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을 깨닫게 된 것은 존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존재함과 동시에 깨달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눈앞에 있는 커다란 반달 모양의 그 것을 작은 앞니로 갉아 먹었고, 몸집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게 변한 주변 풍경들을 보며, 해야 할 것을 깨달았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본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먹고, 그 사람과 똑같은 외피를 뒤집어 쓸 수 있다니, 얼마나 편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적어도 그 존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줌도 안 되는 크기로 살 때는 취급도 안 해주는 세상에서 살았지만, 단지 그럴듯한 외양을 갖추고 그럴듯한 표정으로 그럴듯한 행동으로 연기만 해주면 세상은 백 팔십 도로 뒤바뀌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 존재를 환영했다. 그는 타고난 기질 덕분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법을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원하는 외피의 행동을 함으로서 자리를 잡고 살아갈 수 있었다.

 

반가워요. 이 근처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네요.”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모습에 적당히 반응했다. 똑같이 웃으며 손을 내밀면 되었다. 힘주어 잡은 손이 위 아래로 흔들렸다.

이웃의 이름은 벤자민 이었다. 벤자민 던.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자신을 벤지라고 소개했다. 즉흥적으로 골라둔 이름 몇 가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골랐다.

이단 헌트입니다.”

아마 전에 썼던 이름일 수도 있다. 말을 뱉자마자 익숙한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벤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람을 흉내 내는 것에는 사랑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이단은. 항상 사랑이란 감정을 최대한 즐기고 매번 사랑하는 것에 충실했다. 한 번의 악수 이후로 이단은 벤지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벤지가 이단을 사랑하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단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벤지가 마음에 들었다. 벤지랑 같이 있는 것은 시간이 가는 걸 까먹을 정도로 즐거웠다.

 

지금보다 심술궂었던 옛날에는 상대의 자리를 빼앗고 차지하는 것에 욕심을 부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단은 안정감을 원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안정을 위해 노력할 것이 분명고, 실제로도 그렇게 노력했다. 벤지는 이단이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기를 원했다. 이단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벤지가 질리거나, 이단이 질리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그런 일이 오기 전까지 정체를 들키지 않을 진짜 이단 헌트의 여유분은 충분했다.

옮길 짐은 적었고 하루도 안 걸려 이사는 끝났다.

 

작은 실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이단일 경우에는 꽤 골치 아파지는 일이었지만.

이단은 평소와 같이 자신이 되기 위해 그의 일부를 먹었다. 항상 같은 시간이었다. 반드시 그 시간이여만 되는 건 아니었지만 항상 엇비슷한 시간이었다. 어찌되었던 벤지가 눈을 뜨기 전이면 됐다.

평소와 같았다고 생각했다. 몸이 변하는 것을 확인하고, 대충 옷가지를 끼어 입고 벤지를 위한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벤지가 일어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세상에.”

이단이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을 때, 벤지는 냉장고를 뒤적이는 자신을 보았고 그가 낮은 비명을 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단은 벤지의 모습을 하고 냉장고를 보고 있었다. 바로 벤지의 앞에서. 자신의 철두철미함을 완벽하게 믿었던 이단은 벤지의 멍청한 표정을 일 분 이상 본 후에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급하게 얼굴과 몸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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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죽음은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찰리는 몸에 묻은 마지막 흙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남과 동시에, 형체를 갖춘 공허함이 찰리를 덮쳐왔다. 차라리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찰리는 할 일이 많았다. 항상 그래왔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찰리는 다음을 위해 준비를 서둘렀고,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찰리는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고 계속해서 살아가야했다. 자신을 떠난 사람에게 둘 미련은 없었다.

조금 전부터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가 거슬렸다.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분명 찰리의 신용에 문제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받은 전화 속에서는 소음이 들렸다.

한 시간만 기다리쇼.”

전화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아니, 두 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네.”

내가 그 곳으로 가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2. 두 번째 죽음. 죽음이 두 번이나 반복 될 수 있을까. 죽음이 반복되기 위해서는 살아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죽은 지 오래였다. 찰리는 자신의 인간을 웃도는 시력을 맹신하는 편이었다. 실제로도 일처리에 도움이 되는 편이었고, 남들보다 뛰어난 신체능력은 그가 쉽게 자만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찰리는 눈앞에 있는 인간 하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찰리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찰리는 더 노골적으로 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그의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는 눈도 두 쪽이 멀쩡했고, 부족한 손도 없었지만 찰리는 확신 할 수 있었다. 그는 슈타우펜이었다. 앳되었지만 여전한 얼굴이었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서 그의 냄새를 맡았다. 찰리가 기억하는 여전한 향이었다.

