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어요.”


데이빗은 앞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목구멍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찻잔은 미지근하고, 홍차는 뜨거웠으며 말을 이어가기에 모든 것이 최적의 시기였다. 단물 빠진 체리맛 풍선껌. 현재 자신이 있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맛의 홍차였다. 연갈색 액체를 들어 식도를 적시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타임스퀘어를 미친 듯이 달리는 꿈. 그 곳에서 유일하게 숨쉬고 있는 사람은 데이빗 혼자였다.


데이빗의 눈 앞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꿈을 꿨었던 그 날 밤의 상상을. 의사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하게 변했다. 의사는 인내심이 깊었다. 일그러진 얼굴 탓에 발음이 불분명한 데이빗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들었지만 그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측은하다는 시선도, 동정이 담긴 말도 건내지 않았다.


그게 꿈이란 것을 자각한 이유는 ... 그 곳에 사람이 전혀 없어서도 아니고, 아무리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아서. 그런 시시한 이유가 아니었어요.

거기서는 제 몸이 멀쩡했거든요. 절뚝이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내가 원래 가졌던 몸처럼."

꿈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는 깊은 무의식 속을 표현하고는 하죠.”

프로이트의 이론을 말할거면 당장 집어치워요. 히스테리? 그런건 이미 많이 겪었고, 그 죽은 양반보다 제가 더 잘 알걸요.”

데이빗.”

마음속 깊은 욕망이라. 좋죠. 아무튼, 꿈인걸 깨달았을 때는 저는 멈출수도 없고 그 꿈에서 깰 수도 없더군요. 다리는 움직이고 있고, 꿈이란걸 깨닫자마자 점점 아파오고. 거울이 없었지만 볼 수 있었어요. 제 얼굴이 점점 불에 타고 자동차 파편에 찔리고 일그러지는 것도.”


일 월의 날씨 탓에 창문을 다 닫아 놓았지만 어디서 바람이 세어 들어오고 있었다. 데이빗은 춥다고 말하는 대신 이미 다 식은 홍차를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


그 고통이 느껴졌어요 ... 꿈인데. 그 거지같은 통각이 제 기능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이게 정말 꿈인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거부. 분노. 슬픔. 그 각가지의 감정이 저를 휩쓸고... 그 다음 단계는 포기였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 바닥에서 그걸 발견했어요.”

파란 목도리요?”

맞아요. 저번 상담에서 말씀드렸던 그거요.”

오늘도 하고오셨네요.”

그걸 주워서 둘렀죠. 알 수 없는 안도감. 약을 먹은 것 마냥 고통은 없어지고 ... 소피아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 그리고 잭. ... 눈 앞에 잭이 있었어요. 그는 저를 안아줬죠. 그냥 친구를 안아주듯이. 포옹의 정의를 알려주듯이. .”

행복했나요?”

행복이요?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것 같은데요.”

말 그대로에요. 당신이 그 꿈에서 느낀 것을 떠올려봐요. 목도리를 두르고, 잭이 당신을 안아줬을 때. 당신은 소피아가 떠올랐나요? 아니면 지금 몸이 불편하다는 것이 느껴졌나요?”

“...전혀요.”

사람들에게 따라 행복의 의미는 다 다르죠. 데이빗, 너무 완벽하고 모든게 정확해야 한다는 것도 강박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고...”


데이빗은 그제서야 주머니에서 진동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어정쩡한 자세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 데이빗이 전화를 받으려고 액정을 누르기 위해 손가락을 뻗었을 때 진동은 멎어버렸다. 의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버튼을 누르려고 시도를 했을 때 데이빗은 무심결에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찬 바람이 세어 나오던 창문. 두툼한 코트에 장갑까지 낀 잭이 그를 향해 열심히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데이빗은 잠시 고민하다가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잭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고 벽 한 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았다. 다섯시 오 분. 이미 상담시간이 오 분 정도 초과된 상태였다. 푹신한 쇼파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의사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오늘도... 유익했어요. 닥터 헥토르.”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다음 상담은 이번에 똑같이 이 주 뒤 이 시간에 보면 되는 건가요?”

... 이번에는 제 사정 때문에 아마 한 달 가량은 상담소에 못 있을 것 같아요. 휴가를 갈 예정이거든요.”

.”

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직업이다보니 저도 가끔은 전환이 필요해서요. 다음 상담은 제가 다시 영국에 돌아오면, 그 때 이야기하죠. 얼른 가보세요. 잭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잭은 서서히 걱정이 되었다. 약속시간인 두 시. 그리고 삼십 분. 데이빗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탑에 기대어 왼쪽 손목에 걸린 시계를 수십 번 정도 들었다 내렸다 보기를 반복했다. 삼십 오 분. 여전히 데이빗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잭은 허탈감에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잭이 데이빗에 대해 아는 것? 별로 없었다. 데이빗은 현재 작은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것과 라디오 헤드를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꽤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점. (그는 이런 외적인 이야기를 하기 꺼려했다.) 잭은 그가 시계 속에서 튀어나올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데이빗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잭의 핸드폰이 주머니 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발신자 표시는 뜨지 않았다.


잭입니다.”

미안해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대뜸 사과라니. 잘 못 걸은 전화인가? 아니면 설마, 데이빗? 잭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입을 다물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데이빗?”

맞아요. , 미안해요. 정말요.

지금 어디에요?”

... 뉴욕?


잭은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삐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들만 얼쩡댈 뿐 데이빗일 거라고 의심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잠깐! 잠깐만요. 끊지 말아봐요. 지금 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래요. 그래서, 지금 뉴욕이라구요? 런던이 아니라?”

