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가 도착했다.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풍경이 담긴 사진이었다. 보내는 이도, 아무 말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벤지는 어렴풋이 엽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보고싶어. 이단의 목소리가 가슴께에서 들려왔다. 벤지는 한참이나 엽서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한숨을 쉬었다. 바로 손이 닿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곳에는 빛바랜 수십장의 엽서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엽서가 마치 이단이라도 되는 것 마냥 한참이나 쥐고 있다가, 벤지는 가장 뒤의 자리에 엽서를 꽂아 넣었다. 이단이 IMF에서 제명된지 1년이 살짝 넘는 날이었다.

 

   이단의 도주를 도왔다. 이러한 이유로 국장에게 잔뜩 미운 털이 박힌 탓에 오늘도 벤지의 앞에는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잔뜩 쌓여있었다. 망할, 오늘도 혼자 야근 당첨이네. 벤지는 아파오는 머리에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퇴근을 준비하는 주변 요원들과 말을 섞기 싫었던 벤지는 클래식을 튼 볼륨을 최대로 올린 헤드폰을 뒤집어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듯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벤지는 모니터 쪽으로 구부정하게 굽혔던 허리를 피고, 눈을 꿈뻑 감았다 떴다. 이러다 제 명에 못살겠구먼. 들으라는 듯이 크게 중얼거렸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확인해야 할 정보들은 반도 넘게 남아있었다.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날이 그랬다. 818. 사라진 이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IMF. 그리고 흔적 없이 텅 빈 집. 이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거짓인 것 마냥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콧등을 긁적이던 벤지는 약간 음침한 기분이 들었다. 소리가 들리는 화장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 번 물방울이 떨어졌다. 결국 벤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미리 꺼 둔 탓에 화장실 안은 아주 컴컴했다. 물방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벤지의 눈이 어둠에 약간 익숙해지자, 그 안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 벤지는 얼떨떨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글자와 그림들만 본 탓에 자신의 눈이 제 기능을 못하나 싶었다. 벤지는 한참의 적막이 흐른 동안 겨우, 이단? 자신의 예상이 맞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불러보았다.

 

   안녕. 벤지.”

   이단?”

   그래. 나야.”

 

   이 상황에서 벤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저 잘생기고 완벽한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려주는 것. 일 년 동안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자신의 흔적을 지우더니 고작 찾아 와서 한다는 말이, ‘그래. 나야.’ 같은 것 이었다. 벤지는 이단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는 그 생각을 실제로 옮기고, 이단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대로 크게 한 방 얻어맞았다. 이단은 멍청한 표정으로 얼얼한 오른쪽 뺨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인사치고는 좀 격한걸.”

   젠장, 죽은 줄만 알았다구.”

   너한테 생일 축하 받고 싶어서 왔어. 보고싶었어, 벤지.”

   그런 말 하는 걸 보니까 진짜 이단 헌트는 맞네.“

 

   결국 벤지는 화 낼 기운도 잃어버렸다. 이단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볼에 입술을 부볐다. 이단의 입꼬리가 훤칠하게 말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벤지는 이단의 얼굴을 두 손에 넣고 기른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씩 보이는 귓불을 어루만졌다.

 

   생일 축하해, 이단.”

'BENJIET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벤지이단] 전대물 + 빌런벤지  (0) 2015.08.30
[벤지이단] 취향을 밝히는 이단  (0) 2015.08.22
[벤지이단] 떠나는이단  (0) 2015.08.17
[벤지이단] 동거제안  (1) 2015.08.17
[벤지이단] 오랜만에 만난 둘  (0) 2015.08.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