찰리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그를 납치했다. 사람의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찰리는 슈타우펜을 붙잡고 물었다. 대령? 질문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그는 꺾인 손목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발버둥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서투른 문장이었다.

나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찰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3. 사진을 전해 받았을 때, 찰리는 헛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또 만났네. 찰리의 옆 좌석에 앉은 의뢰인은 그의 반응에 불안한 기운을 숨기지 못했다. 적어도 의뢰인 본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뢰인에게 돈을 받고 대신 의뢰를 하러 나온 사람 또는 그의 말단 직원쯤 되는 인간이었다. 찰리는 느긋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그가 건넨 사진을 넘겨보았다.

아는 사이인가?”

아니.”

잔금은 일이 끝나면 보내주지.”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찰리의 차에서 빠져나갔다. 찰리는 그가 빠져나간 자리에 깔끔한 정복을 입은 슈타우펜이 찍힌 사진을 던져 놓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갈 곳은 정해졌으니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다. 차의 시동을 걸었다.

 

한창 강의 중인 모양이었다. 꽤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듬성듬성 자리 잡은 학생들과 강당 위에 선 그가 보였다. 찰리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맨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어떻게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 험악한 인상에 시선은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찰리는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또 똑같은 얼굴이다.

자네는 이름이 뭐지?”

찰리 울프.”

찰리는 주머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원칙적으로 청강은 금지가 아니지만.”

그는 찰리에게 다가갔다. 찰리의 손에 쥔 담배를 뺏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태도라면 내 강의를 듣게 허락할 수는 없네.”

한 쪽 눈이 안 보이는군?”

그는 찰리의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싶었다.

그래. 폭약에 맞아 눈과 다리를 잃었다네."

찰리는 삐딱하게 걸터앉았던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얌전히 있을 테니까 듣게만 해달라구.”

? 뻔뻔한 태도로 자신을 쳐다보는 찰리의 얼굴을 그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찰리슈펜으로 환생을 거듭하는 슈펜이 보고싶다 

찰리는 늑대 수인이면서도 모종의 이유로 몇 백년을 그대로 살고 어떻게든 환생하는 슈펜과 엮이는 거로 처음 환생 했을 때는 찰리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영문을 모르는 슈펜 환생체 잡아다가 괴롭히고 왜 날 모르는 척 거짓말 하냐고 닥달하면서 억지로 섹스하고 눈과 손이 멀쩡해서 그렇냐고 기억나게 해준다고 눈 한 쪽 멀게 하고  + 손도 부러트리고 그러다가 결국 환생한 슈펜은 찰리의 손에 쇼크와 패혈증으로 죽음 그 이후에 죄책감과 후회가 섞여서 사는둥 마는둥 하던 찰리가 보고싶다 시간이 갈 수록 괴팍하게 변해가는 찰리 (슈펜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이거 너무 보고싶네 ㅜ.ㅜ

그래도 돈이 없으면 불편하니까 의뢰는 간간히 받고 그러는데 ~몇 십년 뒤~ 또 환생한 슈펜이 찰리의 의뢰 타깃으로 지정되었으면 좋겠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슈펜은 다리와 눈 한 쪽을 잃은 상태였는데 그 때문에 반전시위+군수산업 철폐 운동 같은 걸 하는 꽤 명망있는 젊은 교수였고 그 이유때문에 찰리에게 슈펜을 죽이라는 의뢰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물론 찰리는 의뢰인이 건네는 사진을 보자마자 의뢰는 무슨 다 집어치우고 슈펜을 보러 떠남 물론 찰리는 의뢰를 핑계로 슈펜을 보러 가는 거라고 생각함

슈펜은 찰리를 보자마자 언젠간 누군가의 손에 죽을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킬러가 찾아올거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얼굴에 킬러라고 적혀있는 찰리) 자포자기 하고 강의 끝나고 찰리랑 단 둘이 남아있을 때 죽음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면 좋겠다 근데 찰리가 죽일 생각은 안 하고 계속 따라오기만 해서 당황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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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쏟아지는 물에 목이 옥죄이는 꿈을 꾸었다. 아가미 틈 사이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결핍된 산소 덕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려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꿈이었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다섯 개로 갈라진 발가락, 그 위로 단단한 굳은살로 이루어진 뒤꿈치 그리고 발등 위 흐르는 핏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발에서부터 종아리, 허벅지까지. 피부를 피부로 느끼기 위해 손바닥으로 쓸고 또 쓸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짓눌렀다. 숨을 참았지만 냄새는 계속해서 흘러들어왔다. 닳을 것처럼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손바닥을 들어보았다. 손바닥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린 어둠을 치우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이단은 그제서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속에서.