.

왜죠?”

... 잊었어요. 바빠서. 이 약속이 있다는 것을 쌔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제 말은, 런던에 왔으면서 아직도 뉴욕에 있다고 거짓말을 왜 하냐는 거예요. 데이빗.”


그러니까, 사람의 감이라는 것이 가끔은 제대로 스트라이크를 날릴 때도 있다. 잭은 자신의 넘겨잡은 물음에 데이빗이 입을 꾹 다물고 고민을 하는 모습을 수화기 너머로도 상상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맞췄구만. 잭은 홈런을 시도하기 위해 다시 핸드폰을 고쳐잡고 열심히 떠들어댔다.


데이빗,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제 자리에서 지금 당신이 수화기를 잡고 망설이는 모습이 다 보여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일단 약속 장소로 나와요. 그리고 이야기 해 봐요. 고작 인터넷으로 만난 인간, 서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준 사람이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구요. 봐요, 데이빗. 당신도 절 봤을 거 아니에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해꼬지를 할 사람처럼 보여요?”

...

봐요, 데이빗. 일단 나와요. 나와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전 이미 삼십 분도 넘게 기다렸고. 당신을 보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 유서에 제 사인으로 당신의 이름과 제가 아는 당신의 정보를 적을거구요. 국제경찰이 당신을 찾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죠? 그러니까, 당장. 전화 끊고. 이리로 와요.”


데이빗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잭은 초조한 마음으로 한 쪽 다리를 짚고 섰다. 제발, Yes라고 말해, 데이빗. 그냥 고개라도 끄덕이던가, 뭐든 하라고.


데이빗?”

, 잠깐... 생각에 빠졌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손이라도 흔들고 있을까요?”

금방 갈게요. 당신 말대로, 근처니까.


데이빗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바쁘게 걷는 사람들 틈 사이로 이질적인 가면이 둥둥 떠다녔다. 데이빗은 잭의 눈앞에 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면 아래에 있는 표정이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구멍 사이로 그가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저는 데이빗이에요.”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뉴욕이라 거짓말 하는 데이빗을 설득시켜 제 앞으로 데려놓았다. 하지만 잭은 그 라텍스 재질의 새하얀 가면을 보자마자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제 이유였어요.”

그러니까, 그 가면...”

, 우스운 이야기죠.”

이거 어떨까요. 저는 가면 대신 머플러가 있고. 데이빗, 당신은 가면이 있으니까. 둘이 교환하는거죠. 저는 그 라텍스와 데이트가 아닌 당신과 데이트를 즐기고싶거든요. 설마 피부에 붙어서 떼어지지 않는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그건 아니지만...”

그것도 멋있는 아이템이란 생각이 들지만... 아무리 블라인드 데이트라고 해도 만나서까지 블라인드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잭은 동시에 머플러를 벗어 데이빗의 목에 걸어주었다. , 한바퀴. 그리고 옷도 좀... 구겨졌네요. 혼자 중얼거리며 데이빗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벗겨도 될까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결국 데이빗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조심스럽게 실리콘 재질의 가면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냈다. 얼굴에 밀착되어 있던 탓인지 가면을 벗기는 동시에 살가죽이 같이 딸려 올라왔다.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 짙고 잘생긴 눈썹. 그리고... 지독한 사고의 흔적이 남아있는 오른쪽 얼굴, 잭은 그 얼굴을 훑어보며 그가 겪었을 일들이나, 그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람 헷갈릴 일은 없겠네요.”

나는...”

, 그럼 선택해봐요, 데이빗.”

뭘요?”

뭐긴 뭐겠어요. 식사, 아니면 술. 아니면 둘 다?”


둘 다가 좋겠어요. 데이빗의 대답을 들은 잭은 데이빗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데이빗은 절뚝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래서, 또 저에게 숨기는 건 따로 없나요?”


가벼운 술기운은 그들을 붕 뜨고 속마음을 말하게 만들었다. 롤링스톤즈, 아니면 섹스피스톨즈? 위스키, 아니면 맥주. 고양이 또는 강아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잭이 데이빗에게 몸을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데이빗은 늘어져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항상 왼쪽 눈을 찡그리고 있는 표정은 데이빗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단순히 잭을 헷갈리게만 만들뿐이었다.


숨기는 것?”

런던과 뉴욕을 헷갈렸다던가, 그런거 있잖아요.”

이런 외모인걸 숨긴 것?”

...”

농담이에요.”

혹시 무례한 질문이었나요?”

전혀요. 일단, 전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지 않아요. RISE 읽어 본 적 있어요?”

되게 유명한 잡지 아닌가요? 읽어본 적은 없지만 거기 실린 연예인 가쉽거리가 끝짱이란 건 알고있죠.”

그 외에도 많은 잡지를 출판한 출판업계에서 일하죠. 그리고... 그 곳의 사장이기도 하구요.”


잭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 젠장! , ...데이빗 에......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잭은 이름을 되뇌었고 데이빗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임즈요. 나름 유명인사였는데. 영국까지는 소문이 안 퍼졌나보네요.”

전혀 눈치 못챘어요. 내가 그 데이빗과 채팅을하고, 이렇게 만나다니.”


잭은 앞에 놓인 맥주를 비웠다. 시끄러운 음악 덕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데이빗, 혹시 볼링 좋아해요?”

... 좋아했죠.”

지금도 좋아한다는 뜻이죠?”

좋아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렴 어때요. 제가 좋은 곳 알아요. 같이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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