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은 동료와의 관계가 돈독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가 평생토록 가지고 있는 직업적 신념은 아무것도 모르던 19살의 이단 헌트가 IMF에 입사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단순한 직장 동료, 사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한 체 서로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그는 여태 겪었던 사건을 토대로 이단 헌트를 만들어 나갔고, 적어도 그 이단 헌트는 무슨 사건이 없는 한에는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에 비해서 벤지는 유난히 동료를 좋아하는 인간이었다. 동료들은 그에게 자신의 간과 쓸개를 빼 주는 인간상은 아니었지만, 벤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 벤지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한에서 말이다. 벤지는 이단을 믿었고, IMF에서 쫓기고 있는 그를 위해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도왔다. 벤지에게 있어서 이단은 영웅이었다. 영웅은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공주를 구출했고, 들리지 않는 팡파레 소리와 함께 다시 돌아와 벤지를 포함한 수많은 조력자들의 축하를 받았다.


애초부터 이단은 유아독존 형 인간이었다. 자신의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보다는 자신의 앞길을 닦아 줄 조력자가 필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단이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된 것에는 몇 가지의 뒷배경이 있었다. IMF에 갓 입사 했을 때, 이단이 가장 처음으로 맡은 미션에서조차 이단은 훌륭한 요원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이단이 유일하게 믿었던 두 번째로 훌륭한 요원이었던 가 있었다. 훌륭한 요원이었던. 불행히도 그 말은 과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훌륭한 요원이었던 는 언제나 첫 번째로 훌륭한 요원이 되기를 원했고, 이단이 의 욕심 섞인 야망을 눈치 채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단은 끝까지 를 믿었다. 그리고 끝에 도달해서야 이단은 를 믿었던 자신을 후회했다.


벤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두를 좋아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두도 벤지를 좋아했다. 벤지는 항상 밝은 인간이었고, 단 한 번도 남을 의심하거나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그를 배신하거나 시샘하는 상황이 되어서도.


이단은 그런 벤지를 알고 있었다. 벤지는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이단은 철저하게 벤지를 이용했다. 이단은 벤지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단은 망설이지 않고 벤지에게 전화를 했다. “줄리아 핸드폰의 위치 추적을 해줘.” 몇 가지의 다급한 물음이 있었지만 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낙천적인 중얼거림 끝에 벤지는 이단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이단이 유능한 요원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것은 괜한 운이나 요행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피와 살 속에는 기민한 감각이 흐르고 있었다. 벤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눈치 채는 것에는 별다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단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사랑은 가장 이용하기 쉬운 감정 중 하나였다. 벤지는 사랑이라는 구실 하나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용서 할 것이고, 뛰어난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었다.


이단이 실종된 것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사실, 모스크바에 갇혀있는 이단 헌트를 빼내오는 데 벤지는 적합한 요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벤지는 서류를 조작했다.

 

이번에 현장요원 시험에 합격했거든요.”

 

이단은 그 말투에서 당신 때문에 미국에서 쫓겨날 지도 몰라요!” 라고 했던 휴대폰 잡음과 섞여 들려왔던 벤지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이단은 자신이 벤지에게 내렸던 평가보다 더 벤지는 위험을 즐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리드미컬한 말투에 이단은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벤지를 쳐다보는 방법밖에 몰랐다. 누군가를 이용하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닌 벤지 일지도 모른다.


벤지는 서툴렀다. 모든 면에서. 하지만 그만큼 일을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 한 가지의 실수를 통해 열 몇 가지의 요령을 배웠고, 새로운 것을 익혔다. 이단은 점점 벤지가 흥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단은 흥미로운 사실을 눈치 챘다. 무언가가 들어맞지 않았다. 모스크바 감옥의 경비는 삼엄했고, 그 곳에 갇힌 요원은 그 누구도 아닌 이단 헌트였다. 그 이단을 구하기 위해 IMF에서 보낸 두 명의 요원은 이단이 알지도 못하는 초짜들이었다. 이단은 자신의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보에 올랐던 요원들의 명단을 살펴보았고, 그의 눈동자는 벤지 던의 기록에서 멈추었다.


[잠깐 아래에서 볼까?] 사적인 부름이었다. 벤지는 이단의 메시지를 받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벤지, 예전 기록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걸 눈치 챘어.”

 

이단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벤지에게 있어서 불행한 일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이단이 있는 곳으로 내려온 벤지는 이단의 질문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바보 같은 벤지 던. 질문에 바로 되묻는 것은 그의 최대 실수였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벤지는 이단의 눈치를 계속해서 보았다. 세상이 끝날 때 까지.


다행히, 세상이 끝나기 전에 이단은 벤지의 의식을 깨웠다.


?”


이단은 벤지에게 이유를 묻고 있었다. 이단은 벤지를 책잡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희생할 필요가 있는지, 왜 자신이 앞서서 희생을 하는 것인지. 이단은 벤지의 의도가 궁금했다. 훌륭한 요원이 되고 싶어서? 이단 헌트와 그 옆에 나란히 서고 싶어서?


? 라니요...”


벤지는 두 손을 모으고 우물쭈물 거렸다. 혼이 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혼나고 있는 어린아이 같았다. 벤지는 항상 이단 앞에서면 자신이 여섯 살 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벤지가 느끼기에 이단은 전지전능한 어른이었다.


시민권이 박탈당하는 것이 겁나지도 않았던 거야?”


이단은 벤지와 나눴던 과거의 대화를 떠올렸다. 벤지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이단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나를 구하러 올 이유가 있었던 거야?”

이유요?”


뒤늦게 벤지는 자신이 이렇게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단은 자신과 똑같은 요원이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IMF 특성 상 서류를 조작한 것 따위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벤지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단 헌트는 벤지 던을 어떻게 생각하지?