목덜미에 칼로 패인 것 같이 난 아가미가 뻐끔거리며 공기방울을 뱉었다.

 

2. 아주 어렸을 때 바다에 빠진 적이 있었다.

물속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새까만 돌바닥이 신발 밑창에 밟혀 깨지는 무거운 소리, 제 몸보다 큰 등딱지를 진 게들이 기어가는 가벼운 소리, 도움을 구하기 위해 고함을 치는 높은 목소리, 끔찍한 결말을 지레짐작하고 울음을 터트린 낮은 목소리. 모든 소리는 물과 함께 몸을 감싸주었다.

폐 속에 물이 차오르는 느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횡격막이 뒤집히고 기침이 났다. 입 바깥으로 공기방울이 터지는 것이 아른아른 보였다. 몸속을 차지한 호흡기계는 목숨을 부지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산소가 부족해진 뇌는 몸을 포기했다. 손가락에서부터 힘이 빠지고 그 다음 차례는 몸통이었다.

잠들지 마.

이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 들렸다. 벤지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 쉬지 마.

명령을 따랐다.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몸속에 물이 들어오지 않게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으로 물 사이로 일렁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두꺼운 눈썹, 깊게 패인 눈두덩이와 굵은 선으로 그려진 얼굴. 사실, 벤지는 자신이 이미 죽었을 거라고 착각했다.

그는 손을 뻗어 벤지의 허리를 잡은 뒤 가뿐히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순식간이었다.

벤지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그의 얼굴과, 몸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그의 탄탄한 가슴 밑에는 물고기의 형상이 있었다.

물 위로 번쩍 솟은 새하얗게 질린 머리통 하나에 비명 소리가 꽂혀들었다. 힘이 빠진 몸은 수면 위로 둥둥 떠다녔다. 해변가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물에 적셔진 벤지를 육지로 끌어당겼다. 숨을 확인하고, 턱을 뒤로 당겼다. 명치에 힘을 실어 누르며 살아남기를 기도했다. 벤지는 경련하며 물을 토했고, 헛소리를 뱉었다. 목숨을 살려준 그의 행방을, 정체를 묻는 말이었지만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벤지를 제외한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참동안이나 엎드려서 짭짤한 바닷물과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가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사실 하나는 잊지 않았다. 친구들은 벤지의 등을 두드리며 상태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온 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갔을 때 쯤 벤지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겨우 육지에 섰다. 다시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몸을 구부렸지만 힘없는 몸은 아주 쉽게 제압당했다.

잠들지 마.

목소리는 벤지를 휘감았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계속. 인간? 괴물? 아니면 꿈? 벤지는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꿈은 아니었다.

 

3. 소년이 해변을 배회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새하얀 맨 발바닥은 새까만 바위 틈새를 사뿐히 밟으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뒤꿈치부터 발바닥 그리고 발가락이 평평한 바위를 쓰다듬듯 걷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찾는 것 마냥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이단은, 알았다. 소년이 찾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하지만 바다에 뛰어들 용기는 없다는 것도.

소년은 이따금씩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를 쳐다보다가 제자리를 열 바퀴씩 빙빙 돌았다. 모습을 감추기도 했다. 이단은 수면 위 눈만 빠끔히 내밀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소년은 목적 없이 해변가를 돌아다니고 이단은 그런 소년의 행동을 관찰했다.

소년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얇은 금색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낄 정도로 자라 있었고 어깨에는 무거워 보이는 나무판자 따위를 걸치고 있었다. 이단의 일과 중 하나는 그를 지켜보는 것이 되었다. 어설픈 동작으로 나무판자 위에 망치를 휘두르기도 했고, 힘 조절을 못한 나머지 판자를 반으로 쪼개 버리기도 했다. 손바닥과 손등은 나무 조각에 긁힌 상처로 가득했다. 이단은 설마 하는 생각에 그 주변을 빙빙 돌았다.

만들고자 한 것은 배였지만 완성된 것은 배라고 하기는 빈약한 상자였다. 그도, 이단도 그것을 보며 한 생각은 아마 똑같았을 것이다. 한 명은 그 사실을 전달 할 수 없었고, 한 명은 자신의 노력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상자의 모습을 한 배와 깊이를 모를 새까만 바다를 번갈아 보았다. 한숨을 크게 쉬고 무어라 다짐을 하는 듯 자신을 다독이다가 결심했다.

