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시는 항상 짧은 손톱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디가 굵은 투박한 손끝에 박힌 굳은살은 그가 머리가 자랐을 때부터 악기를 다뤄왔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고, 게리는 그 손을 주물럭거리며 가벼운 손장난을 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게리는 즐겨 피던 담배도 잊고 스테이시의 손가락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그 비슷한 쓸데없는 장난을 쳤다.

 

스테이시는 말없이 열중하고 있는 게리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찔린 건 게리 혼자였다. 게리는 슬쩍 스테이시의 손가락을 놓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

 

퉁명스럽게 시선을 회피했다.

 

혹시 돌려 말하는 건가?”

무슨?”

섹스하자는.”

 

그 노골적인 말에 크게 웃었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배를 잡고 웃은 게리는 목을 가다듬고는 탁자 위에 있는 케이스를 집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며 한 모금을 빨아 스테이시의 얼굴 위로 연기를 뿜어냈다. 매캐한 냄새 사이로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이 보기 좋았다.

 

그것도 좋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게리가 답지 않게 스테이시의 눈치를 봤다는 것이다. 스테이시는 이런 게리의 반응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계획적으로 사고를 치기 전, 또는 우발적으로 사고를 치고 난 후. 게리가 천천히 말을 끌자 답답해진 스테이시는 게리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깡통에 던져 넣었다. 주변에 담뱃재 하나 떨어지지 않는 깔끔한 속구였다.

 

좀 더 빨리.”

그거 섹스 할 때 가장 많이 듣던 소린데.”

 

스테이시의 입꼬리가 비틀리는 걸 본 게리는 두 손을 휘저으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게리는 곧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허리를 숙여 바닥에 탈피 된 껍데기마냥 떨어져 있는 코트의 주머니를 뒤졌다. 별로 깊지도 않은 주머니 속이건만 게리는 괜히 뜸을 들이며 손을 휘저었다. 스테이시의 인내심이 바닥에 닿을 때 쯤, 게리의 손이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왔다.

 

게리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색 매니큐어였다.

 

어때?”

어둠처럼 새까맣군.”

 

뚜껑을 돌돌 돌렸다. 시큼한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게리는 토를 하는 시늉을 하며 다시 뚜껑을 닫았다.

 

검은색 매니큐어처럼 새까맣지.”

뭘 하려고?”

 

게리는 스테이시의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어울릴 것 같거든.”

 

 

스테이시와의 인터뷰는 말단 기자에게 있어서 로또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를 만나는 것은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는 것 보다 어려웠고, 차라리 대통령과 면담을 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농담도 돌아다녔다.

 

싸구려 연애 잡지에서 일하는 말단 기자인 스티브는 극도의 긴장 탓에 겨드랑이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스티브와 스테이시.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스테이시는 수십 명의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무슨 변덕인지 몰라도 스티브를 콕 집어 대기실로 데려왔고, 보시다시피 불쌍한 스티브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자세로 스테이시와의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항상 하고 오시는 검정색 매니큐어에는 혹시 무슨 뜻이라도 담겨있는 건가요?”

 

그가 싸구려 연애 잡지에서 일하는 말단 기자인 이유는 분명했다. 연애 잡지를 단 한 번도 안 본 노인이라도 이 질문을 듣는다면 스티브가 진급을 못하는 이유를 수백 가지는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기실에서 단장을 하던 스트리퍼들은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스티브를 안쓰럽게 쳐다보았고, 그가 스테이시에게 어떤 취급을 받으며 쫓겨날지에 대한 저급한 내용들을 나열했다.

 

이름이 뭐라고?”

 

스티브는 쇳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민망했던 탓인지 마른기침을 하며 스테이시와 눈을 마주쳤다. 스테이시는 웃고 있었다. 스티브는 잠시 이미 자신의 심장은 쿵쾅거리다 못해 터져버렸고, 이것은 사후세계가 아닐까 라는 착각을 했다. 한 주먹 크기인 인터뷰 수첩을 바닥에 던지고 눈을 비볐다. 방금까지도 스티브의 수첩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스테이시가 스티브의 엉덩이를 걷어 찰 것이다. 떠들던 스트리퍼들은 스테이시의 호탕한 웃음에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숨을 죽였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마이크.”

 

스티브의 이름은 마이크가 아니었지만.

