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이는 불길에 예상은 했었지만. 집 안에 가득 찬 연기와 맞닥트렸을 때, 찰리는 제일 먼저 이것이 특수효과가 아닐까를 의심했다. 한참동안이나 상황을 살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한 체 가만히 서서 헛된 시간을 보냈다. 타는 냄새와 함께 싸구려 귀신의 집 바닥에 깔린 고체 이산화탄소에서 터지듯 나오는 수증기가 발목에 닿을 때쯤에나 찰리는 다시 현실 감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그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탈출은 한 걸까?


불에 타 죽는 법은 아주 많았다. 더 나가지 않아도 연기에 질식해 죽는 방법도 아주 많았고. 찰리는 불과 관련 된 죽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철저함을 강조하는 의뢰인은 일처리가 전문 킬러의 소행이 아닌 단순한 사고로 위장되기를 바랐고 언제나 그랬듯이 찰리는 돈이 되는 일은 기분 좋게 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휘발유를 잔뜩 몸에 묻히고 잠에 취한 타겟의 위로 담뱃불만 던지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타기 좋은 재질로 되어있는 커텐이나, 원목 탁자가 있으면 더 쉬운 일이었다. 대부분 그들은 돈을 처바른 넓은 집에서 도움도 되지 않는 경호원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고는 했으니 조건은 어느 정도 만족 된 셈이었다. 그렇게 불을 질러놓고 그 장소에서 빠져 나가면, 며칠 내로 지역 신문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연기에 질식해 죽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찰리의 집 또한 그들의 집과 비슷한 환경이라는 것 또한 안타까운 점이었다. 제기랄. 집에 대한 걱정은 뒤로 미뤄두고 그가 있을 방으로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문고리는 이미 열기에 달아오른 쓰잘데기 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찰리는 욕을 짓씹으며 있는 힘껏 문에 몸을 들이 박았다. 문 대신 몸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얼얼한 어깨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몸을 부딪치려 했을 때, 그의 노력이 무상하게도 이 불을 지른 장본인에 의하여 문은 쉽게 열려버리고 말았다.



 

집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슈타우펜이 홀랑 태워먹은 집은 어차피 아주 잠시 동안 머물던 곳이었고, 보석과 금은 따로 보관하는 곳이 있었기에 커다란 손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찰리는 속에서 들끓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수고를 들여 제정신이 아닌 슈타우펜을 끌고 임시 거처에 밀어둔 자신의 수고가 고생스럽게 느껴서도 아니었다. 찰리는 애꿎은 벽에 총을 몇 번 갈겨주고 나서야 대화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이성이 돌아왔음을 느꼈다.


내가 잘못했네.”


슈타우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손가락밖에 없는 손바닥은 한계점까지 오른 고철덩어리를 덥썩 만져버린 탓에 살가죽이 다 까져 있었다. 약 기운이 가시자 서서히 고통은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통은 이성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과 함께 분노한 찰리를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약에 존나게 취해서 불을 지르고, 한가하게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와서 한다는 말이 잘못했네.’ 라고?”


슈타우펜은 찰리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그는 아직도 방바닥이 아닌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매달려있는 바로 앞은 낭떠러지라서, 집을 집어 삼킨 화마보다 더 무섭게 화를 내고 있는 찰리를 피해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손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슈타우펜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찰리는 악을 지르며 방 안을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이제 더 이상 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수없이 한 말이지만 그를 잡고 있던 건 찰리였다. ‘내가 나가서 아사를 하거나 동사를 해도 어차피 남일 뿐일세. 자네는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하면 돼.’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남이다. 우리 관계는 무엇이지? 몇 번이고 목숨을 빚졌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 히틀러가 지배한 독일의 예비군 참모이자, 왼쪽 눈과 손가락 두 개, 오른손 하나가 없는 전직 대령. 이제는 약에 취해 집에 불을 지른 약쟁이. 슈타우펜은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도록 잘려진 손가락에 새겨놓았다.


집에 불 지른 것도, 약에 손을 댄 것도 모두 내 의지였네. 하지만 날 이제까지 살려둔 건 자네야. 난 울프, 자네가 나에게 어떠한 처벌을 한다고 해도 달게 받아들이겠네. 더 이상 불을 지르지 못하게, 약을 먹지 못하도록 나머지 손가락을 없애버리는 것도 좋겠군.”


결국 고통을 이겨버렸다. 슈타우펜은 독일어가 섞인 엉망인 문장을 토하듯 뱉어버렸다. 실제로 토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이후의 일은 기도에 토사물이 들어가 질식한 후 꾸는 꿈일지도 모른다.