이단은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봐요. 지금 그걸 타고 바다로 가려는 건 아니겠죠?

목소리는 공기 중에 흩어져 들리지 않았다. 파도가 찰박이는 새까만 바위에 팔을 걸치고 그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옮겨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단은 눈썹을 찌푸렸다.


꿈이 아니었어.”


그래. 이단은 가뿐하게 바위 위로 올라가 앉았다. 비늘로 이루어진 하체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말로는 꿈이 아니라 말했지만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난파선에서, 인간의 유물을 본 적이 있었다. 인간의 삶에 대해 기록한 책이었다. 책은 물에 젖어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내용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인간들은 처음 볼 때 손을 내밀어 인사한다. 이단은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꿈이 아니었어요.”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럽게 울고 있었다.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이단은 당황했다.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꼬리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내밀은 손은 안타깝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괜히 모습을 보인 걸까. 옛날의 기억은 옛날의 기억으로 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소년의 발바닥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인어는 울지 않는다.

 

4. 벤지는 지켜보는 것에서 한 발짝 더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넝마덩이가 되어버린 상자는 땔감으로 쓰고, 비슷한 것을 만드는 것 대신 돈을 벌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촌구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노력했다. 자그마한 일을 가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심부름에서부터 바다에서 들어오는 수하물을 옮기는 일까지 모두 벤지의 일이 되었다.

인어는 실존했다.

그것이 벤지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동안 모은 화폐 뭉치를 선박 주인인 존에게 내밀었다. 존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벤지에게 따라오라는 표시로 손짓했다.


남이 쓰던 것이긴 하지만, 너에게 충분한 것이 하나 있지.”


항구 위에 튼튼한 쇠사슬로 묶인 커다란 배 대 여섯 척을 지났을 때, 존과 벤지의 걸음은 멈추었다. 앞에는 두 명 정도가 넓게 앉을만한 크기를 가진 요트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며 벤지의 의사를 묻는 존에게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존은 벤지에게 필요한 여러 물건 따위를 챙겨주며 물었다.


바다에는 관심 없지 않았나?”

생겼어요. 작은 배라도 한 척 정도는 가지고 싶었거든요.”

여행이라도 떠나시게?”

여행이요? 그냥 조금 멀리 가서 낚시나 하는게 다겠죠.”


준비했던 변명을 천연덕스럽게 뱉었다. 감쪽같이, 어깨도 한 번 으쓱여주고. 존은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었다. 작은 바닷가 마을은 이상한 일에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지만 자연스러운 일에는 모두들 관심이 없었다.

결국, 벤지의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을 때 쯤, 그는 낡은 요트 한 척을 샀다. 곳곳에 녹이 슬은 오래 된 것이었지만 밑바닥은 튼튼했고 구형 엔진도 달려있어 바다 위 어디든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요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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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님리퀘



찰리는 운이 좋았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운명처럼 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에게 의뢰를 맡기는 모든 이들은 찰리의 깔끔한 일솜씨에 찬사를 보냈고, 그의 뱀 같은 혀에 휘말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지갑을 열어 찰리에게 건네주었다. 찰리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모든 일들이 잘 풀릴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감은 찰리의 운을 좋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물론 자신감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었지만, 이런 일들은 대부분 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운으로 해결된 적이 많았다.

평범한 하루였다. 운이 더 좋았다는 것만 빼면. 며칠 동안 쫓아다닌 표적을 겨우 죽인 날이었고, 집에 들어가지 못한지 며칠이 지난 날 이었다. 찰리는 의뢰 기간이 지난 만큼 줄어든 돈 보따리를 걱정하며, 하지만 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찬 체, 의뢰인의 집안에 들어갔고 그는 그 곳에서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 모양인지 징그럽게 해체 된 머리통과 그 옆에 놓여 있는 돈다발을 발견했다. 찰리의 선택은 아주 간단했다. 의뢰주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과 집 안에 인기척이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찰리는 바로 그의 옆에 놓인 돈이 들은 보따리를 챙기고, 집 안을 좀 더 뒤져 귀중품 몇 가지를 챙겨 나왔다.

 



슈타우펜의 유일한 취미는 책을 읽는 것이었다. 손 한 쪽과 세 손가락을 잃은 그에게는 전형적인 취미라 할 수 있었다. 지겹도록 읽었던 군사학에서부터 가끔은 흥미 위주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나갔다. 찰리는 그의 취미 활동을 탐탁찮게 바라보았다. 정착지를 자주 옮기는 특성 상 짐이 늘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점점 쌓여가는 책 무더기를 보는 슈타우펜도 찰리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짐이 늘어난다면, 처분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었다. 덕분에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주택에서 사는 그는 이따금씩 한 꾸러미의 낡은 책들을 이고 마을에 내려가고는 했다.