당신은 그 때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잖아요.”


의도치 않았지만 벤지의 목구멍에서 힐난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냥, 당신을 구하러 가고 싶었어요. 그때처럼요.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벤지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이단은 그 때 처음으로 요원 벤지 던의 존재를 인식했다.

'BENJIET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휴가  (0) 2016.10.09
미션  (0) 2016.09.25
인어이단  (0) 2016.09.11
  (0) 2016.08.28
[벤지이단] 상상  (0) 2016.08.19

새파란 풍경 속에서 빛나는 건 눈동자 단 두 개였다. 벤지는 기도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차가운 액체에 입 밖으로 공기방울을 빠끔이며 그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벤지의 눈에 비친 눈동자는 깜빡이지 않았다. 그 자는 자신의 호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제 눈에 비친 무력한 어린아이 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벤지는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한순간 잊어버렸다. 그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한낱 어린아이가 그 얼굴을 묘사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선이 굵은 얼굴과 목에 칼집처럼 난 아가미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위 속에 쏟아 부어지는 짭짤한 바닷물의 맛은 그가 처한 현실을 잔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손끝이 저려왔다. 벤지의 창백한 손가락은 붙잡을 것도 없이 바다 속을 방황했다.


그가 뻗은 손에 허리를 잡힌 것은 한순간이었다. 벤지는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도 눈을 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뇌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고, 벤지는 자신이 본 것이 실제인지 허상인지 알 수 없었다.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종이자락처럼 휘날리는 몸뚱아리는 쉽게 수면으로 떠올랐다. 아가미가 달린 인간은 조심스럽게 벤지를 해변가 위로 끌어 올렸다. 가슴께를 간지럽히는 손길에 벤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속에 있던 모든 것을 토해냈다. 벤지는 정신을 잃었고, 깨어났을 때 그는 이미 걱정스러운 사람들 곁에 둘러쌓인 후였다. 그 후로는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일어나.”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른쪽 뺨에 묻은 침을 대충 손바닥으로 밀어 닦으며 잠이 덜 깬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벤지는 교수가 나간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두터운 해양생물학 전공 책을 덮으며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팔 한쪽을 기괴한 모양으로 꺾어 잠든 탓인지 어깨가 뻐근했다. 벤지는 삐딱하게 서있는 불만스러운 표정의 브랜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안 깨워준 거야?”

아무도?”

강의 시간에 말이야.”

너랑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이 학교 내에 없을걸.”


맞는 말이었다. 벤지는 훌륭한 학생임이 틀림없었지만 그는 뒤에서 괴짜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고는 했다. 벤지가 그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입학 초 교수와 벌였던 논쟁과 크게 관련이 있었다.


이 곳은 실존하는 학문을 배우는 곳입니다. 당신의 그 판타지적인 요소를 충족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 때 벤지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저는 인어를 실제로 봤는걸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벤지는 멍청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 것도 얻은 것은 없었다. 해양생물과 인간사를 가르치고 있는 노교수는 옹졸한 인간이었고, 자신의 강의를 우습게 보는 벤지 던과 같은 학생을 끝까지 괴롭히는 재주가 있었다. 그 뒤로는 이야기하기도 싫었다. 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벤지의 머릿속에는 교수의 비웃는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몇 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또렷했다.


아무튼, 오늘도 바다에 나갈 거야?”


브랜트는 잔뜩 일그러진 벤지의 표정을 보고 화제를 바꿨다. 드디어 벤지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너도 오고 싶으면 와도 돼.”

정중히 거절하지.”


드디어 정신을 차린 벤지는 두꺼운 천으로 된 가방에 책을 쑤셔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긋지긋한 강의실을 탈출 할 때였다. 벤지는 입학 한 이후로 몇 년째 같은 일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가며 자신이 익사할 뻔 했던 바다를 찾았고, 일부러 그 근처의 학교에 입학했다. 모두 그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몇 년째 수확은 없지만 벤지는 계속해서 시도했다. 벤지는 그가 자신을 구해줬을 때처럼 다시 나타나기를 바랐다.


벤지는 짭짤한 냄새를 크게 들이마시며 가방을 고쳐 맸다. 바다는 벤지의 고향과 같았다. 신발 밑창에 밟히는 모래의 감촉은 언제 느껴도 기분이 좋았다. 벤지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를 발견 못할 자신을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바다로 가는 것은 단순한 버릇이 되어버렸다. 그와 다시 만나지 못할 걸 알고 있었지만 항상 바다로 발걸음을 향하는 자신을 막을 길은 없었다.


파도가 바로 앞으로 닿는 곳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실존하지 않는 생물을 찾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름은 뭘까. 그 때 날 왜 구해준 걸까. 아직도 살아 있을까.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곳은 없었다. 그렇게 잠자코 앉아있었다.


바닥이 깊은 바다에서 머리통 하나가 튀어나온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벤지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물체를 쳐다보았다. 다시 눈가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멀리서도 알아볼 것 같은, 꿈속의 얼굴. 죽기 전에 봤던 그 얼굴. 벤지는 그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인어는 존재했다. 그 사실을 입증 가능하다는 것은 벤지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다. 인어가 존재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다시 만났다. 꿈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협은 실제로 있었다. 그리고 벤지는 죽지 않았다. 그가 벤지를 구해줬기에.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맑은 녹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바다 속이 아닌 대기 위에 떠오른 그의 얼굴은 그 때와 똑같았으며, 또 달랐다.


그는 입술을 천천히 뻐끔거렸다. 보통 물고기들이 그렇듯이, 소리는 나지 않았다. 벤지는 천천히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옷이 젖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다 위로 두 개의 머리가 둥둥 떠다녔다. 그는 벤지의 어깨를 잡았다. 어깨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촉감에 벤지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벤지를 바다 아래로 밀어 넣었다. 벤지는 반항하지 않았다. 천천히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벤지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벤지의 눈앞에 있었다.