설마 살인은 싫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강하게 목을 조르는 손길을 느꼈다. 슈타우펜은 저릿저릿하게 풀리는 사지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 느낌이라면 오른 손으로 글씨라도 쓸 수 있겠어. 눈꺼풀이 덜덜 떨리며 의식이 멀어졌다. 타격이 많이 간 체력은 살짝만 손을 데도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슈타우펜은 어두운 공간 속 떠오르는 것이 니나가 아닌 찰리의 얼굴이라는 것에 실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슈타우펜이 눈을 떴을 때는 깨끗하게 갈아입혀진 옷과 함께였다. 왼 손에는 붕대도 감겨져 있었다.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군. 딱히 상대를 정해놓고 하는 타박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는 아세트아미노펜계열의 알약과 함께 휘갈긴 필체로 글씨가 적힌 돈 뭉텅이가 있었다. 나중에 덮쳐올 속쓰림보단 당장의 고통이 중요했다. 슈타우펜은 급하게 알약을 털어 삼킨 뒤 찰리가 남겼을 것이 분명한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생각이 있다면 도와줄게. 3시까지 주소- 로 와.

물론 안 와도 됨.

 

그 와중에 다리도 다친 것이 분명했다.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택시를 잡아 기사에게 찰리가 적은 주소를 말해주었다. 택시는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에서 슈타우펜을 내려주었다. 찰리의 예민한 성격 상 그는 번화가에 거처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택시가 내려준 곳은 예의상 한적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빌딩숲 속이었다.


이봐.”


슈타우펜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왜 놀라는 거야? 원해서 왔으면서.”


찰리는 슈펜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성큼성큼 슈타우펜을 앞질러 걷다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걸음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속도를 늦춰주었다


멀쩡한 게 하나도 없군.”


찰리는 심통스럽게 말을 한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몸짓으로 슈타우펜을 부축했다. 슈타우펜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딘지 모를 주소와 건물, 어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찰리의 태도.


대령, 히트맨 일이 왜 좋은지 알아?”


뜬금없는 질문까지. 슈타우펜은 복잡한 머릿속에 질문을 받을 여유는 두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찰리는 지친 모양인지 제멋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돈이 썩어빠지게 많다는 점이지. 돈이 많다는 건 말이야, 집을 몇 번이고 태워먹어도 괜찮다는 뜻이고. 어제 일은 별로 화 낼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야.”


사람이 없는 모양인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빠르게 문이 열렸다.


원한다면 약도 계속 할 수 있어. LSD, 코카인, 헤로인... 난 싸구려 약은 취급도 안 한다니까.”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목적지는 팔 층이었고 지금은 육 층이었다. 육 점 삼분에 일 층. 찰리는 팔 층에 다가갈수록 초조하게 말에 속도를 붙였다.


, 씨발. 이게 아니라... 내가 여태까지무관심했던거미안하고좀더신경쓸게. 상담은 이주일에 한 번이야. , 다 왔다.”


찰리는 머리를 헤집으며 말을 하다가 멍하니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슈타우펜을 내버려 두고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슈타우펜은 갑작스레 밀려온 정보 덕에 머리에 과부화가 걸린 체 가만히 서있던 참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본 찰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싫어?”

싫다기보다는... 너무 빠르게 말해서 못 알아 들었네.”

상담! 적절한 약물치료와 꾸준한 상담이 필요하다고 넌. 그리고 나도.”


찰리와 어울리지 않는 상식적인 어투였다. 찰리는 닫히기 위해 애를 쓰는 문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누가 더 많이 변한 건지는 자기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선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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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면, 어떤 길을 선택하겠어? 그 질문에 벤지는 눈알을 굴리며 꽤 시간을 들여 대답했던 것 같았다. 일단은 안전한지를 살펴봐야겠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보라는 말도 있잖아요. 상대방은 간단한 추임새를 내고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선택 했을 때 무엇을 잃는지도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던 것 같다. 경험으로 배웠던 건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뼈가 빠지게 굴러왔던 현장에서 배운 것? 단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대답은 필요했다. 그 때쯤 결심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실 결심 따위를 했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이야기다. 어설픈 한숨 소리만 빠져나올 뿐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내게 선택을 할 권리는 있는 걸까요?

이 대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이 익숙하지 않아?

그러게요.

다시 한 번 선택을 했다.

 

 

, 무슨 일이 있었나보네.”

 

지구가, 세계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이 망한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 황폐화 된 도시 위에서 제일 첫 번째로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슬프거나, 놀랍다는 생각 따위는 나중에 찾아왔다. 언젠간 이럴 줄 알았어. 항상 보던 것이었다. 세계를 정화하겠다고 설치는 광신도들, 막대한 자금을 손에 쥐고 흔드는 악당들, 세계정부의 손에서 무분별하게 생산되는 핵폭탄 따위의 무기들. 우려하던 일이 터진 것뿐이다. 벤지에게 있어서는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제까지 실패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패는 예견되어 왔었고, 벤지는 실패를 막을 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단이라면 다르겠지.