옛날보단 환경이 열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희귀한 판본이나 읽고 싶었던 책들을 손에 넣기에 마을은 너무 작았고, 취급하는 문서도 적었다. 슈타우펜은 늙은 노인이 마을에서 운영하는 작은 책방을 주로 이용했다. 중고 서적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슈타우펜은 노인과 안면을 튼 뒤에는 그에게 읽고 싶은 책을 부탁해 돈을 주고 사오고, 다 읽은 책들은 그에게 싼 값에 파는 식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던 것이 분명했다. 노인이 뿌듯한 얼굴로 내미는 책의 표지가 익숙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프로이센 육군참모의 역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끌레아모 저서의 책이었다. 그 책은 절판 된지 이십 년이 흘렀고,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한 지금과 같은 사정에서는 구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 할 정도였다. 심지어 대령의 직위에 있었던 슈타우펜 조차. 부르는 것이 값인 물건이었다. 슈타우펜은 놀란 표정으로 노인을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책을 받아 품에 안았다.

슈타우펜은 그답지 않게 허둥지둥 옷 주머니에서 돈을 찾았다. 찰리가 주고 간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사정을 말하고 나중에 다시 가격을 무는 방식으로 해결 할 작정이었다. 노인은 그런 슈타우펜의 생각을 꿰뚫어보았다.


주는 건 아니고, 빌려주는 것일세.”

대여금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유일하게 오는 단골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면서 노인은 한사코 거절했다. 만만찮은 고집이었다. 슈타우펜은 결국 노인의 고집에 못 이겨 책과 책을 팔은 대금을 건네받고 책방을 나왔다.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슈타우펜은 소중하게 책을 짐 가방에 넣은 뒤, 남은 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돈을 남겨 가는 것도 좋은 선택지였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탓도 있고, 찰리가 집을 비운지 며칠이 지나 그를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지루하단 이유도 있었다. 결국 슈타우펜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마을의 번화가였다. 값이 나가는 와인 한 병과 어울리는 살라미 한 팩을 살 생각이었다. 찰리가 일을 마치고 온다면 그와 한 병을 비울 수도 있었고, 그가 오늘도 들어오지 못한다면 또는 않는다면 혼자서 반 병 정도를 마실 것이다. 그럴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는데, 번화가를 둘러보고 나온 슈타우펜의 짐 가방에는 찰리가 좋아하는 도수가 높은 독주와 비스킷이 들어있었다. 가끔은 가벼운 술 대신 독주를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거칠고 새까만 털을 가지고 있는 그의 늑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바로 앞에서 마주쳐버렸다. 찰리는 당황한 표정을 재빨리 풀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슈타우펜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네?”


반가운 마음이 컸지만 말은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슈타우펜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친 덴 없는 건가?”


걱정해주는 말에 샐쭉 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찰리의 눈에 슈타우펜의 어깨에 한가득 진 짐이 들어왔다. “그건 뭐지?” 슈타우펜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자네가 좋아할만 한 것을 샀지.”


사실 찰리도 마찬가지였다. 귀중품을 돈으로 바꾸고, 두둑해진 지갑을 들은 찰리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그가 좋아하지도 않는 베이커리였다. 잠깐의 변덕이라고 하자. 찰리는 슈타우펜이 그리워지는 참이었고 그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물론 인정하지는 않았다.

찰리가 들린 베이커리는 각국의 유명한 디저트를 모아놓은 가게였다. 찰리와 같은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각기 다른 형형색색의 디저트들을 들고 가게를 나서곤 했다. 찰리가 독일의 디저트가 진열 되어있는 코너에서 멈춰섰다. 다른 나라의 디저트완 달리 공을 들여 꾸미지 않은 디저트들에 웃음이 나왔다. 슈타우펜 특유의 뻣뻣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수많은 케이크 앞에서 한참동안 고민하던 찰리는 결국 하나를 골랐다. 누가 생각날 정도로 투박한 케이크였다.

 




슈타우펜은 찰리의 손에 쥔 상자의 정체를 일찌감치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입 밖에 올려 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심사가 뒤틀린 찰리는 분명 자신을 생각해서 사 온 케이크를 부끄럽다는 이유 하나로 바닥에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정하지 않겠지만 찰리는 그랬다. 슈타우펜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를 위해 선물을 사왔네. 적절한 시기에 맞춰 왔군.”