 

스티브는 이 대기실에서 살아 나갈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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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문 가장자리에 달린 종이 딸랑이며 내는 소리에 브라이언은 닦던 잔을 내려놓고 그 익숙한 걸음걸이를 반겼다.

 

왔어요?”

 

브라이언은 몸을 돌려 맥주병으로 가득 찬 냉장고의 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차가운 한기가 몸을 한 번에 훑고 지나간다. 숀이 즐겨 마시는 병맥주를 꺼내 바에 얹어 놓았다. 브라이언은 바에 팔을 가볍게 걸치고 숀의 얼굴을 가까이 바라보았다. 희멀건 하게 뜬 눈은 초점이 없었고, 다크서클은 광대 위까지 내려 왔으며 얼마나 피곤했던 모양인지 입술은 허옇게 각질이 다 일어난 상태였다. 브라이언은 그런 숀의 꼴을 보고 두통이 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 무슨 일 있었어요?”

 

숀은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따지지 않은 병맥주를 마시려고 입을 대었다가, 뒤늦게 뚜껑이 따있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오프너를 찾았다. 보다못한 브라이언은 숀의 손에 쥔 병을 뺏어 뚜껑을 따 숀의 눈앞에 놓아주었다. 확실히, 숀은 제 정신이 아닌듯 싶었다.

 

술 마시고 온 거예요?”

 

이번에는 브라이언의 질문이 제대로 귀에 들어온 모양인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숀은 단번에 맥주를 반 쯤 들이마시고 다시 멍청하게 눈만 껌뻑였다. 브라이언은 불만스럽게 팔짱을 꼈다.

 

이봐요.”

?”

무슨 일 있었냐구요.”

아무 일 없었어요.”

 

빈 병을 확인 한 브라이언은 다시 병맥주 하나를 꺼내 숀 앞에 놓아주었다. 뚜껑을 따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숀은 고마워요. 라고 중얼거리고 다시 목을 축였다. 브라이언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고, 인내심 있게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맥주를 세 병 비웠을 때 쯤, 숀은 한숨을 푹푹 쉬며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 일 없는 게 문제예요.”

무슨 뜻이에요?”

 

다른 손님에게 나갈 토닉에 들어갈 오이를 썰고 있던 브라이언은, 숀이 꺼낸 이해 할 수 없는 말에 화들짝 놀라 손을 벨 뻔 했다.

 

아무 일이 없어요.”

 

브라이언은 저민 오이를 잔 안에 말아 넣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평소 숀은 남들에게 쉽게 잘 휘둘리는 성격이라, 잔뜩 우울한 얼굴로 들어와 술만 먹고 주저리주저리 말만 뱉는 이러한 상황이 전혀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럴 때면 항상 오늘은 이러한 일이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요. 슬퍼요. 우울해요. 브라이언이 타 주는 칵테일이나, 싸구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하소연을 하는 게 숀의 일과 비스무리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아무 일 없었다며 우울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 왜 그럴까...”

 

브라이언은 드라이 진을 오이가 들은 잔에 따라 넣으며 숀의 상황을 천천히 되짚었다.

 

일이 너무 지겨워요?”

 

숀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홈런이구나. 아마 브라이언은 '숀 심리생태 전문가 코스'가 있다면 제일 첫 번째로 자격증을 땄을 것이다. 완성 된 진토닉을 가지러 온 주정뱅이에게 대충 눈인사를 한 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숀을 보았다.

 

바로 그게 권태라는 거죠. 이해해요.”

아무 일도 없고, 항상 똑같거든요. 아침마다 들리는 편의점, 출근해봤자 매일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일 끝나고 오는 윈체스터까지 지겨울 정도예요.”

 

, 아니. 물론 윈체스터에서 브라이언이 주는 술을 마시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아니 좋아요. 진짜. 숀은 그 정신에도 지겹다고 단언 한 것은 실수했나 싶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 이후로 숀은 말문이 트인 모양인지 뱉은 한숨과 함께 브라이언에게 넋두리를 털어놓았다.

 

내 인생에서 바뀌는 건 매일같이 들어오는 신형 전자제품밖에 없을 거예요.”

 


브라이언은 출근하는 숀에게 흰 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사직서요.”

윈체스터 그만 두게요? 근데 그걸 왜 저한테 줘요?”

내 사직서는 여기 있고.”