이단 헌트. 벤지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름과 동시에 불안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단이라면 그 실패를 눈앞에서 직접 보았을 것이다. 가로등이 바닥에 처박혀있고, 콘크리트 바닥은 알 수 없는 파편에 의해 반으로 갈라지는, 그 속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도. 이단은 제일 먼저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이단은 해결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은 희망이었다.

벤지의 주 분야는 해킹이었다. 동시에 이 시점에서는 제일 필요가 없어진 분야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과 온갖 기기들의 버튼을 눌러 확인했지만 역시나. 멸망한 세계에서 전파가 통할 거란 생각을 했다니. 안일했다. 바닥으로 던진 노트북을 발로 대충 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웠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었다. 손을 뗄 용기가 없었다. 이단은 살아 있을까. 그는 어디에 있을까. 내가 그라면 세계가 망한 것을 보고 제일 먼저 어디에 갈까?

 

꿈이었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오는 길에 시체 몇 구와, 알 수 없는 출처의 덩어리를 물고 달아나는 쥐새끼 몇 마리만 보았을 뿐이다. 총을 허릿춤에 찔러 넣은 체로 단단히 무장하고 나온 것이 머쓱할 정도였다. 벤지의 걸음이 멈춘 곳은 IMF 내에 존재하는 지하벙커였다. 커다란 철문은 누가 들어간 흔적을 보여주듯 반쯤 열려있었다. 지문이나 홍체 인식기는 이미 고철이 된지 오래였다. 문이 열려있다는 뜻은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경계가 필요했다. 벤지는 손에 쥔 총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걸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벽이나 바닥에 커다란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우당탕. 듣기 싫은 소리에 벤지는 인상을 썼다. 아니면, 몸싸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벤지의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걸음 소리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들리는 소음에 묻혀버렸다. 벤지는 뛰기 시작했다.

 

이단!”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에 환호성을 질렀다. 멸망한 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기쁨은 더 오래 갔겠지. 그건 이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고철덩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벤지에게 다가갔다. 그 다음은 포옹이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이단의 포옹을 받던 벤지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자 그의 양 볼을 잡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이단이 두 번째로 꺼낸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말이 끝나자마자 벤지는 무심코 그의 눈꺼풀을 뒤집어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탁한 부분은 없고 초점도 잘 맞는다. 맑고 또랑또랑 한 것이, 평소의 이단과 같다. 이단은 벤지의 반응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 그의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말투만 듣고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떻게요?”

이 기계를 사용해서.”

 

이단이 가리킨 곳에는 군데군데 부품이 비어있는 추레한 고철덩이가 있었다. 안 그래도 없었던 현실감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벤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타임머신?”

정확히 말하면 다르지만.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

비현실적이네요.”

나도 알아.” 들어본 적 없는 낮은 목소리였다. 벤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기계는 내 전문이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이단.”

그 말을 들은 이단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 날 밤부터 작업이 시작했다.

 



이단이 며칠 째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지 않았다? 우스운 말이 틀림없었다. 벙커는 집이 아니었다. 이단이 며칠 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벤지는 초조하게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이단이 희망을 걸고 있는 기계를 좀 더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벤지는 이단을 믿고 있었기에 이 말도 안 되는 희망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낭비 할 시간이 없었다. 이단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벤지가 이단의 몫을 해야 될 때였다.

부품을 채워 넣어 거의 완성 된 기계는 현실의 물건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놀라운 성능을 보여줬다. 기계의 핵심 능력은 단 하나였고, 독보적이었다.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 드라이버를 들고 기계 앞에서 설치던 벤지는 전류가 흐르는 전선의 피복에 손가락을 뎀과 동시에 드라이버를 떨어트렸다. 바로 기계의 성능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결을 따라 피부가 재생이 됐다. 화상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동시에 떨어지지도 않았다는 것 마냥 드라이버는 여전히 벤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매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이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IMF 내에 이런 물건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단이 이것을 어떻게 찾아낸 건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실행조차 하지 않은 기계의 위력이 이 정도라면, 부품을 모두 채워 넣는다면 그의 가설은 성공할 것이 분명했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헛된 희망이 아니었다.

 

 

 

이단이 돌아왔다.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말이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운 뒤 마지막 부품들을 벤지에게 건넸다. 벤지의 손에 검붉은 피가 옮겨 묻었다. 손바닥에 묻은 이단의 것이 분명한 혈액을 확인한 벤지는 발이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의 끝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줘. 벤지.”

