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은 서서히 걱정이 되었다. 약속시간인 두 시. 그리고 삼십 분. 데이빗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탑에 기대어 왼쪽 손목에 걸린 시계를 수십 번 정도 들었다 내렸다 보기를 반복했다. 삼십 오 분. 여전히 데이빗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잭은 허탈감에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잭이 데이빗에 대해 아는 것? 별로 없었다. 데이빗은 현재 작은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것과 라디오 헤드를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꽤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점. (그는 이런 외적인 이야기를 하기 꺼려했다.) 잭은 그가 시계 속에서 튀어나올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데이빗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잭의 핸드폰이 주머니 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발신자 표시는 뜨지 않았다.


잭입니다.”

미안해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대뜸 사과라니. 잘 못 걸은 전화인가? 아니면 설마, 데이빗? 잭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입을 다물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데이빗?”

맞아요. , 미안해요. 정말요.

지금 어디에요?”

... 뉴욕?


잭은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삐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들만 얼쩡댈 뿐 데이빗일 거라고 의심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잠깐! 잠깐만요. 끊지 말아봐요. 지금 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래요. 그래서, 지금 뉴욕이라구요? 런던이 아니라?”

.

왜죠?”

... 잊었어요. 바빠서. 이 약속이 있다는 것을 쌔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제 말은, 런던에 왔으면서 아직도 뉴욕에 있다고 거짓말을 왜 하냐는 거예요. 데이빗.”


그러니까, 사람의 감이라는 것이 가끔은 제대로 스트라이크를 날릴 때도 있다. 잭은 자신의 넘겨잡은 물음에 데이빗이 입을 꾹 다물고 고민을 하는 모습을 수화기 너머로도 상상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맞췄구만. 잭은 홈런을 시도하기 위해 다시 핸드폰을 고쳐잡고 열심히 떠들어댔다.


데이빗,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제 자리에서 지금 당신이 수화기를 잡고 망설이는 모습이 다 보여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일단 약속 장소로 나와요. 그리고 이야기 해 봐요. 고작 인터넷으로 만난 인간, 서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준 사람이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구요. 봐요, 데이빗. 당신도 절 봤을 거 아니에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해꼬지를 할 사람처럼 보여요?”

...

봐요, 데이빗. 일단 나와요. 나와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전 이미 삼십 분도 넘게 기다렸고. 당신을 보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 유서에 제 사인으로 당신의 이름과 제가 아는 당신의 정보를 적을거구요. 국제경찰이 당신을 찾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죠? 그러니까, 당장. 전화 끊고. 이리로 와요.”


데이빗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잭은 초조한 마음으로 한 쪽 다리를 짚고 섰다. 제발, Yes라고 말해, 데이빗. 그냥 고개라도 끄덕이던가, 뭐든 하라고.


데이빗?”

, 잠깐... 생각에 빠졌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손이라도 흔들고 있을까요?”

금방 갈게요. 당신 말대로, 근처니까.


데이빗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바쁘게 걷는 사람들 틈 사이로 이질적인 가면이 둥둥 떠다녔다. 데이빗은 잭의 눈앞에 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면 아래에 있는 표정이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구멍 사이로 그가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저는 데이빗이에요.”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뉴욕이라 거짓말 하는 데이빗을 설득시켜 제 앞으로 데려놓았다. 하지만 잭은 그 라텍스 재질의 새하얀 가면을 보자마자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제 이유였어요.”

그러니까, 그 가면...”

, 우스운 이야기죠.”

이거 어떨까요. 저는 가면 대신 머플러가 있고. 데이빗, 당신은 가면이 있으니까. 둘이 교환하는거죠. 저는 그 라텍스와 데이트가 아닌 당신과 데이트를 즐기고싶거든요. 설마 피부에 붙어서 떼어지지 않는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그건 아니지만...”

