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상자는 벤지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충분하고 심지어 흘러 넘쳤다. 벤지는 혹시나 상자 안에 들은 것이 포장지만 그럴듯한 폭탄이라든가 총이라든가. 그 무엇도 아니라면 설마, 진짜 포장지에 적혀있는 그대로의 것? 진짜? 한참동안 상자 겉을 살핀 벤지는 궁금함을 내리 누르는 데 온 힘을 더했다.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물건의 주인은 뻔했다. 이단 헌트. 벤지는 이단이 올 때까지 얌전히 바닥이나 쇼파에 누워 물건 개봉의 순간만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 덕에 몸을 퍼득이며 일어났을 때, 이단은 벤지의 바로 옆에서 잔뜩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 왔어요? 이단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는 척 하다가 대답했다. 한 시간 전에. 많이 기다렸어? 벤지는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이단은 잔뜩 젖은 수건으로 덜 젖은 머리를 몇 번 더 털었다. 바닥에 미처 닦지 못해 떨어진 물방울들을 대충 손으로 훔쳐 닦았다. 그리고 다시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 맞다. 벤지의 혼이 빠진 소리에 이단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거 말인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이 덜 깬 탓이었다. 이단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저녁 먹었냐구? 아니요. 첫 번째 답은 틀렸다. 벤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일 보기로 한 영화? , 영화관 앞에 멕시코 음식점이 새로 생겼어요. 내일 같이 가요. 근데,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에요. 두 번째 답도 틀렸지만 전혀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벤지는 거의 머리를 쥐어뜯듯이 하고 있었고 이단은 머리 대신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있는 보, ……. 상자요! 웬 거예요? 손가락이 딱 하고 마주치는 소리와 함께 답이 나왔다. 그거? 보드게임인데. 그럴줄알았, ? 이단은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일어난 김에 벤지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상자도 챙겼다. 총이라도 들었을까봐? 이단은 벤지의 머릿속에서 사는 것이 분명했다. 벤지는 정곡을 찔린 것이 부끄러워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폭탄두요. 민망할 정도로 크게 웃어버린 이단은 달아오른 벤지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괜히 헛기침을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친척이 딸을 낳아서 선물로 샀는데, 게임을 즐기기에는 너무 어린……. 벤지는 그만 말을 끊고 말았다. 친척? 친척이요?? 자신의 생각에 빠져든 이단은 벤지의 얼빠진 표정을 보지 못했다. 자세히 따지자면 어머니 쪽이지. 벤지는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단의 가족이요? 이단은 뒤늦게 벤지의 물음에 담긴 경악을 알아챘다. 벤지, 난 외계인이 아니야. 헌트라는 성도 물려받은 거고. 이단은 주절주절 말하는 벤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 안에 들어오는 얼굴은 달아오른 것보다 더 뜨거웠다. 뺨이 눌린 탓에 발음이 잔뜩 뭉개졌다. 외계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물론 알죠.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건 다르다구요. 뭐가 다른데? 이단은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이단 헌트였을 것 같아서요. 이단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뻔한 생각이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벤지. 벤지는 자신의 뺨에 올라와있는 이단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익숙해진다구? 이번에는 이단이 물을 차레였다. 잡은 양 손을 몇 번 주무르다가 대답했다. 당신도 사람이잖아요.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가끔은 취미로 게임도 즐기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요. 그걸 자꾸 잊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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