찰리는 슈타우펜의 어깨에 걸친 짐 꾸러미를 쳐다보았다. 보기에도 묵직한 것이 짐작이 가는 선물이었다.


?”

그래.”

오늘은 책을 사오지 않았나보지?”


슈타우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찰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자네가 올 것 같았거든.”

, 내가 때맞춰 왔나보네.”

그런 셈이지.”


성큼성큼 걷다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이러다가 상자의 내용물을 영원히 구경하지 못 할 것 같았다. 찰리는 새하얀 식탁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재킷을 벗고 있었다. 상대가 찰리인지라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숙박은 알아서 잘 해결한 모양인지 몸에서는 비누 향이 풍겨왔다.


그건 뭔가?”

.”


찰리는 주위를 서성이다 대답했다.


기념일은 아니지만, 가끔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 오늘 운이 좋기도 했고, 빈손으로 오긴 아쉬워서 사왔지.”

이 근처 베이커리에서 사온 게 아니군?”

알다시피 여긴 맛없잖아.”

내 생각이 나서 사 온 건가?”


하하. 찰리는 과장된 웃음을 하고는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았다. 무언가 대꾸할 말을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찾지 못했는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슈타우펜은 짐 꾸러미에서 도수가 높은 중국술과 함께 사온 비스킷을 꺼냈다. 찰리는 놀란 눈치였다.


그걸 왜 사왔어?”

자네 선물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도 술을 즐기는 편이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야 그렇겠지만...”

나도 자네가 사온 선물을 확인해야겠군.”

선물 아니라니깐.”


슈타우펜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린 찰리가 자신이 상자를 까는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보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자 속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바움쿠헨이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케이크였다. 슈타우펜은 미소 지었다.


울프, 이게 어떤 날에 먹는 케이크인줄 아나?”


찰리는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재료로 만들지만 만드는 게 꽤 어려워 특별한 날에나 먹는 음식이라네.”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자르며 말을 이었다. 찰리는 술을 따르고 있었다.


가령 결혼식이라던가.”

참 특별한 날이네. 그거.”


짓궂은 농담이었다. 슈타우펜은 자리에 앉아 찰리가 따라준 술잔을 잡아 들었다.

 

자신 있게 말하더니, 몇 잔 마시지도 않더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비틀거리는 모양새다. 찰리는 그 꼴이 웃기기도 하고 보기도 좋아, 일부러 슈타우펜을 자극하며 술을 더 마시게 했다.


기분이, 좋군...”


혼잣말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먹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찰리는 슈타우펜의 잔을 뺏어 식탁 위에 올려다 놓았다. “돌려주게.” 무방비로 있던 손을 슈타우펜이 덥썩 잡아버렸다.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는 찰리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아니, 진짜 취했거든?”

찰리, 자네는 날 왜 구해준 건가?”


웃음을 멈추고 물어보는 슈타우펜의 눈은 타오르는 도화선처럼 빛나고 있었다. 찰리는 자신이 슈타우펜에게 휘말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찰리의 팔목을 잡은 손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슈타우펜이 원하는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구해준 것이 아니었다.


넌 거기서 죽을 인간이 아니었어.”


찰리는 자신의 손을 잡았던 슈타우펜의 손을 뒤집어 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죽을 거라면 내가 죽였겠지.”



 

사실 정신을 잃었던 게 맞다. 슈타우펜은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눈을 떴다. 늑대의 모습을 한 찰리가 위에 있었다. 찰리는 며칠동안 슈타우펜을 보지 못한 보상을 받기라도 하겠듯이 슈타우펜의 온 얼굴을 물고, 빨았다. 기다라고 축축한 혀가 얼굴을 싹 핥을 땐 눈을 찡그리곤 했다.


, .”


살짝 아프게 깨문 목덜미에 슈타우펜이 비명을 작게 질렀다. 그 소리에 찰리는 목덜미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슈타우펜과 눈을 마주쳤다. 이미 이성이 남아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찰리에게선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슈타우펜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일지도 몰랐다.


. 찰리, 잠깐만...”