그것도 멋있는 아이템이란 생각이 들지만... 아무리 블라인드 데이트라고 해도 만나서까지 블라인드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잭은 동시에 머플러를 벗어 데이빗의 목에 걸어주었다. , 한바퀴. 그리고 옷도 좀... 구겨졌네요. 혼자 중얼거리며 데이빗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벗겨도 될까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결국 데이빗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조심스럽게 실리콘 재질의 가면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냈다. 얼굴에 밀착되어 있던 탓인지 가면을 벗기는 동시에 살가죽이 같이 딸려 올라왔다.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 짙고 잘생긴 눈썹. 그리고... 지독한 사고의 흔적이 남아있는 오른쪽 얼굴, 잭은 그 얼굴을 훑어보며 그가 겪었을 일들이나, 그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람 헷갈릴 일은 없겠네요.”

나는...”

, 그럼 선택해봐요, 데이빗.”

뭘요?”

뭐긴 뭐겠어요. 식사, 아니면 술. 아니면 둘 다?”


둘 다가 좋겠어요. 데이빗의 대답을 들은 잭은 데이빗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데이빗은 절뚝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래서, 또 저에게 숨기는 건 따로 없나요?”


가벼운 술기운은 그들을 붕 뜨고 속마음을 말하게 만들었다. 롤링스톤즈, 아니면 섹스피스톨즈? 위스키, 아니면 맥주. 고양이 또는 강아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잭이 데이빗에게 몸을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데이빗은 늘어져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항상 왼쪽 눈을 찡그리고 있는 표정은 데이빗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단순히 잭을 헷갈리게만 만들뿐이었다.


숨기는 것?”

런던과 뉴욕을 헷갈렸다던가, 그런거 있잖아요.”

이런 외모인걸 숨긴 것?”

...”

농담이에요.”

혹시 무례한 질문이었나요?”

전혀요. 일단, 전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지 않아요. RISE 읽어 본 적 있어요?”

되게 유명한 잡지 아닌가요? 읽어본 적은 없지만 거기 실린 연예인 가쉽거리가 끝짱이란 건 알고있죠.”

그 외에도 많은 잡지를 출판한 출판업계에서 일하죠. 그리고... 그 곳의 사장이기도 하구요.”


잭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 젠장! , ...데이빗 에......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잭은 이름을 되뇌었고 데이빗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임즈요. 나름 유명인사였는데. 영국까지는 소문이 안 퍼졌나보네요.”

전혀 눈치 못챘어요. 내가 그 데이빗과 채팅을하고, 이렇게 만나다니.”


잭은 앞에 놓인 맥주를 비웠다. 시끄러운 음악 덕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데이빗, 혹시 볼링 좋아해요?”

... 좋아했죠.”

지금도 좋아한다는 뜻이죠?”

좋아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렴 어때요. 제가 좋은 곳 알아요. 같이 갈래요?”

엔젤은 보기보다 술을 못마신다. 로이는 엔젤에 대해 관찰한 기록지에 여든 일곱 번 째의 사실로 이것을 적으리라 마음먹었다. 말 그대로, 항상 우리 술 마시러 갈래요? 라는 스무 번의 시도 끝에 엔젤은 겨우 승낙의 의사를 내비췄고 로이는 옳다꾸나. 근처 펍에 엔젤을 데려가 과일 홉이 향긋하게 들어간 맥주 여섯 잔과 데낄라 샷 두 개를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로이는 입가심으로 주문 한 얇게 저민 오이가 들어간 진토닉을 홀짝이며 몸을 가누기 어려워하는 엔젤의 어깨를 잡아 바로 서는 것을 도와줬다.


엔젤 경사님. 조심해야죠.”

으음, 로이, 대체 나한테 뭘... 먹인 거예요?”

맥주랑, 데낄라. 그리고 탄산음료 조금. 오해는 말아요. 저도 같이 마셨으니까요.”

속이, 좋지 않네요.”

여기 데낄라가 조금 독하네요.”


로이는 엔젤의 앞에 있는 한 모금이 남은 샷을 입에 털어 넣으며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수확을 건진 것이라해도 모자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의 엔젤 경사님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었다. 고프로를 챙겨올 걸. 로이는 핸드폰에 달린 카메라로 엔젤의 달아오른 얼굴을 몰래 찍어 남기며 후회를 했다. 물론 엔젤은 바닥만 쳐다보고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로이의 검은 속을 깨달을 일은 전혀 없었다.


약은 안 돼요.”

어어, 경사님. 저도 경찰이라니까요.”

