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타AU


얼굴까지 가릴 정도로 물건을 껴안고 계산대로 걸어오는 모습에 눈을 비볐다. 이걸 다 들고 갈 수는 있나요? 묻지 않았다. 귀찮은 일에는 끼지 않는 것이 벤지의 생활 신조였다. 손님이 물건을 하나 들고 오든, 수십 개 또는 수백 개를 들고 오든 그것은 벤지와 관련 없는 일이었고 그는 자신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가 계산대에 물건을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급하게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았다. 아주 급하게, 던져 놓는 물건들에 벤지는 얼굴이라도 맞을까 몸을 움츠렸다. 진정시킬 필요가 있는 손님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벤지는 아침마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벤지가 말을 걸거라 예상을 못했는지 잠깐 행동을 멈추었다.


저는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는 대답 대신 벤지와 똑같은 말투로 인사를 했다.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던 벤지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거나 그도 웃고 있다면 똑같이 웃어줄 생각이었다. 목소리가 좋았던 이유도 있고, 황당한 손님의 얼굴이 궁금했던 이유도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벤자민, 정말 좋은 아침이네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벤지의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벤지는 손에 쥐고 있던 땅콩 통조림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들어서. 그 이름이 아주 달콤하게 들려서.


, 미안해요. 새 것을 가지고 와도 좋아요.”


벤지는 허리를 숙여 한쪽 면이 움푹 파인 통조림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단이에요.”

이단?”

내 이름말이에요. 당신 이름은 벤자민, 그러니까 벤지. 내 이름은 이단이구요.”


. 벤지는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이단. 속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은 이단이 아니라 벤지였다. 계산대 위에 물건을 다 올려놓은 이단은 아예 그 위에 팔을 괴고 벤지를 쳐다보았다.


실례인 건 알지만… 이걸 다 들고 갈 수 있나요?”

벤지.”


이단은 벤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벤지는 토마토 케찹을 들고 있었다. 이단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웃었다. 말 같은 것을 할 필요는 없었다.


십 분 뒤에 퇴근이에요.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변한 것은 없었다. 단지 숨겨왔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벤지는 테이블 밑에 딱 맞게 수납 된 총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이단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겠다며 들어 간지 삼십분 째였다. 벤지는 룸서비스로 시킨 와인과 토마토 주스를 잔에 따랐다.


이단, 룸서비스가 도착했어요.”


이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살인? 감시? 도청? 벤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총이 숨겨진 테이블 밑으로 움직였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단. 벤지는 화장실 문 앞에 섰다.


기다릴게요.”


바케스에 담긴 얼음은 절반 정도 녹아있었다. 이단이 나올 때쯤이면 미지근한 와인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벤지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딸칵. 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벤지는 문을 열고 욕실 벽에 기대어있는 이단을 보았다. 물에 흠뻑 젖은 생쥐꼴이었다. 벤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뭐해요? 얼른 나와요.”

잠시만……잠깐만.”


이단은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벤지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벤지는 이단이 무슨 짓을 했더라도 그를 믿을 자신이 있었다. 영원히 연기를 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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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랑루즈는 곧 성공을 뜻하는 장소였다. 적어도 이단에게는 그랬다. 화려한 데뷔, 완벽한 연기 그리고 배우로서의 성공. 이단은 재능이 넘치는 신인이었다. 다음 연극의 장소는 물랑루즈야. 완벽한 무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물론 춤과 노래도 빠질 수 없지. 이단의 눈앞에 있는 것은 물랑루즈, 즉 성공을 위한 계단이었다.

일이 엉망진창으로 꼬이기 전까지는. 이단을 위해 극의 내용을 써주기로 한 작가가 계단 뒤편에서 머리가 깨진 체 발견 되었다. 그저 그런 치정 싸움 때문에, 말다툼을 하던 연인은 홧김에 그를 바닥으로 밀어버렸다. 손톱은 그의 마지막 발버둥을 보여주듯 흉하게 뭉개져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공의 계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물랑루즈에는 죽은 작가보다 더 훌륭한 작가들이 많았다. 코난 도일과 비견할만한 작품을 출판했지만 홍보의 부족으로 망한 작가, 화려한 문장으로 수많은 이성을 눈물 짓게 만든 이성편력이 무절제한 작가. 까다롭게 살펴보았다. 이 사람은 고집이 세, 이 사람은 이러다가 전 작가 꼴이 나겠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때? 투박한 손가락 끝이 닿은 곳은 영국에서 성공을 위해 물랑루즈를 찾아 온 젊은 작가였다. 이력은 고작 세 줄 정도밖에 안 되어있고 흐릿한 사진으로만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지만. 이단은 오늘 밤 그를 찾아가 자신의 극의 가사를 써 달라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물랑루즈의 밤은 화려하다. 온갖 색의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사람들, 노래를 부르며 유혹하는 매춘부, 즐기기 위해 돈과 보석을 싸들고 찾아오는 구매자들. 화려한 보석들 사이에서 빛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벤지는 날이 밝자마자 물랑루즈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랑을 찾아봐. 돈으로 여자든, 남자든 사서 즐겨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파리에 도착하기 전 친구들이 으스대며 지껄였던 말들이 떠올랐다. 전부 다 헛소리였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특히 사랑은.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다. 새빨간 풍차는 계속해서 돌아갔고, 파리의 모든 것은 지루했다.

