체 모를 까만 것들이 묻어있었고 다크서클은 눈보다 더 크게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신발을 겨우 벗은 벤지는 한걸음에 이단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이단도 천천히 눈을 떴다.


이단, 꼴이 말이 아니에요. 잠은 제대로 잔 거예요? 씻은 건 언제고? 아니 일이 잘 안 풀린거예요? 다친데는 없고?”

질문은 한가지만.”

보고싶었어요.”


벤지는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보이는 이단을 꼭 끌어안았다. 이단은 벤지의 그 말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벤지는 조금 더 그를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최대한 자제한 체 이단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상처는 없고 팔뚝과 목에 경미한 타박상만 남아있었다. 오른쪽 볼에 묻은 검댕이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준 다음 옷으로 가려진 몸을 확인하기 위해 이단의 팔을 자신의 목에 걸은 뒤 이단의 옷을 슬쩍 들어올렸다.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했죠?”

이단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려 벤지의 허리를 매만졌다.

으음, 벤지. 살 찐 것 같은데...”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말도 어물거리는 걸 보니 잠결에 대답하는 것이 분명했다. 벤지는 허리에 닿는 이단의 손을 치우며 최근에 이단 대신 먹었던 달달한 간식들을 떠올렸다. 초코 케이크, 프라푸치노, 마카롱. 어쨌든 이단이 그 간식들을 보며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일단 제대로 된 대화는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단이 마저 상의를 벗는 것을 도와줬다.


씻고 자요. 졸린 건 알겠는데 일단 씻는게 좋을 거 같아요.”

나중에. 벤지.”


이단이 예고도 없이 벤지를 자신의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벤지가 이단에게 안기는 꼴이 되는 건 쉬운 문제였다. 벤지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불편한 자세를 취했다.


으으, 말 안 듣죠. 듣고있는 거 다 알거든요?”


이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 올려본 이단은 평온한 얼굴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벤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단이 요구하는 것을 따랐다. 잘자요. 보고싶었다는 말은 내일 해도 되겠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잡으며 이단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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