부탁해봤자 찰리는 듣는 척도 하지 않겠지만, 애타게 불렀다. 그 반응은 찰리를 더 흥분하게 만든 모양인지 찰리는 슈타우펜의 목덜미를 핥아 없애겠다는 듯 더 집중했다. 문득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에 겁이 났지만 슈타우펜의 불완전한 손은 찰리를 밀어내지 못했다. 결국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찰리의 주둥이를 몇 번 쓰다듬었다. 찰리는 눈을 치켜뜨더니 가만히 슈타우펜의 가슴팍에 머리를 내리고 누웠다. 가슴을 답답하게 내리누르는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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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AU


얼굴까지 가릴 정도로 물건을 껴안고 계산대로 걸어오는 모습에 눈을 비볐다. 이걸 다 들고 갈 수는 있나요? 묻지 않았다. 귀찮은 일에는 끼지 않는 것이 벤지의 생활 신조였다. 손님이 물건을 하나 들고 오든, 수십 개 또는 수백 개를 들고 오든 그것은 벤지와 관련 없는 일이었고 그는 자신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가 계산대에 물건을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급하게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았다. 아주 급하게, 던져 놓는 물건들에 벤지는 얼굴이라도 맞을까 몸을 움츠렸다. 진정시킬 필요가 있는 손님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벤지는 아침마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벤지가 말을 걸거라 예상을 못했는지 잠깐 행동을 멈추었다.


저는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는 대답 대신 벤지와 똑같은 말투로 인사를 했다.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던 벤지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거나 그도 웃고 있다면 똑같이 웃어줄 생각이었다. 목소리가 좋았던 이유도 있고, 황당한 손님의 얼굴이 궁금했던 이유도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벤자민, 정말 좋은 아침이네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벤지의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벤지는 손에 쥐고 있던 땅콩 통조림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들어서. 그 이름이 아주 달콤하게 들려서.


, 미안해요. 새 것을 가지고 와도 좋아요.”


벤지는 허리를 숙여 한쪽 면이 움푹 파인 통조림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단이에요.”

이단?”

내 이름말이에요. 당신 이름은 벤자민, 그러니까 벤지. 내 이름은 이단이구요.”


. 벤지는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이단.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은 이단이 아니라 벤지였다. 계산대 위에 물건을 다 올려놓은 이단은 아예 그 위에 팔을 괴고 벤지를 쳐다보았다.


실례인 건 알지만… 이걸 다 들고 갈 수 있나요?”

벤지.”


이단은 벤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벤지는 토마토 케찹을 들고 있었다. 이단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웃었다. 말 같은 것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십 분 뒤에 퇴근이에요.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변한 것은 없었다. 단지 숨겨왔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벤지는 테이블 밑에 딱 맞게 수납 된 총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이단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겠다며 들어 간지 삼십분 째였다. 벤지는 룸서비스로 시킨 와인과 토마토 주스를 잔에 따랐다.


이단, 룸서비스가 도착했어요.”


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살인? 감시? 도청? 벤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총이 숨겨진 테이블 밑으로 움직였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단. 벤지는 화장실 문 앞에 섰다.


기다릴게요.”


바케스에 담긴 얼음은 절반 정도 녹아있었다. 이단이 나올 때쯤이면 미지근한 와인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벤지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딸칵. 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벤지는 문을 열고 욕실 벽에 기대어있는 이단을 보았다. 물에 흠뻑 젖은 생쥐꼴이었다. 벤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해요? 얼른 나와요.”

잠시만……잠깐만.”


이단은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벤지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벤지는 이단이 무슨 짓을 했더라도 그를 믿을 자신이 있었다. 영원히 연기를 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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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랑루즈는 곧 성공을 뜻하는 장소였다. 적어도 이단에게는 그랬다. 화려한 데뷔, 완벽한 연기 그리고 배우로서의 성공. 이단은 재능이 넘치는 신인이었다. 다음 연극의 장소는 물랑루즈야. 완벽한 무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물론 춤과 노래도 빠질 수 없지. 이단의 눈앞에 있는 것은 물랑루즈, 즉 성공을 위한 계단이었다.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이기 전까지는. 이단을 위해 극의 내용을 써주기로 한 작가가 계단 뒤편에서 머리가 깨진 체 발견 되었다. 그저 그런 치정 싸움 때문에, 말다툼을 하던 연인은 홧김에 그를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손톱은 그의 마지막 발버둥을 보여주듯 흉하게 뭉개져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공의 계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물랑루즈에는 죽은 작가보다 더 훌륭한 작가들이 많았다. 코난 도일과 비견할만한 작품을 출판했지만 홍보의 부족으로 망한 작가, 화려한 문장으로 수많은 이성을 눈물 짓게 만든 이성편력이 무절제한 작가. 까다롭게 살펴보았다. 이 사람은 고집이 세, 이 사람은 이러다가 전 작가 꼴이 나겠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때? 투박한 손가락 끝이 닿은 곳은 영국에서 성공을 위해 물랑루즈를 찾아 온 젊은 작가였다. 이력은 고작 세 줄 정도밖에 안 되어있고 흐릿한 사진으로만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지만. 이단은 오늘 밤 그를 찾아가 자신의 극의 가사를 써 달라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물랑루즈의 밤은 화려하다. 온갖 색의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사람들, 노래를 부르며 유혹하는 매춘부, 즐기기 위해 돈과 보석을 싸들고 찾아오는 구매자들. 화려한 보석들 사이에서 빛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벤지는 날이 밝자마자 물랑루즈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랑을 찾아봐. 돈으로 여자든, 남자든 사서 즐겨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파리에 도착하기 전 친구들이 으스대며 지껄였던 말들이 떠올랐다. 전부 다 헛소리였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특히 사랑은.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다. 새빨간 풍차는 계속해서 돌아갔고, 파리의 모든 것은 지루했다.