 

브라이언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지조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숀은 브라이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과, 그의 여느 때와 같이 잘생긴 얼굴을 번갈아 세 번 정도 보았고, 브라이언은 그런 숀의 반응을 즐겼다.

 

이건 당신 거.”

잠깐, 나 지금 이야기의 흐름을 못 따라가고 있는데.”

나랑 같이 떠나요.”

어딜요?”

, 여기만 아니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권태로움에 바닥 긁는 숀이랑 브라이언이랑 열대 섬으로 이민 가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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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없는 것 마냥 철제문을 발로 쾅쾅 쳐대던 게리는 양 손은 물론이고 품에 한 가득 거대한 것을 들고 열린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활짝 열린 문 앞에는 반쯤 벗어재낀 몸뚱아리에 제 덩치만 한 호피 가죽 코트를 걸친 스테이시가 있었다. 스테이시는 게리의 품에 들린 거대한 물건에 얻어맞지 않기 위해 뒤로 몸을 살짝 피하며 게리의 동향을 살폈다. 꽤 무거웠던 모양인지 게리의 관자놀이 위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물건은 놓치지 않겠다고 하는 듯이 잡은 손등에는 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스테이시가 안전하게 뒤로 물러나고, 제 눈앞에 물건을 놓을 자리가 생긴 것을 본 게리는 드디어 부들부들 떨리던 팔로부터 물건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스테이시는 빤히 게리를 쳐다보았다. 양 팔이 뻐근한지 한참동안이나 손목을 탈탈 털고, 어깨를 돌리던 게리는 뒤늦게 스테이시의 표정을 알아챘다.

 

다니다가 좋은 게 있어서 주워왔어.”

 

능청맞은 게리의 대답에 스테이시는 그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때고 정체불명의 물건에 관심을 주었다. 뒤집어엎어진 그것은 새까만 알루미늄 재질에 잡다한 버튼들, 그리고 군데군데 붙어있는 스피커가 강하게 자신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필하고 있었다. 스테이시가 제 어릴 적에 사탕보다 더 가까이 뒀던 물건을 알아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허리를 굽혀 엎어진 물건을 바로 돌렸다. 버려져 있던 것 치고 깔끔하게 유지 된 건반과 흑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건의 정체는 신디사이저였다. 스테이시의 검지 손가락에 건반 하나가 눌렸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물건을 다루듯이 자연스럽게 만지는 스테이시의 모습에 게리는 의문을 품었다.

 

네 거야?”

세상에 진정한 내 것이라는 게 존재 하는 건가?”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둘 다 아니라면... 그래, 선물이라고 하자.”

고맙게 받도록 하지.”

 

게리는 바닥에 얌전히 놓여있는 신디사이저를 다시 들어 올려 스테이시의 방으로 옮겼다. 게리. 왔어요? 거실에서 들리는 데이빗의 상냥한 목소리에 게리가 크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려고 했지만, 제 발등에 물건을 떨어트릴 뻔한 이후로 얌전히 스테이시의 방으로 물건을 운반하는 것에 집중했다.

 

근데 이거 소리는 나는 거야?”

연결만 가능 하다면.”

 

말을 하는 동시에 스테이시는 바닥에 놓여져 있는 어뎁터 하나를 찾아 손에 쥐었다. 좌측에 달려있는 작은 구멍에 어뎁터를 꽂고 선을 연결했다. 게리는 가만히 스테이시가 하는 모양을 쳐다보았다.

 

근데, 거 칠 줄은 아는 거야?”

게리 킹. 네가 항상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게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스테이시는 얄밉게 너스레를 떠는 게리를 한 번 힐끗 보고 난 뒤, 물건의 전원을 천천히 밀어 눌렀다. 수 천 시간의 연습 덕분에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힌 손가락을 가볍게 건반 위로 올려놓고, 버튼 몇 가지를 돌려 맞추다가 게리가 지루함에 하품을 할 때 쯤. 미세한 강도까지 조절 할 수 있을 것처럼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내가 술과 섹스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음악이야.”

 

끝이 까진 검은 매니큐어 끝에 눌리는 건반 사이로 느릿느릿한 선율이 흐른다. 스테이시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 무표정 한 듯 보였지만, 집중하는 듯이 살짝살짝 흔들리는 고개와 버림받은 것 치고는 꽤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주 조금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기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원래는 밤에 듣는 음악이지만.”

 

게리는 하품을 하느라 쩍 벌렸던 입을 다물고 행여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선율 사이에 끼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짱을 꼈다.