 

마지막 말이었다.

벤지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이단의 뜻을 이루는 것. 이단이 했어야 되는 일을 하는 것. 마지막 부품을 끼워 넣은 벤지는 망설임 없이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버튼은 눌리고, 시간은 되돌아 갈 것이다. 이단이 원했던 대로. 모든 해결책이 과거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 마냥. 과거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세계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단은 살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건 바뀔 것이다. 작은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곧 희망에 의해 짓밟혀버렸다. 벤지는 다시 망설임을 버리고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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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아침 식사를 차리기 전에 벤지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직 꽃을 맺지 않은 줄기와 다육이 화분에다 물을 주는 일이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바로 옆에 있는 분무기를 들어 물을 채우고, 화분에 평편하게 쌓인 흙바닥에 물을 몇 번 뿌려준 뒤 줄기에는 꽃망울이 얼른 피기를 기다리며,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대하며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화분들을 옮긴 다음 창문을 열어 함께 바람을 쐬는 것 까지. 이것이 바로 바른 생활의 본보기 같은 아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용도를 마친 분무기를 화분 옆에 내려놓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다육이가 문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상 없이 푸르던 이파리에 점박이처럼 검은 무늬가 찍혀있었다. 손가락으로 이파리를 쓸어 확인해 보니 검은 것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잠깐 그 앞에서 고민하던 벤지는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키워드를 따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봐도 달마시안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만 나올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단은 휴대폰을 들어 이파리의 상태를 사진으로 남겼다. 이 문제를 아주 손쉽게 해결 할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사실, 벤지는 오히려 이 원인모를 반점이 생긴 것을 기회로 그에게 말을 한번이라도 더 붙일 수 있다는 사실에 설래하고 있었다.



 

실례할게요.”

 

퇴근만을 기다렸다. 벤지는 퇴근 할 시간이 되자마자 겉옷을 챙겨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갔다. 몇 주간 얼굴을 열심히 보인 덕에 단골이 된 가게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는 종이 경쾌하게 울렸지만 가게 안은 조용했다살짝 좁은 입구 안으로 몸을 들이 밀자 텁텁한 흙냄새가 퍼졌다. 눈높이에는 커다란 잎사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위로 올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가게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깊숙한 곳, 그가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장소는 가게 한켠에 딸린 비닐하우스였다. 생각과 동시에 멀리서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벤지는 비닐을 옆으로 재끼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기다란 호스를 들고 있는 그가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으로 놀란 얼굴을 하고 벤지를 돌아보았다.

 

인기척이 없어서 온지도 몰랐네요. 반가워요.”

 

가게 주인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벤지는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 그는, 이단은, 새파란 식물들에게 둘러싸인 이단은 정말 넋을 놓고 바라볼만했다. 무엇보다 물이나 흙 따위를 묻히지 않기 위해 이단이 착용한 해바라기가 그려진 앞치마까지. 벤지는 실없이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음흉한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허공을 바라보며 이 곳에 온 이유를 생각해내기 위해 애썼다.

 

, 그 앞치마...”

.”

 

애만 썼다는 뜻이다. 이단은 머쓱하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앞치마에 군데군데 묻은 흙을 털어댔다.

 

안 어울리나요?”

아뇨! 저도 마침 앞치마가 필요했는데 그 디자인이요. 참 귀여워서 가지고 싶어서요. , 그러니까. 잘 어울린다구요.”

 

벤지는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고마워요.”

그건 그렇고, 저번에 샀던 식물에 문제가 생겨서요.”

 

화제 전환이 필요했다. 벤지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에 들어갔다.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을 누르니 오늘 아침에 찍은 다육이 사진이 있었다. 최근 들어 특별히 물을 덜 주거나, 더 주거나 다른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증상을 보인다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 말을 곰곰이 듣던 이단은 사진을 보기 위해 벤지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벤지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너무 긴장한 티를 내는 것도 바보 같아 보이니까. 이건 그냥 평범한 대화일 뿐인데 말이야.

이렇게 가까이서 이단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다. 아무래도 식물과 부대끼고 살다보니 좋은 공기를 많이 마시고, 그밖에도 모를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잘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이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드폰 액정에 가까이 갔던 얼굴을 들어 벤지를 쳐다보았다.

 

벤지, 혹시 항상 창문을 열어놓나요?”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에 닫아요.”

예민한 친구네요. 이 점 보이죠? 공기 중에 타고 온 병원균에 감염 되어서 생긴 거예요. 약 좀 바르고 흙만 갈아준다면 시드는 거 없이 잘 자랄 거예요.”