벤지는 테이블에 앉아 연거푸 술을 마셨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친구들의 으스대는 꼴이 보기 싫어 홧김에 물랑루즈에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벤지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첫 눈에 반하는 사랑.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랑.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


이봐요.”


창부를 부르지 않았다. 벤지는 취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테이블에 기댔다. 누구신가요. 또는 난 당신을 찾지 않았어요. 목구멍에서 제멋대로 빠져나온 말은 웅얼거리며 흩어졌다. 투박한 손바닥이 벤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벤지는 겨우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확인했다.


꽤 찾기 어려운 곳에 있으셨네요.”


벤지는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느꼈다. 취해서도,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반듯하게 생긴 청년은 벤지가 꿈꿔왔던 바로 그 사랑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그의 손을 잡았다. , 악수. 위 아래로 어색하게 흔들었다.


제이크. 전 이단 헌트입니다. 당신이 쓴 책을 읽어봤어요.”

? 제이크?”


벤지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단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 벤지의 말에 담긴 뜻을 생각하던 이단은 머쓱하게 웃으며 벤지의 손을 놓았다.


, 미안해요. 잘못 찾아왔군요.”


이단이 찾는 사람의 부류를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물랑루즈에서는 달마다 큰 연극을 한다. 벤지는 물랑루즈에 머물며 연극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쓸데없이 진실을 말해 이단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 저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뇨?”

제이크가 하는 일이요.”

당신도 작가인가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은 한 번도 쓴 적이 없지만 오기로 저지르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경력도 없는 사람을 쓸 수 없어요.”

파리에서 유명하지 않을 뿐이지 경력은 충분해요! 할 수 있어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앞에 있는 멀쑥하게 생긴 영국인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은 이단이 여태껏 본 사람들의 눈보다 더 반짝였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열정이 있었다. 이단은 그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어설프게 시작한 행세가 잘 될 리가 없었다. 벤지는 글을 쓰는 법을 몰랐고 이단과 그의 단원들은 벤지에게 기대를 너무 많이 주었다. 벤지는 부담스럽게 대사를 내뱉었지만 반응은 처참했다. 사랑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간단한 단어들을 이용해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여전했다. 이단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벤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벤지, 조금 쉬었다 할래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요.”


잠시만 이쪽으로 와보겠어요? 이단은 벤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가 멈춘 곳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분장실이었다. 화장대 위에 두꺼운 먼지가 쌓인 것이 한눈에 보였다. 벤지는 이단이 자신이 필요 없다고 말할까봐 두려웠다.


다시 할게요. 잘할 수 있어요.”

아니, 그건 제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에요.”

이단.”

극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요.”


극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뻔한 사랑, 모두들 한번쯤 해 본적이 있는 사랑 이야기였다. 적당한 위기와 적당한 로맨스 장면이 있는 분명한 사랑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이단의 연기는 평범한 극도 돋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벤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지금요. 혀 뒤축으로 빠져나오려는 말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봐요.”

어떻게요?”

사랑하듯이.”

당신이 그 역할을 해준다면...”

날 그라고 생각하면서 해봐요.”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어두운 분장실은 불을 키지도 않았지만 밝게 빛나는 듯싶었다.


첫 눈에 반했어요. 사랑을 모르고 지낸 날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이제는 막을 필요가 없었다.


당신과 단 하루만 같이 지낼 수 있다면, 난 모든 걸 버릴 거예요. 내 지위, 돈, 목숨도.”

, 벤지.”


당황한 이단의 표정에 벤지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여기서 조금 더 살을 붙여볼게요.”

작가보다 배우를 해도 되겠어요.”


벤지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직은 고백할 때가 아니었다. 극이 끝나면,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면 고백할 것이었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단지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당신을 속이고 극단에 들어간 것이라고. 용서를 구하며 고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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