 

가끔은 이런 낮에 듣는다고 그가 슬퍼하지 않겠지.”

누구?”

쇼팽.”

 

게리는 입을 다물었다. 스테이시의 말은 절반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넘겨 들어도 사는데 (주로 술을 마시거나, 섹스하거나.) 지장은 없었다. 게리는 스테이시의 말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뒤 방 안을 가득 채운 극적인 레치타티보를 즐겼다.

 

훌륭해.”

 

대답 대신 건반 위에 세워져있던 손가락을 떼고 몸을 돌려 게리와 눈을 마주쳤다.

 

더 훌륭한 것도 보여줄 수 있지.”

 

스테이시는 외투를 침대에 던져 놓으며 게리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내 연주를 보여 줄 차례구만. 게리는 헤벌쭉 벌어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문신이 새겨진 스테이시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아쉽게도 스테이시의 목적은 게리와 같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공중에 멈춰진 게리의 손과 그의 멍청한 표정을 힐끗 본 스테이시는 고개짓으로 얼른 따라오라며 재촉했다.

 

 

스테이시는 게리를 집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방에 끌고 갔다. 방문은 기름칠을 하지 않은 모양인지 쇠가 긁히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쌓인 먼지가 게리의 정수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털던 게리는 방 한 가운데 놓여있는 먼지로 뒤덮인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테이시는 삐그덕 거리는 피아노 의자를 끌어 앉았다. 게리는 그 주변을 천천히 돌며 피아노 지붕에 있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묻어나오는 것은 없었다.

 

꽤 마음에 드는 공간이야.”

 

확실히, 게리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스테이시를 본 것이 거의 처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었지만 미세하게 상기된 그의 볼은 여실히 그의 감정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게리는 방 한 구석에 창문 위로 두꺼운 커텐이 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한 손으로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코를 막고 커텐을 한 쪽으로 밀어 치웠다.

 

게리 킹을 위하여.”

 

게리의 앞으로 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리며 창문이 모습을 보였다. 마침 해의 방향이 맞았던 모양인지 주황빛의 태양광이 방 안을 밝혔다. 오랫동안 연주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찾아와 튜닝을 해놓았던 덕분에 피아노의 선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처럼 가볍고, 탄성있게 튕겼다. 게리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고 서 스테이시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눈 위로 숱 많은 속눈썹이 깜빡이고. 왼쪽 가슴에 있어야 할 심장이 손가락에 있는 것 마냥 건반 위에서 생명을 얻어 날뛴다. 날뛰는 손가락 끝을 올라타서 단단히 근육이 잡힌 팔뚝, 험악한 용이 심장을 감싸고 있는 모양세로 그려진 가슴, 어젯밤 게리의 흔적이 남은 목덜미, 그리고 스테이시.

 

스테이시는 게리가 자신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손끝에서 나오는 음표들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었다. 스테이시는 고개를 살짝 돌려 게리를 쳐다보았다. 게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머리칼에 손을 집어넣고,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스테이시의 손가락이 가볍게 건반을 퉁퉁 튕기다가, 천천히 게리의 허리를 잡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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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은 복근은 커녕 바지 벨트 위로 오동통하게 밀려나오는 뱃살을 보고 매일 다이어트를 걸심했다. 문 밖을 나서기 전에 남색 목도리를 두르고, 보풀이 살짝 일어난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치고. 마지막으로 정갈하게 기른 수염 사이로 아주 살짝 통통해진 볼살을 보며.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기필코 살을 뺄 것이라고 결심한다.

   그 날은 더더욱 그랬다. 매일같이 킬킬대며 '너 요즘 좋은가보다? 살이 붙었네.' 라고 하는 게리. (게리 딴에는 칭찬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군 말 없이 토스트를 씹어 먹던 엔젤까지 잭에게 바지 사이즈가 몇이냐고 물어왔다. 잭은 토스트 위에 무화과 잼을 펼쳐 바르다가 엔젤의 질문에 손에서 잼 나이프를 놓쳤고, 상처받은 얼굴로 '그렇게 말 할 필요까진...' 우물거리다가 식탁을 박차고 나왔다. 오는 봉급으로 가족에게 옷을 하나씩 선물해 주려던 엔젤에게 있어서는 정말 어리둥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앞에 새우구이를 맛있게 하는 베트남계 음식점이 새로 생겼어요. 같이 갈래요?"