 

말을 마친 이단은 찬장에서 작은 플라스틱 통을 벤지의 손에 쥐어주었다.

 

관심 없으면 발견하기 어려운데, 잘 돌봐주고 있는 거 같아서 보기 좋네요.”

식물에 관심이 많아서요.”

 

정확히는 몇 주 전, 최근에 생긴 관심이었다.

 

돈은 안 받을게요. 걸리기 힘든 병인데, 여기서 산 친구가 병에 걸렸으니까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벤지는 이단이 건네주는 비닐봉지에 담은 흙을 받았다. 한 손으로 지갑을 꺼내기 위해 끙끙대니 들은 말이다.

 

그래도 약이랑 흙까지 챙겨주셨는데...”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자주 오시기도 하고. 고마워서요.”

, 이단. 그럼 이따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급하게 튀어나온 말은 싸구려 플러팅과 다를 바 없었지만 벤지는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단은 흔쾌히 승낙을 했고, 벤지는 확실히 이것이 기회가 맞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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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의 품에 가득히 안겨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눈동자를 봤을 때, 찰리는 그 작은 짐승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 저거 웬 거야?”

귀엽지 않나? 보다시피 강아지일세. 강아지라고 하기는 조금 큰 것 같기도 하지만.”

 

클라우스의 해답은 찰리가 원한 답이 아니었다. 사실 찰리는 작은 짐승의 품종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출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귀에 검정색과 하얀색의 무늬를 지닌 개는 한술 더 떠 찰리를 향해 컹컹대며 짖었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허벅지 한 가득을 차지하고 있는 개의 귀 사이와 등허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털 사이로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쁜 사람은 알아보는 모양이야. 그렇지?”

나 개 알러지 있어. 당장 쫓아내.”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클라우스는 밤마다 맡던 개 비린내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뒤늦게 찰리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알아채고 머쓱하게 클라우스와 개를 번갈아 보았다. 개는 안정이 된 모양인지 찰리를 힐긋 보는 것 빼고는 더 이상 짖지 않았다.

 

길을 잃고 이 곳까지 따라왔더군. 잘생긴 것이 품종도 있어 보이는 개 같고. 분명 주인이 있을 거야. 주인을 찾을 때까지 여기서 맡아주는 게 좋겠어.”

 

찰리는 자신이 온 이후로 클라우스의 눈길이 계속해서 개에게 가 있는 걸 눈치 챘다. 한 쪽짜리 눈으로 얼마나 다정하게 개를 쳐다보는지. 누가 보면 주인인줄 알겠네, 알겠어. 중얼중얼 질투를 속으로 삼킨 찰리는 드디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 올 생각을 했다.

 

원래 개를 그렇게 좋아했었나?”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클라우스는 입을 다물고 말을 골랐다.

작게 한숨을 쉬는 듯싶더니 곧이어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내 아들이 항상 개를 키우고 싶어 했지.”

 

클라우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과 표정은 찰리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약간의 침묵 끝에 찰리는 손사래를 쳤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찰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클라우스는 안심하며 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잘 다듬어진 발톱이 바닥을 기분 좋게 긁었다. 개는 새로 등장한 얼굴의 채취를 기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찰리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바짓단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찰리는 허리를 숙여 개와 눈을 마주치고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너 내가 누군지 알면 이러지 못할걸.”

 

새까만 눈은 찰리의 말에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이어 찰리의 말을 무시하고 그의 얼굴을 핥았다.

 

난 이래서 개들이 싫어.”

엄밀히 말하면 자네도 개과가 아닌가.”

난 특별하다고.”

그래.”

진짜라니까.”

알겠다고 했네.”

 

찰리는 멈추지 않고 툴툴거렸다.

 

개 밥은 줬어?”

물론. 자네가 오기 전에 사료를 사왔어. 자넨 먹었나?”

아니.”

난 먹었으니 알아서 챙겨먹게.”

 

클라우스는 밖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를 복도에 던지며 그것을 개가 물어오기를 기다렸다. 꽤 훈련이 잘 된 모양인지 개는 단번에 나뭇가지를 주워 클라우스에게 가져다주었다. 놀고들 있네. 찰리는 걸치고 있던 자켓을 집어던지고 부엌으로 갔다.

 

옷은 옷걸이에 걸어야지.”

 

뒤에서 들리는 클라우스의 잔소리는 귀를 긁으며 무시했다.

찰리가 대충 끼니를 때우고 나올 때까지 클라우스는 개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앉아. . 엎드려. 명령을 하니 말도 단번에 알아듣는다. 훈련이 잘 된 모양이 틀림없었다. 클라우스가 개에게 간식을 보여주자 개는 단번에 그의 얼굴 위로 폴짝폴짝 튀어 오르며 간식이 잡혀있는 손을 마구 핥아댔다.