벤지는 테이블에 앉아 연거푸 술을 마셨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친구들의 으스대는 꼴이 보기 싫어 홧김에 물랑루즈에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벤지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첫 눈에 반하는 사랑.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랑.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


이봐요.”


창부를 부르지 않았다. 벤지는 취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테이블에 기댔다. 누구신가요. 또는 난 당신을 찾지 않았어요. 목구멍에서 제멋대로 빠져나온 말은 웅얼거리며 흩어졌다. 투박한 손바닥이 벤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벤지는 겨우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확인했다.


꽤 찾기 어려운 곳에 있으셨네요.”


벤지는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느꼈다. 취해서도,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반듯하게 생긴 청년은 벤지가 꿈꿔왔던 바로 그 사랑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그의 손을 잡았다. , 악수. 위 아래로 어색하게 흔들었다.


제이크. 전 이단 헌트입니다. 당신이 쓴 책을 읽어봤어요.”

? 제이크?”


벤지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저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단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 벤지의 말에 담긴 뜻을 생각하던 이단은 머쓱하게 웃으며 벤지의 손을 놓았다.


, 미안해요. 잘못 찾아왔군요.”


이단이 찾는 사람의 부류를 대충 눈치 챌 수 있었다. 물랑루즈에서는 달마다 큰 연극을 한다. 벤지는 물랑루즈에 머물며 연극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쓸데없이 진실을 말해 이단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 저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뇨?”

제이크가 하는 일이요.”

당신도 작가인가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글은 한 번도 쓴 적이 없지만 오기로 저지르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경력도 없는 사람을 쓸 수 없어요.”

파리에서 유명하지 않을 뿐이지 경력은 충분해요! 할 수 있어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앞에 있는 멀쑥하게 생긴 영국인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은 이단이 여태껏 본 사람들의 눈보다 더 반짝였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열정이 있었다. 이단은 그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어설프게 시작한 행세가 잘 될 리가 없었다. 벤지는 글을 쓰는 법을 몰랐고 이단과 그의 단원들은 벤지에게 기대를 너무 많이 주었다. 벤지는 부담스럽게 대사를 내뱉었지만 반응은 처참했다. 사랑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간단한 단어들을 이용해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여전했다. 이단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벤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벤지, 조금 쉬었다 할래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요.”


잠시만 이쪽으로 와보겠어요? 이단은 벤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가 멈춘 곳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분장실이었다. 화장대 위에 두꺼운 먼지가 쌓인 것이 한눈에 보였다. 벤지는 이단이 자신이 필요 없다고 말할까봐 두려웠다.


다시 할게요. 잘할 수 있어요.”

아니, 그건 제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에요.”

이단.”

극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요.”


극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뻔한 사랑, 모두들 한번쯤 해 본적이 있는 사랑 이야기였다. 적당한 위기와 적당한 로맨스 장면이 있는 분명한 사랑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이단의 연기는 평범한 극도 돋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벤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지금요. 혀 뒤축으로 빠져나오려는 말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봐요.”

어떻게요?”

사랑하듯이.”

당신이 그 역할을 해준다면...”

날 그라고 생각하면서 해봐요.”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어두운 분장실은 불을 키지도 않았지만 밝게 빛나는 듯싶었다.


첫 눈에 반했어요. 사랑을 모르고 지낸 날이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이제는 막을 필요가 없었다.


당신과 단 하루만 같이 지낼 수 있다면, 난 모든 걸 버릴 거예요. 내 지위, 돈, 목숨도.”

, 벤지.”


당황한 이단의 표정에 벤지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여기서 조금 더 살을 붙여볼게요.”

작가보다 배우를 해도 되겠어요.”


벤지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직은 고백할 때가 아니었다. 극이 끝나면,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면 고백할 것이었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단지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당신을 속이고 극단에 들어간 것이라고. 용서를 구하며 고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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