경찰이 아니라, 경찰관.”

네에, .”



엔젤은 눈을 가늘게 떠 로이를 쳐다보았다.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날, 엔젤은 최근들어 옆집에 이상한 사람이 사는 것 같다는 신고를 받고 그 이상한 집을 찾아갔고, 이상한 집에 있던 이상한 남자 로이 밀러는 신고를 받고 찾아왔다는 엔젤에게 명함 대신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엔젤의 방호복에 권총을 들이밀었다.


공무집행 중이니, 조용히 입 다무시고 나가주세요.’


물론 그 말을 듣고 엔젤은 가만히 있을만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엔젤은 바로 로이를 덮쳐 밀었고, 평화로운 마을에 정의심 투철한 엔젤 경사가 있을 거란 것을 상상도 못한 로이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갔다. 총은 저 멀리, 엔젤과 로이는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로이가 쫓던 마약상이 저격총으로 로이의 어깨에 총상을 남기고 도망갔을 때서야 그들의 싸움은 멈출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로이는 진짜로 인터폴에서 도망친 마약상을 쫓아 공무를 집행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아무 것도 몰랐던 엔젤을 꽤 과격한 방식으로 쫓아낸 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로이가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자 엔젤도 더 이상 그 사실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우선 도망친 마약상을 잡아 넘기는 것이 우선이었고, 로이는 엔젤의 도움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건은 두 사람의 협업으로 무사히 종결되었다.


어찌저찌 범죄의 누명은 풀렸지만 그동안 쌓인 불신은 지워 낼 수 없었다. 로이는 그 사건 이후로 엔젤의 동네에 남아 자기도 경찰()이라고 우기며 엔젤의 일들을 도와주거나, 미묘한 선에서 방해하며 약올렸다. 그래도 사건을 해결하며 쌓아온 정이라고, 엔젤은 로이를 냉정히 밀쳐 낼 수가 없었다. 로이는 정이 아니라 사랑이었지만.


술이 위장 속에서 섞이는 기분이었다. 엔젤은 결국 이대로 있다간 바닥에 토를 하는 실수를 저지를 것이란 위기감에 몸을 떨었다. 로이는 앞에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도움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댔고 엔젤은 로이의 잘생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 치웠다.


화장실... 화장실에 좀 가야겠어요.”


엔젤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파도마냥 밀려왔다가 쓸려나간다. 화장실까지 같이 가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이를 다시 앉히고, 엔젤은 자신에게 덤비는 테이블을 열심히 외면하며 화장실까지 기어가다시피 걸어갔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익숙한 검정 코트. 숱 없는 머리. 담배 냄새. 술 냄새. 게리.


씨발! 문 안 닫아?”


게리는 제 밑에 앉아있는 남자의 두툼한 허벅지를 매만지며 소리 질렀다. 엔젤은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말 대로 해줄 기력마저 싸그리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문을 닫아 준 건 어느새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 온 로이였다. 엔젤은 번뜩 든 생각에 손을 휘저으며 질문했다.


로이,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수요일이요.”

젠장.”


엔젤은 그제서야 대니가 달력에 날짜를 하루씩 밀어 체크해놨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늘이 수요일. 그러니까 제 큰 형인 게리가 술집을 이용하는 날인 것을 기억해냈다. 엔젤은 제 손으로 게리를 경찰서에 집어 넣고 싶지 않다며 펍을 이용하는 날을 나눠서 이용하기로 했고, 월수금일요일은 게리가 펍에서 진탕 마셔도 엔젤이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속은 어때요?”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것 같네요.”

경사님, 화장실 좋은 모텔 아는데 거기 갈래요?”


정말로. 오늘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엔젤은 로이가 이끄는 대로 휘청이며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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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야기는 5분 전으로 돌아간다. 엄마한테 줄 꽃을 연인에게 선물해주고, 언제나 그랬듯이 말실수 한 번. 그리고 밀려들어오는 죄책감들. 결론만 말하자면, 숀은 리즈와 헤어졌다. 항상 겪었던 그런 연인 사이의 말다툼이나 위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숀은 리즈와 진짜로, 정말로, 진심으로. 헤어졌다. 결국 끝을 본 것이다. 진짜 끝.