벤지 던.”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벤지의 대답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그는 웃으며 벤지의 양 뺨을 쓰다듬었다.


날 계속 찾아왔지?”


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 좋을텐데.”


이단은 벤지의 어깨를 놔주었다. 벤지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폐는 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벤지는 헐떡이며 그의 손이 올라가있던 어깨를 매만졌다. 꿈이 아니었다. 잔뜩 젖은 머리칼을 한 벤지가 다시 바다 속으로 잠수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BENJIET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션  (0) 2016.09.25
처음  (0) 2016.09.17
  (0) 2016.08.28
[벤지이단] 상상  (0) 2016.08.19
[벤지이단] 세이프워드  (0) 2016.08.15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요원임과 동시에 벤지 던의 완벽한 애인인 이단 헌트는, 벤지의 생활반경 하나하나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른 대처법 따위를 한 손에 꿰고 있었다. 그의 벤지 대 백과사전에 따르면, 벤지의 상태는 심각한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는 날이 잦으며, 무엇보다 온 얼굴에 주름을 한가득 만들고 한숨을 푹푹 쉬는 것이 벌써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보였다. 이단은 이렇게 벤지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 방아쇠를 당겼을 때의 묵직함은 아직도 잊어지지 않았다.

이단은 어디 갔지?

괜히 현장요원이 된 건 아닐까?

글락의 무거운 반동이 어깨 위로 진동했다. 그리고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사라졌다.

벤지는 관통하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뒤로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뒷통수에 차가운 전선이 얽혀 들어갔다. 끈적한 점도의 피가 제 주변을 둘러쌌을 때, 벤지는 이단의 목소리를 듣고 끔찍한 악몽에서 반쯤 깨어날 수 있었다. “이단?” 흐릿한 초점을 고정시키려 노력하며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잘생긴 얼굴이 벤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벤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봐요, 현장요원씨. 잠귀가 너무 어두운거 아니야?”

벤지는 아직 꿈속이었다. 이단은 그가 현실로 돌아오기를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벤지는 손을 들어 이단의 얼굴을 더듬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꿈은 촉감이 느껴질 정도로 현실감 있지 않았다. 벤지는 꿈에서 깨어났다. 다시 한 번 제 눈앞에 있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언제 왔어요?”

방금. 삼십 분. 아니, 한 시간 정도 전쯤?”

한 시간이요?”

잘 자고 있어서 깨우기 좀 그랬어.”

벤지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커튼이 쳐져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가늠하기에는 어려웠다. 벤지는 시간을 물어보려다 관두었다. 시간이 몇 시던 무슨 상관이람.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대신 이단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방 안은 바로 눈앞의 것도 분간 못할 정도로 어두웠지만 이단의 눈알은 여전히 빛났다. 그 눈은 벤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생을 계속 할 것처럼.

무슨 일 있었어?”

일이요? 평범하죠.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고. 아니면 가끔 일하고.”

너한테 일어난 일 말이야.”

바보 같아서 말 안 할래요.”

있었구나.”

일이야 맨날 있죠.”

벤지.”

의미 없는 말꼬리 잡기만 여러 번 반복할 때 쯤, 이단이 그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추며 벤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벤지는 불만에 가득 찬 청소년이 으레 그러듯이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진짜 바보 같아서 그래요. 분명 놀릴 걸요. 아니면 IMF 전체에 소문이 다 나던가.”

벤지. 난 너의 상태를 완벽히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어.”

동료로서요?”

아주 잠깐이지만 머뭇거리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애인으로서.”

그렇담 말 할 수 있죠.”

차단 된 시야 덕분에 모든 소리는 민감하게 들렸다. 말을 잇기 전 긴장에 침을 삼키는 소리, 이부자락이 손끝에 스치는 소리, 불안감에 손바닥이 맞닿아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두 개의 심장이 뛰는 소리. 벤지는 어둠에 적응되어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기 전에 눈커풀을 내려버렸다. 차라리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를 바랐다.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가 계속 생각나요.”

거의 말을 던지듯이 뱉었다.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진 말은 예상보다 손 쉬웠다. 생각보다 바보 같지도 않은데? 벤지의 맥박은 백 미터 달리기를 방금 완주한 사람처럼 빠르게 뛰었다. 아기의 투정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었겠죠? 이름도 있었을 게 분명하고요. 이미 죽었으니까 소용없겠지만.”

벤지.”

난 그 때 절박했어요. 이단을 만나기 위해서요. 현장요원 자격을 따면 모든 게 이루어질 줄 알았죠. 물론 사람을 죽이는 건 빼구요.”

벤지는 목마름을 느꼈다.

무엇보다, 두 번째로 죽였던 사람의 얼굴은 기억도 안 나요.”

이단은 말이 없었다. 벤지는 다시 한 번 방 안이 어두운 것에 대하여 감사를 느꼈다. 축 처진 팔뚝을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벤지, 모든 일에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어떻게 부담을 안 가질 수 있겠어요? 난 이단과 같은 팀이라구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 사람도 그랬겠죠. 물론 실패했지만.”

벤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제 목소리에 놀란 벤지는 짧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화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전혀 몰랐어.”

바보 같죠?”

벤지. 나도 팀을 잃었을 때가 있었어. 아직도 가끔 그런 악몽을 꿔. 동료들이 모두 죽고, IMF에서는 나를 쫓고 모두가 날 안 믿어주는 그런 꿈을.”