   하지만 그렇게 상처를 받고도. 그 결심도. 곧 잭의 사랑스러운 연인인 데이빗의 권유에 무너지고 만다. 같이 갈래요? 그 말에 안 돼요. 데이빗, 저 요즘 살 쪄서 당분간은 식단 조절을 해야돼요. 란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잭은 냉혈안이 아니었다. 적어도 잭은 데이빗에게 그런 말을 할 수있는 사람의 피는 붉은 색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이죠! 저는 양념보다 소금을 친 새우가 더 맛있더라구요."

   그런 이유로, 잭의 다이어트 결심은 항상 원점으로 돌아간다. 데이빗은 잭이 잘 먹는 모습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잭은 자신을 볼 때 데이빗의 날카롭고 커다란 눈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사랑했다.

   소금구이. 양념구이. 그리고 새우만 먹으면 질린다는 이유로 작게 잘라 구운 소고기까지. 잭은 어느새 테이블 위 가득 찬 음식들을 보며 마음 속으로 엉엉 울었다.

   데이빗은 사고로 반 쪽 몸을 제 몸처럼 쉽게 쓰지 못했다. 잭은 껍질이 까서 나오지 않은 새우를 하나하나 발라 데이빗 앞의 식기에 가져다 주었다. 살살 녹는 통통한 새우의 살에 데이빗은 다시 한 번 이 곳에 잭을 데려오길 잘 했다는 생각과 함께 식당을 알려준 이단에게 고마워했다. 몇 개를 더 집어먹던 데이빗은 막상 잭이 새우와 고기를 안 먹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알러지 있어요?"
   "아뇨, 좋아해요. 천천히 먹고 있는 것뿐이에요."

   확실히 잭은 그 전처럼 열심히 먹지 않았다. 데이빗이 잭의 고민을 알 리가 없었다. 잭은 실제로 새우를 먹으러 오기보다는 박살을 내러 온 사람마냥 집중해서 새우를 까고 있었다.

   "잭."
   "네?"
   "먹기 싫으면 말해요. 나가요. 우리."
   "저는 데이빗이 먹는거 보는 것만으로도 배불러요."
   "잭, 우리 사이에 벌써 그런 사소한 거짓말 쌓이는 거. 정말 싫어요. 무슨 일 있어요?"
   "정말 없는데..."

   결국 데이빗은 포크를 테이블 위에 소리나게 내려 놓았다. "잭."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잭의 이름을 불렀다. 잭은 나름 '요즘 살이 찐 것 같아서요.'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에 걱정을 하는 남자처럼 보일까 걱정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데이빗을 속일 각오는 더더욱 없었다. 끈적한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휴지로 닦으며 결국 실토했다.

   "요즘 너무 잘 먹었더니... 살이 좀 쪘어요."

   데이빗은 잭이 그런 말을 할 거란 상상을 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그는 잭이 남들보다 길쭉하고 마르면 말랐지 통통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황해 새우가 식도에 걸리는 느낌이었고, 데이빗은 두세번 기침을 했다. 그 기침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는지 잭은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싫어할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요. 미안해요."
   "아, 아니. 싫어한다고는 한 적 없어요. 잭이 그런 고민을 한다는게 너무 의외여서."
   "의외요?"
   "한 번도 살이 쪘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 그건 그렇고 저야말로 미안해요. 데이트 한다고 데려가는 곳마다 이런 음식점 이라서. 몸이 이렇게 된 이후로, 뭘 해야 성공적인 데이트가 될지 조금... 혼란스러뒀거든요."

   데이빗은 말을 조심스럽게 고르기 위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래도, 제 몸 때문에 일반적으로 데이트 하는... 산책이라던가, 운동이라던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나는게 이런 식당밖에 없었고."
   "아뇨. 절대 아니에요. 데이빗, 당신과 함께 하는 식사는 매일 최고고, 항상 새로워요. 내 말은 이렇게 먹기만 하는 데이트를 하다가는... 제가 조만간 굴러다닐 것 같았거든요. 데굴데굴 구르면서. 인사할 수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오해를 하고 있었네요. 저는 잭이 저와 함께하는 어, 데이트를. 지루해한다고 생각했어요."
   "전혀요! 항상 짜릿한걸요. 좋아요, 우리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내일부터 당신의 걸음 속도에 맞춰서 센트럴 파크도 걷고, 캐치볼도 하고. 지치면은 근처 서점이라도 들어가서 잡지나 보는 거예요. 데이빗은 여기서 절대로 내 속도가 잭에게 방해가 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고."