 

당장 개 주인을 찾는 전단지를 만들어야겠어.”

그러게나.”

사진 좀 찍게 비켜봐.”

 

찰리는 괜히 큰 소리로 둘의 사이를 방해했다.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는 마지못해 잠시 개와 떨어졌다. 결국 클라우스의 손을 침 범벅으로 만들어놓고 간식을 얻어먹은 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찰리에게 사진이 찍혔다.

사실 클라우스는 아까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변을 맴도는 찰리를 눈치 채고 있었다. 방법이 어찌됐든 이 개가 주인을 빨리 찾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지. 남을 속이는 직업을 하고 있는 자가 저렇게 표정을 숨기지 못할 줄이야. 클라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개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짧게 지켜보던 찰리는 전단지 작업을 하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완성 한 전단지를 들고 온 찰리는 전단지 몇 부를 클라우스에게 보여주며 당장 밖으로 나가서 뿌리고 오겠다고 말했다.

 

너무 늦지 않았나?”

이봐, 이 녀석의 주인이 분명 얘를 애타게 찾고 있을 거라고.”

 

빨리 다녀오겠다며 찰리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어지간히도 싫나보군.”

 

어느새 동그랗게 몸을 말고 숙면에 들어간 개를 보며 중얼거렸다.

 



 

바로 다음 날 개의 주인은 사례금을 들고 클라우스와 찰리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의 손에 들린 큰 액수에 찰리는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돈을 받으려고 했지만 클라우스의 만류에 결국 사료 값만 받고 주인과 개를 돌려보냈다.

 



 

클라우스는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찰리라면 문을 열고 들어올텐데. 아니면 찾아올 사람이 있나? 마을과 동떨어진 곳까지 굳이 시간을 내어 찾아 올 사람은 없었다. 찰리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 빼고는. 짧게 생각을 마친 그는 서랍에서 총을 꺼내 등 뒤로 숨기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작은 틈 사이로 새카만 주둥이가 문을 열어 재꼈다. 커다란 덩치에 클라우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총은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려 날아갔다.

 

울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건만 늑대의 모습을 한 찰리는 사람 말을 듣지 않기로 결심이라도 했는지 클라우스의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킁킁대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콧잔등이 클라우스의 온 몸을 훑었다. 건강함의 표식인 축축한 코 덕분에 클라우스는 온 몸이 간지러웠다. 클라우스는 결국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온 몸에 힘을 풀고 그의 빳빳하게 선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의중을 알 수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클라우스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은 건지 모르겠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위에서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는 찰리를 건드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사실 예상이 가는 게 하나 있었다. 그래도 설마. 애도 아니고. 클라우스는 결국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개 때문인가?”

 

주둥이를 막는 뭉툭한 손목을 핥던 찰리는 자신의 귀에 박힌 단어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뭐라 항변을 하고 싶은 모양인지 컹컹 짖는 소리를 낸다. 클라우스는 웃음이 나려는 걸 겨우 참으며 헛기침을 해댔다.

 

, 물론 자네도 자네 나름의 매력이 있다네.”

 

아마 사람이었으면 능글맞게 맞받아쳤겠지만, 아쉽게도 찰리는 늑대의 모습을 벗어날 생각이 아직은 없는 듯싶었다.

 

저녁은 먹었나?”

 

그 물음에 찰리는 드디어 클라우스의 위에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 그저께 먹다 남은 고기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냉장실에 넣은 고기가 있는 걸 기억해낸 클라우스는 찰리를 위해 고기를 꺼내주었다. 찰리는 클라우스가 던져주는 고기를 열심히 씹어 먹었다. 아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씹지도 않고 삼키느라 목덜미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늑대 흉내를 낼 건가?”

 

찰리는 고기에게서 주둥이를 떼고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주둥이에 묻은 고기의 살점을 혀로 낼름 집어먹은 찰리는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클라우스는 그가 그로 변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을 살짝 감았다 뜨니 건방진 자세로 다리를 꼰 찰리가 앉아있었다.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벌거벗은 찰리에게 그의 옷을 던져 준 클라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대령님. 비위 맞춰주느라 죽겠다니까.”

내가 할 말을 그대로 하는군.”

어련하시겠어.”