이단을 알기 전, 벤지는 읽었던 서류 뭉텅이를 떠올렸다. IMF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이단 헌트와 관련된 사건 파일이었다

'BENJIET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0) 2016.09.17
인어이단  (0) 2016.09.11
[벤지이단] 상상  (0) 2016.08.19
[벤지이단] 세이프워드  (0) 2016.08.15
[벤지이단] 사랑의블랙홀  (0) 2016.07.28

사랑의 블랙홀 AU

디팁님 리퀘



벤지는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벤지. 놀라지 말고 들어줘. , 하루가 계속 반복 되고 있어.”

사실, 벤지는 알고 있었다. 이단 헌트는 벤지 던을 우습게 본다. 정확한 사실이 아닐지는 몰라도 사실에 근접했다. 벤지는 마지막으로 그를 좋아하고 믿었던 자신을 마음 속 쓰레기통에 눌러 담은 뒤 코웃음을 쳤다.

좋아요. 이단,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게요.”

벤지의 표정을 본 이단은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물론 벤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단은 자세를 고쳐 잡은 후, 벤지의 어깨위에 손을 얹었다. 꽤 완곡한 몸짓이었다. 이단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벤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넘어갈 뻔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이단 헌트의 표정에.

며칠 째 하루가 반복되고 있어.”

이단, 조금 지친 모양인데...”

이단은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벤지는 이단이 저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려 시도했지만 그만 두었다. 자신은 좀 더 단호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단의 얼굴을 감싼 손바닥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뭐라구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단?”

이단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벤지는 이단의 손바닥을 하염없이 쳐다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벤지는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뭐, 뭐하는 거예요?”

그러게, 벤지.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이단 헌트?”

무례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벤지는 이단의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이단은 순순히 벤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 미안해요. 마스크인줄 알았어요.” 이단은 힘없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벤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몇 달간 쌓아온 현장요원 경력을 모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단은 IMF, 그리고 그가 몇 주간 쫓아온 타깃을 눈앞에 두고 짐을 싸는 도중이었다. 어디로 갈 지는 누구도 몰랐다. 벤지는 느긋하게 캐리어에 옷가지를 넣는 이단을 보며 그 주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벤지. 정신 사나워.”

벤지는 그 말에 걸음을 뚝 멈췄다.

타깃을 포기 하는 거예요?”

아니. 내일 다시 잡을 거야.”

눈치 챌게 분명해요. 도망 갈 거라구요.”

오늘은 좀 쉬고 싶어.”

벤지는 그 말에 결국 작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진짜 이단 맞아요?” 이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캐리어를 닫았다.

이단. 난 안 가요.”

벤지는 단호하게 이단을 쳐다보았다. 이단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벤지를 올려다보았다.

나 혼자 할게요.”

 

 

벤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타깃은 저 쪽에서 나올 거야.”

상황을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하지 말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우리가 원하는 건 정보니까, 타깃을 꼭 죽일 필요는 없어. 절대로 머리는 쏘지 마. 알겠지?”

이단은 손을 떨고 있는 벤지의 손을 맞잡아 준 뒤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와 다른 이단의 모습에 벤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다가, 급하게 총을 다시 고쳐 잡았다.

이단, 오늘 무슨 일이-”

.”

걸음 소리가 들리고, 서류가방을 품에 안은 불안한 모습의 남성이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는 쏘지 마.’ 벤지는 이단의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총을 그의 다리에 겨눴다. 이단이 고갯짓으로 신호를 주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깃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벤지는 총을 허벅지에 꽂아 넣은 체 쓰러진 타깃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단은 벤지를 제지했다.

총이 있으니까 조심해. 대충 오른쪽으로 피하면 될 거야. 우리는 증거품을 가지고 A-3 으로 갈 거야. 증거를 노리는 놈들이 대기하고 있겠지만 피해서 가는 길을 알아.”

벤지는 멍청한 표정으로 이단을 보았다. 이단은 그 표정을 이해한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곧이어 벤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갯짓했다. 벤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타깃과 이단을 번갈아 본 뒤 이단의 지시를 따랐다.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이단은 이 일을 겪은 사람마냥 정확히 그들의 방해요소를 제거해갔다. 민간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증거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벤지는 이 성공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단은 확실히 완벽한 요원이었지만,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이 할 행동을 미리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것을 벤지에게 알려주었다.



이야기는 각자 방에서 자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다. 이단은 차가운 맥주 캔을 양손 가득 안은 체 벤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벤지는 제 눈을 의심하며 도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단에 의해 가로막혔다.

벤지.”

, 그냥 오늘 좀 이상하네. 아니,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얼른 들어와요.”

벤지는 뒷걸음질을 치며 이단이 건네는 맥주를 받았다.

무슨 일 있어요?”

성공적인 임무완수를 위하여.”

, 성공적이긴 했죠.”

캔을 따자 탄산 소리가 들렸다. 이단은 벤지의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벤지는 자신의 방인데도 불구하고 어색한 몸짓으로 이단을 따라 들어갔다. 이단은 남은 한 손으로 침대를 두드리며 옆에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이단,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평소랑 달라서 그래요.”

내가 평소에 어땠길래?”

, .”

벤지는 손에 들린 캔과 이단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단번에 그것을 들이켰다. 목구멍부터 올라오는 기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늘은 진짜 현장요원이 된 기분이었어요.”

벤지는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캔 하나를 들어 마저 땄다.

이단 헌트와 같은 팀을 한다는 거 자체가 경력 없는 요원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인 건 알고 있지만...”

한 모금 더 마셨다.

가끔은, 이단이 모든 걸 해결했잖아요.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항상? 이단 헌트는 벤지 던을 현장요원이 아닌 사무직원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벤지.”

벤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

벤지, 네 말이 맞아.  무의식적으로 너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이단은 민망한지 목덜미를 긁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널 계속 볼 수 있었지. 넌 기억 못하겠지만. 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그걸 고치려고 노력했어. 벤지, 넌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 그걸 안 본 건 나야. 네가 아니라.”