장식 된 꽃다발은 길거리에 널린 흔해빠진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이불과 한 몸이 된 에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윈체스터?” 동시에 숀은 이미 집과 같은 공간이 된 술집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는 반응이 없었다. 숀은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되는게 없다고 한탄을 하며 에드의 이불을 거칠게 들췄다.

 

젠장, 오늘은 날 좀 내버려둬,”

 

에드는 어쩐 일인지 기분이 몹시 안 좋아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무슨 일인지 위로를 하며, 거실로 나가 같이 게임 한 판 하자고 능청맞게 받아쳤겠지만 오늘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숀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에드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 숀은 윈체스터 앞에서 자조 섞인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기름칠이 덜 된 문을 힘껏 열었다. 문 귀퉁이에 달린 싸구려 종이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울렸다. 그 소리에 윈체스터의 사장인 존은 문 쪽을 힐끗 봤지만 곧 신경을 끄고 제 할 일을 했다. 숀은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들고 존과 멀리 떨어져 있는 바에 앉았다. 누구랑도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한 편으로는 그 누구랑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든 손으로 존을 부르려했지만 존은 고기를 손질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안녕, 친구. 바로 주문 할래요?”

 

숀은 밑에서 불쑥 튀어나온 정수리에 놀라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실제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손에 든 지갑을 그 머리통에 던져버렸다. 이마 한 가운데를 맞고 떨어진 지갑이 바닥에서 뒤집어졌다. 이마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쥔 남자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미안해요. 반가워서 인사했는데 당신이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요.”

, 안녕하세요?”

이름이?”

.”

반가워요. . 오늘부터 윈체스터에서 일하게 된 브라이언이라고 해요.”

 

숀은 브라이언의 커다란 눈을 마주 봤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 부담스러워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자연스럽게 뒤로 넘긴 풍성한 브루넷, 이야기를 언제든 잘 들어줄 것 같이 상대방을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 그리고 자신감이 넘쳐보이는 저 미소. 이 시골 동네에 있을 평범한 사람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브라이언은 바닥에서 지갑을 주워 숀에게 건냈고 숀은 그 안에서 지폐를 꺼내 브라이언에게 건냈다.

 

맥주랑, 위스키 샷으로 세 개요.”

 

브라이언은 숀이 건내는 돈을 받아들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비췄다. 바에 가지런히 놓인 꽃 장식만 멍청하게 쳐다보던 숀은 그런 브라이언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몇 번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브라이언은 축축하고 차가운 잔에 담긴 맥주와 독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잔 세 개를 숀의 앞에 놔주었다. 숀은 제 눈 앞에 있는 술들을 한번에 들이 마셨다. 거의 목구멍에 부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브라이언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숀의 얼굴이 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구요?”

 

밖은 밤바람이 쌀쌀했다. 윈체스터는 그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술에 취한 사람을 보호해줬다. 그 안은 술을 시키거나 서로의 험담을 하며 낄낄대는 소리로 가득했다. 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반쯤 감고 브라이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숀에게 하는 질책은 아니었다.

 

병 째로 가져다 줘요.”

, 지금 당신 꼴을 보면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닌 거 같아요.”

 

숀은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였다. 브라이언은 새하얀 천으로 광이 날 정도로 닦던 유리잔을 내려놓고 숀을 위로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고민했다.

 

잊어버려요. , 맥주가 있고 안주도 있잖아요?”

 

숀은 바에 얼굴을 처박고 어깨를 들썩였다. 브라이언은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젠장, 맥주고 안주는 무슨! , 봐요. 저는 지금 원래 살던 곳에서 어느 미친 여자한테 걸려서 온 동네에 제 섹스 라이프고 뭐고 다 소문났어요. 그리고 가게에서 제가 믿었던 스승과 주먹다짐을 했구요. 덕분에 그 쪽에서 바텐더 일은 하지도 못하게 생겼다구요.”

 

브라이언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못 알아챌 정도로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술을 먹은 것은 숀인데 자신이 대신 취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실망감에서 비롯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숀과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모습이 프로답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제야 숀은 바에 눌린 얼굴을 떼고 눈물 가득한 눈을 굴려 브라이언을 쳐다보았다.

