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요, 그리고 오랜만이네요. 헥터 선생님. 일부러 얄밉게 웃는 것이 분명했다. 헥터는 콧잔등에 걸친 안경을 벗어 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고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헥터의 상담소 한 쪽 벽면의 열린 창문으로 일 월의 차가운 바람이 헥터의 몸을 차게 훑었다.

 

   로이, 상담소에 들어오는 문은 저 쪽이라고 지금까지 정확히 열다섯 번 말했어요.”

   열다섯 번? 정확히는 한 번 더 추가해서 열여섯 번이에요.”

   사실 숫자는 중요한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정확히라는 단어는 옳지 않지 않나요?”

   정확히에 대해서는 제가 사과하죠.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창문은 로이씨의 출입문이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의 비서는 이 곳에 저를 들여보내주지 않는다구요.”

 

   그야, 한 달 전에 로이씨가 이 곳에서 제 환자에게 총을 쐈기 때문이죠.

 

   헥터는 꽤나 권위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의자에 눕듯이 몸을 기댄 후 말을 천천히 늘어트렸다.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상대방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상담의 주도권을 잡고, 상대방이 내뱉는 모든 말을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 목마른 사람들은 그런 헥터의 방식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로이는 헥터가 진지한 표정을 짓든, 단호하게 말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헥터가 좋아하는 정확히라는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로이는 그런 헥터의 방식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헥터씨가 생각하는 그 환자 분은 저와 당신의 관계를 의심하고 찾아 온 아주 무서운 악당들, 그니까 디에고 바레스코 같은 사람들이라구요.”

   바레스코 씨는 제 목숨을 살려주셨어요.”

   , 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어요.”

 

   와중에 나온 로이의 말은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로이는 가끔 남부 아프리카의 작고 더러운 병원에서 헥터가 떨어트린 디에고의 펜을 보았을 때를 추억하곤 했다. 언젠가 로이의 입에서 잔뜩 미화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헥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겁하며 그게 추억이라구요? 나랑 다른 기억을 가진 것 같은데요?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 펜이 아니었으면 헥터와 로이는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헥터도 동감했다.

 

   아무튼, 전 선생님의 목숨의 은인이라고 하여도 한 치의 부족함이 없죠.”

   그리고 제가 아끼던 화분과, 로이씨가 방금 열고 들어온 창문을 깨트리고 저 쪽 벽면에 총알 자국 몇 개도 남겨주시고 갔잖아요.”

   까다로우셔라.”

   가끔 찾아오시는 분들이 저 자국을 가르키며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당황스럽다구요.”

   , 다음에도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선생님에 대한 저의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충분 할 것 같아요.”

 

   결국 헥터는 손을 들고는 항복의 표시라도 하듯 흔들었다.

 

   커피 아니면 홍차?”

   커피로 부탁할게요.”

 

   몸무게에 눌려 반쯤 꺼졌던 쇼파에서 일어난 헥터는 로이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가느다란 갈색의 머리카락이 헥터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로이는 자신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는 헥터의 얼굴을 다시 끌어안았다. 잘생긴 얼굴이 헥터를 보며 온전하게 웃었다. 헥터는 결국 로이가 부탁한 커피를 끓이는 대신 그의 양 쪽 볼을 붙잡고 이마, 콧잔등 그리고 입술에 쪽쪽 댔다. 헥터가 로이에게 입술을 열어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듯이 아랫입술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지만 로이는 고집스레 닫고 있었다. 항상 로이의 고집에 항복하는 것은 헥터였다. 헥터는 마지막으로 로이의 콧잔등에 코를 부빈 뒤 고개를 들었다.

 

   보고싶었어요. 로이.”

   저도요. 일 끝나자마자 달려온 거예요.”

   창문은 안 깨트려줘서 고마워요.”

 

   헥터는 비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로이를 품에서 놔주었다. 로이는 헥터가 앉아있었던 약간 품이 꺼진 쇼파에 자연스레 앉아 헥터의 커피를 기다렸다. 헥터는 열려있었던 창문을 닫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이번에는 무슨 일을 했어요?”

   , 이거 상담인건가요?”

   상담이라기보다는, 보통 연인들의 일상적인 대화라고 해두죠.”

   저번에 선생님을 찾아왔던 그들의 흔적을 뒤쫓았어요.”

   잡았나요?”

   아주 전쟁같았어요.”

   전쟁?”

   , 재밌었다는 뜻이에요.”

   재밌었다라.”

 

   헥터가 천천히 로이의 말을 따라했다.

 

   지금 저의 정신을 분석 하려는 거라면 정중히 사양하죠.”

   , 미안해요.”

   아무튼. 진짜, 안타깝게도 코 앞에서 놓쳐버렸어요.”

   놓쳤다구요?”

 

   로이의 말에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짓고는 커피가루가 담긴 찻잔에 김이 나는 물을 부었다. 헥터는 검은 소용돌이처럼 퍼지는 그것을 티스푼으로 몇 번 저어준 뒤 로이에게 건내주었다.

 

   맛이 좀 이상한데요?”

 

   찻잔에 담긴 커피를 한모금 마신 로이는 인상을 쓰며 헥터를 바라보았다. 헥터는 나머지 찻잔에 물을 붓다말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한 쪽으로 치켜올리며 로이를 돌아보았다. 로이가 헥터의 눈 앞에 자신의 찻잔을 들어 보여주었다.

 

   마셔봐요.”

   분명 전 환자는 맛있게 먹고 갔다구요.”

 

   헥터는 변명을 하며 로이의 찻잔을 받아들이고, 한 모금 마셨다.

 

   멀쩡한데요?”

   . 헥터, 항상 생각하지만 당신은 참 커피를 잘 타요.”

   당연하죠, 그리고 이거 맛 괜찮은데요? , 잠깐.”

 

   여기에 약 탔어요?

 

   흐려지는 시야에 헥터는 멍청하게 눈을 꿈뻑였다. 끄덕이는 로이의 흐릿한 얼굴이 보였다.

 

   당신을 보호하려는거예요.”

   , 잠깐만요... 이건 보호가 아니라구요...”

   헥터. 잘 들어요. 제 실수로 당신과 저의 관계가 들통났고, 당신은 지금 무척이나 위험 한 상태에요. 이건 당신의 목숨을 - ”

 

   안타깝게도 헥터의 귀에는 그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고, 헥터는 분명 로이의 그 말 뒤에 당신의 목숨을 가지고 놀 거예요 라는 터무니없는 상상밖에 들리지 않았다. 남부 아프리카의 작고 더러웠던 병원에서 있었던 악몽이 헥터의 머리를 강하게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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