벤지는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이단의 말 대부분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정확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이단 헌트에게 인정 받는 벤지 던. 그가 여태까지 꿈꿔왔던 이야기였으며, 전부였다. 벤지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진 것도 같았다. 이단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 캔을 침대 옆 탁상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벤지.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이단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짝 구겨진 이불보가 그가 앉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벤지의 귓가에서 울렸다. 그 누구의 결심도 아니었다.

안 가면 안 돼요?”

벤지는 여전히 현장요원이었다. 이단이 그것을 깨닫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날 처음으로, 이단은 벤지의 방에서 눈을 떴다.

'BENJIET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벤지이단] 상상  (0) 2016.08.19
[벤지이단] 세이프워드  (0) 2016.08.15
[벤지이단] 스유AU 2  (0) 2016.06.30
[벤지이단] 스유AU  (0) 2016.06.21
[벤지이단] GB  (0) 2016.06.05

사건 파일이 사라졌다.

파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마냥 감쪽같이 없어졌다.

니콜라스는 천천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E-011060. 사라진 사건 파일의 사건 번호였다. 보통 사건 번호는 사건이 접수 된 연도와 각각의 서에서 정해놓은 법칙에 따라 몇 가지의 부호를 조합해서 일련의 번호로 나열해 놓는다. 고작 스치듯이 본 것이지만 파일 정 가운데에 적혀있던 사건 번호는 니콜라스의 머릿속에 정확히 박혀있었다. 그 사건이 접수된 것은 적어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건 외에도 처리 할 다른 일이 많았던 니콜라스는 파일을 잠시 우선순위 밖으로 밀어 놓았다.

분명히 그 때까지만 해도 파일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켄터배리 대학 정치 및 사회학과를 수석으로 졸업 한 니콜라스는 자신이 기억하기로 마음먹은 모든 것 그리고 사건과 관련 된 단서라면 무엇이든지 기억하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단 한 가지, 그 전 날 술을 먹지 않았을 때만 빼고 말이다. 니콜라스는 다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니콜라스는 시점은 술을 먹기 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오후 일곱시 이십사. 조용하고 범죄율이 낮은 동네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경사는 교통 단속은 물론 소매치기나 도둑질 같은 자질구레한 범죄를 일으키고 다니는 잡범들을 잡아 법을 지키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도맡아왔다. 그날따라 속도광들이 한 곳에 모여 집회라도 연 모양인지 교통 단속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성추행범 두 명을 잡아 유치장에 가두어 놓았다. 일을 마치고 경찰서에 복귀한 니콜라스가 시계를 보았을 때는 오후 일곱시 이십사 이었다. 정확히.

현장 외에도 할 일은 많다. 니콜라스는 기동복과 방탄복을 벗어 캐비넷 안에 넣은 뒤 근무복으로 갈아입었다. 현장에서 일이 늦게 끝났기에 할 일은 많이 쌓여있었다. 잡범들의 신원을 등록하고, 유치장을 한 번 둘러본다. 대니가 권하는 초코 케이크는 한 번 정도 거절하고, 결국 거절이 통하지 않아 모니터 앞에 일회용 접시에 담긴 케이크 하나를 둔 체 문서 작성을 시작한다.

오후 여덟시 이십분. 근무시간은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 접수 된 파일들이 니콜라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 간 것도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언제나 자신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빈 파일을 책상 위로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내 사랑스런 동생아!”

젠장. 게리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 한 니콜라스는 책상 위에 머리를 박았다.

근무지에는 왜 찾아온 거야.”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노크라도 할 걸 그랬나?”

어느새 니콜라스의 앞으로 다가온 게리는 파일이 가득 쌓인 책상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나도 경찰서는 지긋지긋 하거든. 근데 천하의 니콜라스 경찰님도 놀라 자빠질 소식을 하나 들고 왔어.”

경찰관이라니까.”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게리의 말에 대꾸를 하다 입을 다물었다. 피곤에 지친 니콜라스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게리의 표정은 매우 신이 나 있었다.

지금 집에 누가 있는줄 알아?”

스테이시?”

, 내가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면 실망인데. 벤지가 왔어. 십년만이지? 아니, 이십년이던가?”

이번에는 게리의 말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연락도 없었잖아!”

잭이 전화로 전해주는 것보다는 직접 듣는 걸 더 좋아할 거라고 그러더라.”

게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정말로 놀라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사건 파일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니콜라스는 다시 머리를 고쳐 짚었다.

지난 밤 형제의 회포를 풀기 위해 술을 위장에 들이 붓다시피 마셨고, 숙취로 절여진 뇌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니콜라스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확실한 건, 외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파일은 책상 위에 그대로 제 내용물을 품은 채로 있었을 것이었다.

대니, 이 근방의 어제 자 오전 여섯시부터 오늘 오전 여섯시까지의 cctv 기록이 필요해.”

 

 

대니는 한 아름의 비디오테이프를 품에 들고 왔다. 니콜라스는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니가 건네어주는 테이프를 받아 실행했다. 오전 일곱 시, 출근하는 니콜라스 경사의 모습이 보인다. 특이한 사항은 없으며 그 뒤를 이어 경찰서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니콜라스는 약간 지루해진 표정으로 비디오의 배속을 높였다.

오후 여덟시까지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게리가 [잔디를 밟지 마시오] 간판을 무시하고 난간을 뛰어넘어 잔디를 밟고 들어 온 것만 빼면. 곧 이어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니콜라스와 게리가 경찰서를 빠져나온다. 열 시 오십 분. 니콜라스는 버튼을 눌러 영상을 느린 속도로 돌렸다.

이게 내가 잘 못 본게 아니라면...”

이 사람 지금...”