 

곧이어 찰리는 자신은 생고기보다 익힌 고기를, 닭고기보다 돼지고기가 좋다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클라우스는 익숙하게 그의 말을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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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가장 예산이 적게 들며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그들에게 훈장을 내리는 것이었다. 전쟁이 심각한 국면을 띌 때마다 히틀러는 예산서의 한 귀퉁이에다가 명예로운 자들을 위한 훈장의 값어치를 조금 더 매겨 내리고는 했다. 죽은 자들의 훈장. 반편이가 된 몸뚱아리를 위한 훈장. 죽음의 표식이 새겨진 훈장. 나치의 훈장. 그것들을 집어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눌러냈다. 금테가 둘러진 훈장 위를 세 손가락을 쓸어보았다. 매끄럽고, 그 매끄러운 촉감은 나를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새하얗게 다려진 정복을 갖추어 입었다. 수돗물로 깨끗하게 씻은 보조물을 왼쪽 눈알에 끼웠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딱딱하게 서 있는 부하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준비가 다 됐으니 들여보내게.”

 

기름칠이 되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두 쌍의 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마스, 지미, 찰리. 원래는 세 명의 군인이 작전실 안에서 훈장을 받을 계획이었지만 결국 이곳에 들어온 것은 두 명뿐이었다. 지미는 극심한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로 인하여 작전실에 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전형적인 독일계 청년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성년이 되자마자 입대를 결심했고, 지난주에 있었던 폭격의 파편에 맞아 영원히 다리 한 쪽을 절게 된 불쌍한 청년이었다.

 

귀관은 저번 전투에서 훌륭한...”

 

전투라기에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독일군이 입은 피해는 아주 컸다. 그 지옥과도 같은 폭격 속에서 살아온 것은 기적이라고밖에 표현 할 수 없었다. 뻔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그의 오른쪽 가슴에 달릴 훈장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불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찰리. 그는 이 작전실에 있는 사람 중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류에 쓰인 국적도, 정체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게 돌아가지 않는 독일군은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제일 멀쩡했다.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잘 다듬은 콧수염에, 상황과 어울리지 않은 여유 있는 미소까지.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기시감을 느끼고는 했다. 그는 군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용병이라면 모를까.

 

마찬가지로 저번 전투에서 훌륭한 공을 세웠더군.”

 

명령을 받을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이미 받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지난 전투에서 죽인 영국군의 숫자는 한 부대에 담아도 모자를 정도였다. 찰리는 가라앉은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씩 웃으며 휘장을 쳐다보았다.

그 적나라한 시선이 닿는 끝은 결국 손가락이었다.

 


 


막사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보고를 받았다. 짐승의 소행인 것 같다. 피해자들은 목덜미가 잔인하게 찢겨 발긴 채로 발견이 되었고 현장은 아무리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피비린내로 어지러울 정도라는 보고였다. 보고서에 서명을 하며 아주 짧게 묵념을 했다. 다른 보고서에는 탈영병들의 소식이 적혀있었다. 여러 이름들 사이로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가장 눈에 뛰는 건 역시 그 이름이었다. 찰리 울프. 몇 주 전에 직접 훈장을 달아주었던 군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인보다는 용병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독일군은 패배를 향해 곤두박질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남아봤자 별 이득이 될 거란 생각도 안 들었겠지. 마저 서명을 하고 서류철을 닫아 책상 한쪽에 가지런히 두었다. 할 일이 많았다.

 



 

왼쪽 팔뚝을 관통한 총알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차려입은 정복은 식은땀으로 젖었고 멀쩡한 다리는 덜덜 떨려 제자리에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배신자. 반역자. 즉결 심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돌로 된 차가운 바닥은 멀어져가는 정신을 잡게 해주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당당한 모습으로 한 치의 흠결도 없는 죽음. 마지막은 군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두꺼운 천 위로 새까만 피가 새어 올라왔다.

숨을 몰아쉬었다. 과다출혈 따위로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 할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건 가족들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상상으로나마 보는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운 풍경이었다. 점점 정신은 혼미해져갔다. 죽음 앞에 선 신체에서 내뿜는 아드레날린은 심장을 멈추지 않고 빠르게 뛰게 해주었다.

쇠창살이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환각인가?

튼튼하게만 보이던 쇠창살은 연약한 쇠꼬챙이처럼 보였다. 바깥에는 윤기가 나는 새까만 털의 늑대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팔을 물고 있었다. 갓 뜯은 모양인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에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손에는 감옥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가 쥐어져 있었다.

늑대는 선심이라도 쓰듯 팔을 바닥에 던져놓은 뒤 사라졌다.

 


 


제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과 코를 막아버린 거친 손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먹힌 소리는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다시 목구멍을 틀어막고. 찢어졌다. 팔까지 절단이 날 거라는 공포심은 서서히 나를 좀먹고 있었다. 찰리 울프. 열쇠를 던져주고 탈출의 길을 열어준 것은 그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이 팔뚝에 쑤셔 박혔다. 이리저리 돌리며 고문을 하더니 다시 쑥 빼버린다. 날붙이 밑으로 무언가가 뚝뚝 떨어진다. 찰리는 손톱을 이용해 살덩이 속에서 무언가를 빼내었다. 찰리는 얼굴을 막았던 손을 떼어냈다.

