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스 한 구석에서 고개를 꾸벅꾸벅 떨어트리며 졸고 있는 고양이를 언제 처음 봤냐고 물어본다면, 이단은 한참동안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 할 것이다. ‘원래부터 있었어.’ 어불성설한 말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또 옳은 말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단은 자신이 IMF에 갓 입사했을 때 모습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었다고 자주 묘사했었고, 그 고양이는 이단의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때. 그가 처음으로 집에 짐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테라스 밖으로 삐죽이 나온 작은 공간에서 제 몸을 눕히고 볕을 쬐고 있었다.

 

오전에는 먹이라도 찾아 돌아다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양이는 꼭 해가 제 모습을 탐스럽게 비추는 오후 두 시쯤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며 어슬렁어슬렁 골목을 돌아다녔다. 직업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이단은 아주 가끔마다 그 고양이와 마주쳤지만, 이단은 안타깝게도 동물 애호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단과 고양이는 같은 골목에 몸을 눕히고 사는 같은 주민임은 틀림없었지만 서로 친한 척은커녕 인사도 하지 않는 그런 무미건조한 사이였다.

 

이단이 그 고양이에게 관심을 준 것은 정말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아직도 생생했다. 동료들이 모두 죽어나갔다.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고, 그 충격은 크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글리츤, 클레어... 동료들의 이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단은 그 날 차에 치인 고양이와 마주쳤다. 이단은 자신의 몸에 딱 달라붙은 물에 홀딱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데면데면한 친구였던 고양이를 들여다보았다. 숨만 꼴깍이며 넘어갈 듯이 쉬고 있는 고양이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체다와 비슷한 탐스런 노란 빛깔 털에는 사고를 당한 시간이 꽤 오래 전 이었는지 딱딱하게 굳은 진한 갈색 피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가슴께에 핏방울이 동그랗게 번졌다. 고양이는 반항 할 힘도 없는지 주둥이만 뻐끔이다가 곧 눈을 감았다.



그 뒤로 여러 사건이 있었다. 고양이는 천성이 도둑고양이인 모양이었는지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며 며칠 이단의 집에서 지내다 훌쩍 떠났고, 이단은 그 뒤로 벌어진 수많은 일 따위에 휘말려 고양이를 떠올릴 세도 없었다.

 


고양이를 다시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이단은 식사로 자주 때울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을 사들고 가는 길이었고, 한 길로 이어진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 곳에서, 오랜 친구였던 고양이를 만났다. 그동안 아주 잘 먹기라도 한 것인지 저번에 본 것보다 몸집이 두 배는 불어있었다. 친하지도 않았지만, 그간 못 본 것이 뭐라고. 이단은 오랜만에 본 얼굴에 반가움을 느꼈다.

 

고양아.”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한 손에 쥔 채 무릎을 굽혀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는 망설이기라도 하듯 제 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이단의 옆으로 와 내민 손에 살짝 몸을 비벼 댔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생각 외로 좋아 이단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대도 하지 않고 건진 수확이라 느끼는 바는 더 컸다.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나랑 같이 갈래?”

 

물론 고양이가 대답을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단을 따라 갔고, 그 이후로 이단과 고양이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어.”

 

고양이는 말이 많았다. 운동하는 이단의 모습을 바라보며 야옹. 우걱우걱 피자를 씹어 먹는 이단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야옹. 샤워를 하고 허리에 가운을 걸친 모습을 보고는 뒤 돌아 꼬리를 붕붕 바닥에 쳐대며 야옹. 하지만 이단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미소를 머금고 한 저 말에는 고집스레 주둥이를 꾹 다물 뿐이었다.

 

결혼은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 결혼을 한다면. 그녀와 하지 않을까?”

 

이단은 고양이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과연 내가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해질 수 있을까?”

 

고양이는 자신을 매만지던 손가락을 아프게 깨물고 웅크려 있던 몸을 활짝 펴 이단의 손이 닿지 않는 창문 위로 뛰어 올랐다. 꽤 세게 물었던 탓인지 엄지손가락에 작은 송곳니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 고양이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단은 턱을 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며칠 뒤, 고양이는 다시 집을 나갔다. 이단은 가끔 그 고양이가 생각났지만 그의 천성을 생각하며. 보고 싶다는 마음을 겨우 눌러 내렸다. 그리고 이단은 그 것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벤자민 던 입니다!”

 

반가워요. 이단. 그동안 정말로 뵙고 싶었어요! 아주 오래 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반갑게 얼굴을 들이미는 신입 요원 덕에 이단은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이단은 재빨리 평정심을 유지하고, 입꼬리를 시원스레 올려 기대에 찬 눈으로 반짝이는 벤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

벤지요.”

벤지. IMF에 온 것을 환영해요.”

 

벤지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단과 맞잡은 손을 위 아래로 붕붕 흔들어댔다. 벤지는 그밖에도 IMF에 들어오고 싶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앞으로의 미션이 아주 기대된다는 등. 조잘조잘 열심히 떠들어댔다. 오랜만에 새로운 활기 넘치는 얼굴을 본 이단은 그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실제로 작은 동물이 말하듯이 끊임없이 떠드는 벤지의 얼굴을 보니, 예전에 살았던 작은 고양이가 떠오른 탓도 없지 않아 있었다.

 

, 미안해요.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죠?”

 

이단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그냥 반가워서 그랬어요. 이단,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저야말로 즐거웠어요. 이 부서에서 일하는 거죠? 가끔 찾아 올게요.”

 

그 말에 벤지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벤지는 이단을 말 그대로 오랜만에 만난 것 처럼 대했다. 이단은 아주 잠깐 속에서 피어오른 가벼운 의문에 뒷목을 긁적였지만 곧바로 떠오른 다른 생각에 금방 빠져들었다

이단은 바로 오늘, 줄리아에게 반지를 주며 청혼 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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