 

공부는 포기했고, 나이는 먹어가고. 결국 도망치다시피 온 곳이 이 곳이에요. 이 동네에 그럴듯한 술집에 취직한 다음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했어요. 근데, 지금 제 모습을 봐요. 여자친구와 네 시간 전에 헤어진, 맥주와 싸구려 위스키만 마시는 술주정뱅이와 이런 이야기나 나누고 있잖아요.”

 

브라이언은 말을 마치고 숀에게 얼음이 담긴 차가운 물을 건내주었다. 숀은 훌쩍이며 브라이언의 호의를 받아 마셨다.

 

, 미안해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계속 축 쳐져있지는 말라는 말이었어요.”

 

숀은 훌쩍임을 멈췄다.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윈체스터의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남은 술을 한번에 털어넣은 숀은 이전부터 대답이 없었다. 브라이언은 존에게 눈인사를 하고 옆에 빼놓았던 외투를 걸쳤다. 존은 손질한 고기 중 남은 것들을 종이봉투에 담아 브라이언에게 던져주었다. 브라이언은 휘파람을 불며 고기가 든 봉투를 챙겼다. 물론 바에 거의 눕다시피 한 숀을 챙기는 것도 있지는 않았다.

 

이봐요. ? 일어나서 갈 수 있어요?”

“... 당연하죠.”

 

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기세에 밀려 바닥에 엎어졌다. 브라이언은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바에 덩그라니 놓여진 지갑을 챙겨 손의 외투에 넣어준 다음, 그의 허리를 잡고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집이 어디에요?”

집이요? 에드와 피트가, 기다릴텐데... 오늘은... 그냥... . 방금 뭐라고 물었어요?”

집이 어디냐구요.”

 

브라이언은 숀을 다시 한번 불렀지만 숀은 눈을 꾹 감고 상황을 회피하기에 바빴다. 꽤 곤란한 상황이었다. 브라이언은 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브라이언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뒷걸음질을 쳤고 숀은 결국 바닥에 여지껏 먹은 술들을 다 토해냈다.

 

 

결국 브라이언은 윈체스터에 흩뿌려진 그 흔적들을 다 치우고, 토하고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숀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 바닥에 그를 눕혔다. 새로운 동네에 걸맞는 성대한 환영식이었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손님이기도 한 그를 길바닥에 내버리고 도망갈 수 없었다. 무거운 짐 ()을 끌고 온 덕에 홧홧하게 올라오는 열기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브라이언은 단정하게 입은 셔츠를 벗고 숀을 침대에 눕혔다.

 

 

으악숀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깼다. 입 안에서 텁텁한 기운이 맴돌았다. 심지어 눈 앞에 보이는 천장은 처음 보는 패턴이었다. 속은 쓰리고, 무슨 짓을 한 건지 눈은 침침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났네요?”

 

브라이언이 새빨간 음료가 담긴 잔을 내밀며 눈썹을 까닥였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숀은 모든 것이 기억났다. 부끄러울 정도로. 차라리 기억이 안 났으면 좋았을텐데. 브라이언은 숀에게 얼른 받으라는 듯이 그 잔을 흔들었다. 점도가 높은 새빨간 액체가 잔 안에서 흔들렸다. 숀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것을 받았다.

 

숙취에 좋은 술이에요.”

 

. 그 단어만 들어도 속이 미식거리는 기분이었지만 브라이언의 정성을 생각하여 숀은 그 음료를 단번에 들이켰다. 브라이언은 잘 받아 마시는 숀을 보며 웃음지었다. 토마토 맛이 입 안에서 강렬하게 맴돌았다. 숀은 눈을 꿈뻑이고, 입을 침으로 축였다.

 

, ... 어제는 죄송했어요.”

 

브라이언은 숀의 손에 들린 빈 잔을 회수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덕분에 숀은 더 죽을 맛이었다.

 

값은 오늘 윈체스터에서 받을게요. 올거죠?”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숀은 브라이언의 집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둥지둥 짐을 챙겨 나왔다.