하늘에서 떨어진 거야? 니콜라스는 대니의 넋이 나간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다섯 번 정도 테이프를 돌려 보았지만 여전히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인물은 멋진 자세로 데굴데굴 굴러 아무렇지도 않게 경찰서 내부로 침입했다.

아는 사람이야?”

전혀. 얼굴도 알아 볼 수가 없어.”

도둑?”

없어진 게 하나 있긴 해.”

니콜라스는 테이프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제 오후 네 시 경에 접수 된 사건 파일이 분실 됐어. cctv에 잡힌 사람이 단순한 도둑이길 바라는 건 엄청난 우연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이 사람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침입 한 거야.”

어제 접수 된 사건 파일이라면...”

이 사람은 피의자 본인이거나, 공범이거나. 어떻게 됐든 증거 하나 없게 됐으니 일이 복잡하게 됐네.”

- , 이거 어제 내가 문서작업 하던 파일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니콜라스는 대니의 말을 한 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대니는 꽤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한 말을 되풀이하여 말했고, 엔젤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자마자 그가 보일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밝은 표정을 하고 대니를 한 번 꼭 안아주었다.

E-011060. 니콜라스가 근무하고 있는 경찰서의 소재지는 CIA에서 수배 중인 요원 하나의 고향이었다. 빈틈없는 CIA는 그가 칩거할 가능성이 있는 장소 곳곳에 요원의 수배령을 내렸고, 그의 고향에 수배령이 닿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드까지 제거 할 생각은 못했나보군. 망할 자식. 수배자이든, 공범이든 니콜라스는 그 둘을 잡아 CIA에 넘길 것이다. 이를 까드득 깨물며 다짐했다.

수배 중인 요원의 이름은 이단 헌트였다.

 

 

당분간 집에 못 들어올 것 같아.”

바쁜 일이라도 생겼어?”

좀 큰 건수를 잡은 것 같거든.”

... 큰 건수라면?”

“CIA에서 수배중인 범죄자가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 아직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하지. 꽤 위험 한 인물 같아.”

니콜라스는 공범이 있다느니, 수배자가 경찰서 내로 침입 한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확실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니콜라스의 선택은 매우 옳은 것이었다. 벤지는 엔젤이 쫓고 있는 수배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었고, 니콜라스의 집념은 그와 비등할 정도였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이야기였다. 니콜라스의 머릿속을 모르는 벤지는 침을 꼴깍 삼켰다. 퀭한 눈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니콜라스는 벤지에게 있어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벤지는 니콜라스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니콜라. 내가 십 오년 만에 왔는데 변한 게 없구나? 아직도 일에 푹 빠져 살고 있네.”

초조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니콜라스는 거짓말 탐지기보다 무섭다. 아무리 벤지가 지난 몇 년간 거짓말 탐지기와 동거동락 하며 살았다고 해도 니콜라스의 매서운 눈초리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예전에는 더 심각했단 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니콜라스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벤지를 쳐다보았다.

, 서운하다고 해야 되나?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도 모르잖아.”

, 말 잘 했다. 너 그래서 지금까지 뭐하다 온 거야?”

직업병 나온다. 그거 나쁜 경찰 맞지? 난 좋은 경찰이 보고싶은데. ”

말 돌리지 말고.”

벤지는 입을 다물었다. 엔젤은 벤지의 꾹 다문 입술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해결하지 않는다면 더 복잡해질 수도 있는 문제야. 금방 처리할 수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과로사 할 마음은 없거든.”

니콜라스의 단어 선정은 벤지에게 있어서 불길하게 다가 올 뿐이었다. 처리? 벤지가 알고 있는 니콜라스는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아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그 상대가 이단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 너도 혹시 수상 한 사람 있으면 바로 연락 주는 거 잊지 말고.”

벤지는 겨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가 눈치 채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니콜라스는 벤지의 침울한 표정을 쉽게 잡아내었다. 니콜라스는 벤지의 표정이 지루함과 무료함에서 기인한 표정이라 지레짐작했다. 결국 노트북을 닫았다.

나가자. 오랜만에 같이 산책이나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망설이던 벤지는 엔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해서 엔젤의 수사를 미루는 것이 벤지의 첫 번째 목표였다.

 

 

엔젤의 수사를 미루는 것이 벤지의 첫 번째 목표였다. 하지만 상황이 어렵게 되어 버렸다. 벤지는 멀리서 운동이라도 하는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으로 뛰어오는 이단을 발견했고, 반갑게 벤지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단의 모습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벤지는 이단에게 간절한 눈짓으로 안 돼와 비슷한 신호를 보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이단은 벤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주고는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니콜라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니콜라스.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벤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니콜라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단과 벤지를 번갈아 보다가, 이단이 내밀은 손을 뒤늦게 발견하고 악수했다.

소개가 늦었나요? 존이라고 합니다.”

이단의 빠른 판단력에 벤지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수십 번 쳐댔다.

미안해. 일이 끝나면 소개 시켜주려고 했는데...”

아직도 말을 안 한 거야? 서운한걸. 벤지.”

손에 단단히 잡힌 굳은살과 악력이 심상치 않았다. 니콜라스는 이단과 맞잡은 손을 떼고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교통 관리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직업의 특성 상 출장이 잦은데, 이번에 어떻게 제 휴가와 벤지와 휴가가 맞았네요. 아쉽게도 아홉 시간 정도 뒤에는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지만.”

벤지와 같이 왔나요?”

그렇죠. 벤지가 가족들을 소개 시켜준다고 잔뜩 기대 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약속을 못 지키게 됐네요.”

니콜라, 존은 범죄자가 아니야.“

강하게 노려보는 눈에 벤지가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니콜라스는 영 탐탁치 않아보였다.