고통은 끝이 났다.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헉헉대며 바닥에 헛구역질을 해댔다. 뺨 위에 먼지와 함께 축축한 것들이 묻었다. 그제야 주변의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릿한 냄새와 풀 냄새가 섞여 역겨운 향이 났다.

찰리는 품속에서 철제 플라스크를 꺼내어 내 입가에 가져다댔다. 뭐든 좋았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고통에는 이게 직통이지.”


찰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비린내는 알코올 냄새에 씻겨 내려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었다.

살아남았다. 그 안도감에 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엉엉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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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찰리는 바늘이 시계의 반을 가를 때 눈을 뜬다. 달에 한두 번 올까말까 한 날이었는데, 그때마다 찰리는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고는 했다. 일종의 습관이자 버릇이었다. 찰리는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창고에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는 총기를 한아름 안고 현관문이 보이는 테이블에 쏟아 부었다. 어디 빠진 것 없나 살펴본 뒤, 다시 한 번 창고로 가서 손이 부족해 챙겨오지 못했던 물건들을 챙겼다. 기다란 막대와 드라이버, 천 조각, 기름. 손질에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어젯밤에 혹사를 당한 슈타우펜이라도 덩달아 일어나곤 했다. 그는 몸이 뻐근한 모양인지 허리에 손을 짚고는 찰리가 하는 모양새를 빤히 관찰했다.

그 날은 규칙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술을 진탕 마시고 침대에 엎어진 다음 날에도 찰리는 꾸역꾸역 일어나 테이블에 기어가고는 했다. 그의 대령을 괴롭힌 다음 날에도. 물론. 컨디션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만의 규칙이라도 있는 걸까. 슈타우펜은 결국 그 규칙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총열 내부를 닦는 찰리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도 있었다.

찰리는 그럴 때마다 대답을 회피하고는 했다. 알 필요가 없다던가, 그냥 하고 싶다던가. 정답이 아닌 뻔한 대답들을 늘어놓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는 뜻이다. 슈타우펜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조용히 총을 매만지는 찰리의 기다란 손가락을 관찰하다 시선을 옮겼다. 찰리는 집중을 할 때 입술이 튀어나왔다.

 

슈타우펜은 화장실 수납장 두 번째 칸에 있어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권총을 찰리에게 건넸다

찰리는 잠시 손을 멈추고 세 손가락에 걸린 총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긴, 당신도 군인이었으니까.”

무슨 뜻인가?”

총기를 다룰 줄 아냐고 물어볼 뻔 했거든.”


한참을 기다려도 찰리가 받을 생각이 없자, 슈타우펜은 테이블 위에 총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된 이후로 대부분의 손질은 하급자를 시켰지만, 전에는 도맡아서 했다네.”


아하. 찰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시선을 총으로 옮겼다.


요즘 들어 손질의 횟수가 잦네만.”


찰리는 다시 손을 멈췄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슈타우펜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안 될게 있어?”

안 될 건 없지만... 피곤하지 않은가 싶어서 말일세.”

, 어제 꽤 힘 들었나봐.”


말이 끝나자마자 살짝 주름진 슈타우펜의 미간이 찰리의 마음에 들었다.


도와줄 건 없나?”

거기 옆에 앉아있어.”


슈타우펜은 순순히 찰리의 말을 들었다. 찰리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사뭇 진지한 손놀림으로 보였다. 찰리는 일부러 더 손질에 집중했다. 사실, 찰리는 아까부터 같은 부분만 닦고 있었다. 젠장, 이래서는 일찍 일어난 보람이 없구만.

관찰력 좋은 슈타우펜이 찰리 나름의 규칙을 발견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외부에 있는게 아니라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찰리는 아주 가끔씩 슈타우펜을 보며 사랑을 느낄 때가 있었다. 돈을 얻기 위해, 쾌락을 얻기 위해 겉보기만 그럴 듯한 것이 아닌 진짜 사랑. 찰리는 그럴 때마다 얼음이 가득 들은 냉수 안에 얼굴을 들이 밀기도 하고, 집 밖을 빠져나와 마을 여러 바퀴를 달린 적도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택한 방법은 테이블 위에 한가득 총을 내려놓고 그것들을 손질하는 방법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손질에 집중하다보면 찰리의 마음은 깨끗하게 씻겨 나가고는 했다

하지만 점점 한계가 다가왔다. 아무리 총의 기름때를 닦아내도 슈타우펜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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