 

놀랍게도. 리즈와 헤어진 숀은 그 날. 단 한번도 리즈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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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워요, 그리고 오랜만이네요. 헥터 선생님. 일부러 얄밉게 웃는 것이 분명했다. 헥터는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벗어 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고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헥터의 상담소 한 쪽 벽면의 열린 창문으로 일 월의 차가운 바람이 헥터의 몸을 차게 훑었다.

 

   로이, 상담소에 들어오는 문은 저 쪽이라고 지금까지 정확히 열다섯 번 말했어요.”

   열다섯 번? 정확히는 한 번 더 추가해서 열여섯 번이에요.”

   사실 숫자는 중요한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정확히라는 단어는 옳지 않지 않나요?”

   정확히에 대해서는 제가 사과하죠.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창문은 로이씨의 출입문이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의 비서는 이 곳에 저를 들여보내주지 않는다구요.”

 

   그야, 한 달 전에 로이씨가 이 곳에서 제 환자에게 총을 쐈기 때문이죠.

 

   헥터는 꽤나 권위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의자에 눕듯이 몸을 기댄 후 말을 천천히 늘어트렸다.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상담의 주도권을 잡고, 상대방이 내뱉는 모든 말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목마른 사람들은 그런 헥터의 방식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로이는 헥터가 진지한 표정을 짓든, 단호하게 말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헥터가 좋아하는 정확히라는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로이는 그런 헥터의 방식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헥터씨가 생각하는 그 환자 분은 저와 당신의 관계를 의심하고 찾아 온 아주 무서운 악당들, 그니까 디에고 바레스코 같은 사람들이라구요.”

   바레스코 씨는 제 목숨을 살려주셨어요.”

   , 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어요.”

 

   와중에 나온 로이의 말은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로이는 가끔 남부 아프리카의 작고 더러운 병원에서 헥터가 떨어트린 디에고의 펜을 보았을 때를 추억하곤 했다. 언젠가 로이의 입에서 잔뜩 미화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헥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겁하며 그게 추억이라구요? 나랑 다른 기억을 가진 것 같은데요?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 펜이 아니었으면 헥터와 로이는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헥터도 동감했다.

 

   아무튼, 전 선생님의 목숨의 은인이라고 하여도 한 치의 부족함이 없죠.”

   그리고 제가 아끼던 화분과, 로이씨가 방금 열고 들어온 창문을 깨트리고 저 쪽 벽면에 총알 자국 몇 개도 남겨주시고 갔잖아요.”

   까다로우셔라.”

   가끔 찾아오시는 분들이 저 자국을 가르키며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당황스럽다구요.”

   , 다음에도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선생님에 대한 저의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충분 할 것 같아요.”

 

   결국 헥터는 손을 들고는 항복의 표시라도 하듯 흔들었다.

 

   커피 아니면 홍차?”

   커피로 부탁할게요.”

 

   몸무게에 눌려 반쯤 꺼졌던 쇼파에서 일어난 헥터는 로이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가느다란 갈색의 머리카락이 헥터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로이는 자신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는 헥터의 얼굴을 다시 끌어안았다. 잘생긴 얼굴이 헥터를 보며 온전하게 웃었다. 헥터는 결국 로이가 부탁한 커피를 끓이는 대신 그의 양 쪽 볼을 붙잡고 이마, 콧잔등 그리고 입술에 쪽쪽 댔다. 헥터가 로이에게 입술을 열어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듯이 아랫입술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지만 로이는 고집스레 닫고 있었다. 항상 로이의 고집에 항복하는 것은 헥터였다. 헥터는 마지막으로 로이의 콧잔등에 코를 부빈 뒤 고개를 들었다.

 

   보고싶었어요. 로이.”

   저도요. 일 끝나자마자 달려온 거예요.”

   창문은 안 깨트려줘서 고마워요.”

 

   헥터는 비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로이를 품에서 놔주었다. 로이는 헥터가 앉아있었던 약간 품이 꺼진 쇼파에 자연스레 앉아 헥터의 커피를 기다렸다. 헥터는 열려있었던 창문을 닫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이번에는 무슨 일을 했어요?”

   , 이거 상담인건가요?”

   상담이라기보다는, 보통 연인들의 일상적인 대화라고 해두죠.”

   저번에 선생님을 찾아왔던 그들의 흔적을 뒤쫓았어요.”