곧 떠나신다니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은 필요 없겠군요.”

이단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무래도 식사는 나중에 해야 같네요.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 아무래도 잠깐 존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벤지는 니콜라스의 눈치를 살폈다. 니콜라스는 벤지를 한 번 노려봐 주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된 일 이었다.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낯선 이방인, 경찰서를 날아서 들어 온 침입자, 석연찮은 벤지의 표정. 세 가지가 합쳐 얽힌 실타래처럼 니콜라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글로스터셔 샌드포드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한 통속이었던 동네 주민들, 이십 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살인 사건.

랜드 마크 하나 없는 작은 마을에 여행자들이나 외지인이 정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만 해도 니콜라스는 새로운 얼굴을 두 명이나 볼 수 있었다. 혈육인 벤지와, 그의 애인인 존. 아니면 세 명, 또는 네 명일지도 모른다. 니콜라스는 이단의 얼굴을 모르고 존이 이단일 경우도 배재해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 외부 cctv에 찍힌 사건 파일 도난의 피의자가 이단이라는 자일 가능성, 이단이 아니라 제 3자일 가능성 모두.

가족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니콜라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육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의 뒷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존과 반갑게 인사하던 벤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사명과 신념을 생각하며 그 얼굴을 떨쳐내었다.

엔젤은 그 길로 경찰서에 바로 도착했다. 해가 쨍쨍 내리 쬐는 날 덕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한 번 닦고,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 항상 놓여있는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을 작동 시키고. 구석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어 입을 대고 마셨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의자에 앉고 나서야 경찰서가 이상하게 조용함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지만 좁은 경찰서 안에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니? 토마스? 마이크? 근무번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살펴보며 그 위에 휘갈긴 이름들을 하나씩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니콜라스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차여진 권총을 빼어 들었다.

양 손에 힘이 잡히지 않았다. 약을 먹은 것처럼 온 몸은 흐물흐물하게 녹고 시야는 흐릿하게 변했다. 니콜라스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버티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으로 번진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경사님, 정신이 드나요?”

니콜라스는 헛구역질을 하며 눈을 떴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매스껍죠? 근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몸에 해는 없을 거예요.”

여전히 웩웩거리던 니콜라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헛구역질을 하는 것을 멈추었다. 눈두덩이에 닿는 까칠한 재질의 천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뒤로 젖힌 손목은 단단한 밧줄에 의해서 묶여놓았다. 다리는 묶어놓지 않은 모양인지 앞뒤로 움직일 수 있었다. 당황하지 않았다. 쓰러질 때부터 니콜라스는 자신이 이렇게 될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조용히 손목을 움직여 밧줄의 세기를 가늠했다.

“...이단 헌트?”

틀렸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이단 헌트의 파일을 가져간 사람이겠군.”

시야가 차단되니 예민해진 청각은 작은 옷깃이 스치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고무 밑창을 덧댄 운동화가 시멘트 바닥을 밟는 소리, 걸을 때 마다 스치는 얇은 점퍼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니콜라스라고 불러도 되겠죠?”

허락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어요. 니콜라스, 저는 돌려 말 하는 것을 잘 못해요.”

무슨 말을 할지는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이단 헌트를 그만 쫓아요.”

상대방은 무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니콜라스는 그를 도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니콜라스의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니콜라스에게 한 뼘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협박인가?”

니콜라스,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매듭을 풀기 위해 꿈틀거리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니콜라스는 작게 욕을 읊조렸다. 꽤 단단히 묶어 놓았는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죄가 없어요.”

직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에 대해 폭행, 협박을 가하는 당신은 방금 죄가 하나 더 추가됐겠네. , 증거인멸에 관한 죄도 잊으면 안 되고.”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밧줄은 어느 정도 헐거워졌다. 가만히 앉아서 의자와 연결 된 매듭은 손만 움직인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겠지만 강한 충격을 준다면 예를 들어, 누구를 내리친다면. 쉽게 풀릴 수 있을 정도였다. 니콜라스는 그가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오기를 바랐다.

여기서 빠져 나간다면 난 그를 당장 잡아 CIA에 넘길 거야.”

당신이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날 도청하고 있었지?”

한 걸음 더.

자랑은 아닌데, 예전에는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많이 해 본적이 있어요. 도청기 하나 붙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

이단 헌트. 그가 내 동생과 교제를 하는 사실이... 이 사실을 변하게 하지는 않아.”

경사님과 같은 곳에서 일했다면 우리는 좋은 동료가 됐을 거예요.”

가까이 왔다.

그가 니콜라스의 옷깃에 있는 도청기를 떼기 위해 손을 뻗을 때, 니콜라스는 다리에 온 힘을 실어 그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니콜라스는 곧이어 어깨로 그를 강하게 밀어내었다. 바닥에 넘어진 모양인지 둔탁한 소리가 건물 안을 울렸다. 몸을 돌려 의자와 함께 그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녹이 슬은 철제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스는 갑자기 끼어 든 불청객들에 의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엎어졌다.

한 쪽 손이 자유를 찾았다. 니콜라스는 눈을 가린 천을 벗어 던져버렸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은 최대한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동공을 이완시켰다.

니콜라스의 눈앞에는 존, 그러니까 이단이 두 명이었다

그 중 하나의 옆에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벤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니콜라스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로이!”

이건 이단의 목소리였다.

내가 해결한다고 했잖아.”

지금 이게 네 눈에 해결하는 걸로 보인다면, 그 정의를 다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엔젤, 괜찮나요? 니콜라스는 제 자신이 혹시나 약물 따위의 것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나란히 서있는 셋을 확인했다. 저를 걱정하며 팔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밧줄의 매답을 풀어주는 사람은 이단 그리고 삐딱하게 선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괴한의 이름은 로이, 잔뜩 울상인 얼굴을 하고 있는 벤지.
벤자민 던. 니콜라스는 벤지를 노려보았다. 잔뜩 날이 선 눈매에 벤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로이가 당신과 이야기를 한다고 나갈 때 그를 말렸어야 했는데.”

대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형도 알잖아?”

니콜라스에게 소용없는 위로의 말을 건네던 이단이 로이의 투정에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니콜라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젠장,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니콜라스는 눈앞의 이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범죄자 둘과 니콜라스가 가장 아끼는 사람 중 한 명인 벤지. 벤지는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벤지는 니콜라스의 신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사형제 중 니콜라스를 가장 잘 따르는 것도 벤지였다. 벤지는 자신의 꿈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니콜라스를 존경했으며 그가 CIA에 지원을 하고 IMF에 입사하게 된 일도 니콜라스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벤지가 니콜라스를 속이고 그를 위험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니콜라스의 배신감과 벤지의 죄책감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이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벤지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벤지.”

그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행위였다. 행위 안에는 수많은 격려와 뒤섞인 감정이 들어있었다.

벤지,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형을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

이게 다 우연이라고 말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단은 누명을 쓴 거야.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당장 말 하려고 했어.”

니콜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그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못해. 하지만 니콜라, 믿어줬으면 좋겠어. 이단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벤지, 너야말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는 이미 잔뜩 무너져있었다.

 

 

니콜라스가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웃기지도 않은 벤지와 이단의 변명을 듣고, 마지막으로 로이의 사과를 들은 니콜라스는 말없이 장소를 떠났다. 뒤에서 벤지가 니콜라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끝까지 쳐다보지 않았다.

십몇 년 만에 만난 형제의 말로가 우스운 꼴이 나버렸다.

니콜라스는 경찰서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그 근처에 있는 작은 펍에 들어갔다.

경찰 오셨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장의 말에 니콜라스는 예의 경찰이 아니라 경찰관이에요. 라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맥주를 건내는 사장에게 돈을 주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 없다.

뭐해?”

, 잠깐만요.”

니콜라스는 급하게 안주머니를 뒤졌지만 돈은 여전히 나올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잃어버린 것 같다고 짐작했다. 사장은 맥주가 넘칠 정도로 담긴 잔을 흔들어댔다. 니콜라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장과 맥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에서 돈을 쥔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로이?”

불길한 이름을 불렀다. 말 그대로였다. 니콜라스는 생글생글 웃는 로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 여기 경찰서 앞인 건 알죠?

물론이죠.”

제가 당신을 바로 유치장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카운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니콜라스는 맥주가 담긴 잔을 들고 절반 가까이를 위 속에 들이 부었다.

천천히 마셔요. 당신 술 못하던데.”

언제부터 감시하고 있었죠?”

수배서가 책상 위에 있을 때부터. 사실 그 전부터 파일을 없애려고 했는데 생각 외로 당신 친구가 일을 잘 하더군요. 내 실수였어요.”

니콜라스의 잔은 금방 비워졌다. 로이는 맥주를 두 잔 더 가져왔다.

이단과는 형제인 건가요?”

당신과 벤지처럼.”

니콜라스는 로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약을 먹인 건 정말 미안해요.”

술집은 시끄러웠다. 각자 할 말들을 크게 내뱉고 있었고 술집에 있는 모두가 니콜라스와 로이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니콜라스는 로이가 들고 온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니콜라스는 여태까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벤지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꿈이나 신념, 그런 것들. 파릇파릇한 얼굴로 CIA에 취직을 하게 됐다고 기뻐하는 벤지가 엊그제 같았다. 그런 벤지가 몇 십 년 만에 와 니콜라스에게 준 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인 거짓말과 범죄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벤지가 아닌 상실감, 니콜라스는 로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벤지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면 더 심한 짓을 할 각오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 빈 잔이 여러 개 놓였다. 니콜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단은 이곳에 계속 머무는 건가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떠났어요.”

해결?”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좀 더 떳떳한 모습으로 당신과 인사 할 수 있겠죠.”

 

 

이틀 째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 니콜라스의 모습을 보며 마이크와 대니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놓고 있었다. 드디어 엔젤 경사가 스파트필름 대신 사람과 교류를 시작 한 걸까? 아니면 스파트필름이 죽어서 그 상실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점심시간 막판을 이용하여 니콜라스를 코앞에 두고 숙덕이는 둘은 이렇다 할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그 둘이 제 모습을 안주삼아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았지만 말릴 기운도 없어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라진 파일은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자물쇠로 잠그어 놓은 뒤 열쇠는 캐비넷 깊숙한 곳에 넣어 놓았다. 이단이 돌아오면 찾을 작정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에 힘이 없었다.

엔젤 경사님. 엔젤.”

대니가 니콜라스를 불렀다. 니콜라스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체 대충 대답했다.

... 누가 찾아왔는데.”

불길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사님, 당신과 일을 하면 좋은 동료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반가워요.”

그 얼굴을 보는 니콜라스의 황당한 표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젠장, 어제 있었던 일이 니콜라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중간 중간 기억에 빈 공간이 있었지만 기억하기 싫은 것은 아주 잘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걸을 힘도 없어서 휘청 거리는 다리를 로이가 부축해주며 집에 데려다 줬던 것도, 놀라던 벤지의 모습도.

무슨 일 입니까?”

어제 술 먹고 제 옷에 토 한 건 기억 안 나나보죠?”

니콜라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농담이에요.."

'CORSSOVER > 펙톰사형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잭데이빗] 초대 1  (0) 2016.12.26
[게리스테이시] 피아노  (0) 2016.03.07
[잭데이빗/벤지이단]  (0) 2016.02.25
[엔젤로이/게리스테이시]  (0) 2016.02.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