   잡았나요?”

   아주 전쟁같았어요.”

   전쟁?”

   , 재밌었다는 뜻이에요.”

   재밌었다라.”

 

   헥터가 천천히 로이의 말을 따라했다.

 

   지금 저의 정신을 분석 하려는 거라면 정중히 사양하죠.”

   , 미안해요.”

   아무튼. 진짜, 안타깝게도 코 앞에서 놓쳐버렸어요.”

   놓쳤다구요?”

 

   로이의 말에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짓고는 커피가루가 담긴 찻잔에 김이 나는 물을 부었다. 헥터는 검은 소용돌이처럼 퍼지는 그것을 티스푼으로 몇 번 저어준 뒤 로이에게 건내주었다.

 

   맛이 좀 이상한데요?”

 

   찻잔에 담긴 커피를 한모금 마신 로이는 인상을 쓰며 헥터를 바라보았다. 헥터는 나머지 찻잔에 물을 붓다말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한 쪽으로 치켜올리며 로이를 돌아보았다. 로이가 헥터의 눈 앞에 자신의 찻잔을 들어 보여주었다.

 

   마셔봐요.”

   분명 전 환자는 맛있게 먹고 갔다구요.”

 

   헥터는 변명을 하며 로이의 찻잔을 받아들이고, 한 모금 마셨다.

 

   멀쩡한데요?”

   . 헥터, 항상 생각하지만 당신은 참 커피를 잘 타요.”

   당연하죠, 그리고 이거 맛 괜찮은데요? , 잠깐.”

 

   여기에 약 탔어요?

 

   흐려지는 시야에 헥터는 멍청하게 눈을 꿈뻑였다. 끄덕이는 로이의 흐릿한 얼굴이 보였다.

 

   당신을 보호하려는거예요.”

   , 잠깐만요... 이건 보호가 아니라구요...”

   헥터. 잘 들어요. 제 실수로 당신과 저의 관계가 들통났고, 당신은 지금 무척이나 위험 한 상태에요. 이건 당신의 목숨을 - ”

 

   안타깝게도 헥터의 귀에는 그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고, 헥터는 분명 로이의 그 말 뒤에 당신의 목숨을 가지고 놀 거예요 라는 터무니없는 상상밖에 들리지 않았다. 남부 아프리카의 작고 더러웠던 병원에서 있었던 악몽이 헥터의 머리를 강하게 휘몰아쳤다.

에어컨 바람 소리와 함께 여섯 개의 눈알이 도록도록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IMF에 꽤 오랜 시간동안 일한 크리스셰인마이크그 세 명은 이틀을 밤 새워 잔뜩 쌓였던 일처리를 방금 전에서야 겨우 끝내고 구석에 위치한 사원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러 왔다가 우연히 만나 그렇고 그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무엇보다 커피가 식는 것도 잊어버린 체 누가 제일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꺼내냐는 것이 이 순간 그들이 가진 최대의 관심사였다


웬즈 스트릿에 새로 생긴 중국식 식당과 자신이 키우는 귀여운 강아지 이야기로 한참을 종알종알 떠들었을 때이미 다 식어버린 커피만 홀짝이고 있던 크리스가 드디어 떨어진 주제 덕에 겉돌던 대화의 눈을 잡아챘다.

 

이단헌트.”

 

그 이름의 파급력은 엄청났다흥미가 떨어져 핸드폰만 톡톡 두들기고 있던 셰인도집에 혼자 기다리고 있을 네 살 나이의 귀여운 강아지를 생각하고 있던 마이크도 그 이름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그 단어가 나온 목소리의 장본인인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방금 프로파일링을 하다이상한 걸 발견했거든.”

 

이상한‘ 그 것을 말하는 억양이 다른 둘의 귀에 꽤나 이상하게 들려왔다.

 

간단해최근에 있었던 신디케이트그 보고서가 내 권한으로 볼 수 없게 잠겨있더라구.”

그 이단이 참여한 미션이니까당연한 거 아니야?”

 

 

1. 그러니까정말 이상했다크리스의 태블릿 피씨에 떠오른 결재 서류는 그 의미 그대로 사인을 받기 위해 올라온 것 같았다파일 클릭실패권한이 없습니다파일클릭실패결재를 위한 서류인데 권한이 없다고크리스는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두드렸지만 떠오르는 대답은 똑같았다.

 

권한이

없습니다.

 

사실자신에게 권한이 없는 정보를 보고 싶을 만큼 크리스는 호기심이 많지도 않았고대담하지도 않았다스물 한 살에는 경찰으로써 슬럼가에서 꽤나 골치를 앓았던 덩치들을 잡아가며 살다가서른 살에는 CIA인줄 알았는데 어영부영 임파서블 어쩌구 하는 이상한 곳에 들어가 현장에서 폭탄을 해체하고차에 치이고평범한 요원이 그렇듯 꽤나 험한 삶을 살아왔었다하지만 현재 크리스는 마흔 아홉 살 이었다현재 그에게는 젊은 날의 패기도 없었으며그저 회사에서 나오는 두둑한 월급을 받으며 병아리같이 뺙뺙대는 어린 요원들에게 과거의 기억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이야기나 가끔 해주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평범한 삶을 추구하던 크리스가 오랜만에 해킹을 시도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자료는 텅 비어있었다.

 

 

비어있었다구?”

 

마이크의 비명에 말을 끝낸 크리스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신디케이트가 실존하는 거였어?”

파일을 보니 그것도 의심 가더라.”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마이크가 목소리를 내었다.

 

사실 이건 내가 직접 본 건데.”

 

 

2. 마이크가 생각하기에 아마 새벽이었던 것 같았다창문의 스크린을 열어 밖을 보았을 때 거리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고심지어 가로등도 켜지지 않아 건물들의 인영도 어렴풋이 보일 정도였다젠장일찍 좀 출근할걸투덜거려봤지만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음산하잖아무릎에 총을 맞고도시속 80km로 달리는 차량에서 떨어졌어도 멀쩡히 미션을 마쳤던 마이크는 의외로 귀신이나 그러한 것이 자주 나타나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무척이나 약했다침을 꼴깍 삼키고일에 집중을 하기 위하여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웅얼웅얼)

 

멀리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마이크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자신의 입을 겨우 틀어막았다몸이 으슬으슬 떨려오는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잘 못 들은 것이겠지마이크는 다시 모니터에 집중을

 

으음벤 (웅얼웅얼)

 

그리고 우습게도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마이크는 졸도해버렸다.

 

 

그 때는 몰랐는데지금 생각해보면 그 신음아니목소리가 아주 익숙했거든.”

쓰러졌다고?”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푸하세상에.”

그 목소리의 주인분명 이단 헌트 였다구.”

계속해.”

그리고 그 목소리가 부르는 건 벤이었고이단 헌트와 가장 가까운 인물그리고 IMF 요원 중 떠오르는 이름은 딱 하나지.”

벤자민 던.”

그래.”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셰인이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듯 자세를 고쳐 앉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3. 간단했다셰인은 이단 헌트가 영국총리를 납치 한 날그 자리에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네.”

하지만 그납치가 사실이라면... 파일이 비어 있는 사실도 이해가 되지.”

헌트랑 벤지랑 그, ‘섹스를 하는 어그렇다고?”

이단 헌트가 총리를 납치해서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이 더 믿음직스러운데.”


시계가 밤 9시를 알리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어쨌든. 마이크, 셰인, 크리스 그들은 대충 시간을 떼운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아까부터 소리를 내며 돌아갔던 에어컨 바람은 그들의 몸을 으슬으슬 떨리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일을 끝낸 후부터 지속적으로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크리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었네, 친구들. 그럼 난 이만 가보지."


어어, 그럼 나도. 일어나야겠네. 나머지 둘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4.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던 벤지는 정말이지 우연히 휴게실의 씨씨티비를 보았다. 호기심이 생긴 벤지는 이단의 룸을 확대하고 있던 화면의 줌을 당겨 취소한 뒤, 휴게실의 화면을 확대하고 오디오를 틀었다. 그러니까, 벤지는 그 셋이 중국식 식당과 강아지 이야기를 하는 것과 자신이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본부 안 에서 이단과 섹스를 즐겼던 것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을 다 들은 셈이다.


"세상에."


벤지는 키보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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