   잭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전보다는 약간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인 것 자체가... 좋으니까요."

   그 말에 결국 데이빗은 미소지었다.

   "잭, 당신은 너무 로맨티스트예요."
   "칭찬이죠?"
   "물론. 얼른 먹고 근처라도 걸어요. 살 찌는 건 내일부터 걱정하고."
   "사실 아까부터 먹고싶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데이빗이 건내주는 새우는 식어 차가웠지만 맛있었다.
   잭이 속도를 내자 식사는 금방 끝이났다.



   "화장실 가서 손 좀 닦고 올게요. 아무래도 껍질 때문에 좀 끈적이네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안 춥겠어요?"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지만 잭은 곧바로 가디건을 벗어 데이빗에게 건냈다. 잭은 가디건 안에 깔끔한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데이빗은 바로 앞에 놓여져있는 벤치 위에 앉았다. 오랜만에 신경을 쓸 일이 많았던 탓인지 저려오는 팔을 주무르며 잭을 기다렸다. 평일 오후였지만 이단의 말대로 동네에서 꽤 유명한 식당이었는지 유동인구가 많았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한지 몇 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데이빗은 카운터에서 계산하려는 듯이 서성이는 잭을 발견했다.

   "잭, 계산 했어요."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데이빗은 벤치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그의 등 뒤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잭?"
   "어?"

   잭과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잭이 아니었다. 벤지? 언젠가 들었던 그의 쌍둥이 형제의 이름을 떠올렸다. 놀라서 휘청이며 뒤로 넘어갈 뻔한 데이빗을 벤지가 빠른 반사신경으로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미안해요. 잭인줄 알았어요. 어,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음, 혹시... 데이빗?"

   벤지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간 이단에게서 들었던 꽤 최근에 사고가 나 몸이 불편한 막내동생 이야기를 떠올렸다. 데이빗은 벤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고 한 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이며 고개를 까닥였다.

   "안에 입은 옷이 똑같아서... 헷갈렸어요."
   "정말요? 쌍둥이라서 그런지 가끔 이런 거까지 겹쳐서 죽겠다니까요."
   "보기 좋네요."

   말하는 동시에 데이빗은 로이와 이단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의식적으로 잊어버렸다.

   "인사라도 하고 갈래요?"
   "아니에요. 어차피 금방 나갈거예요. 여기 맛있더라구요. 맛있게 먹고 즐거운 데이트 해요. 벤지."
   "데이빗두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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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페그 필모그래피 숀 오브 더 데드 숀 / 톰 크루즈 필모그래피 칵테일 브라이언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야기는 5분 전으로 돌아간다. 엄마한테 줄 꽃을 연인에게 선물해주고, 언제나 그랬듯이 말실수 한 번. 그리고 밀려들어오는 죄책감들. 결론만 말하자면, 숀은 리즈와 헤어졌다. 항상 겪었던 그런 연인 사이의 말다툼이나 위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숀은 리즈와 진짜로, 정말로, 진심으로. 헤어졌다. 결국 끝을 본 것이다. 진짜 끝.

장식 된 꽃다발은 길거리에 널린 흔해빠진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이불과 한 몸이 된 에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윈체스터?” 동시에 숀은 이미 집과 같은 공간이 된 술집의 이름을 불렀다. 에드는 반응이 없었다. 숀은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되는게 없다고 한탄을 하며 에드의 이불을 거칠게 들췄다.

 

젠장, 오늘은 날 좀 내버려둬,”

 

에드는 어쩐 일인지 기분이 몹시 안 좋아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무슨 일인지 위로를 하며, 거실로 나가 같이 게임 한 판 하자고 능청맞게 받아쳤겠지만 오늘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숀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에드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 숀은 윈체스터 앞에서 자조 섞인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기름칠이 덜 된 문을 힘껏 열었다. 문 귀퉁이에 달린 싸구려 종이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울렸다. 그 소리에 윈체스터의 사장인 존은 문 쪽을 힐끗 봤지만 곧 신경을 끄고 제 할 일을 했다. 숀은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들고 존과 멀리 떨어져 있는 바에 앉았다. 누구랑도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한 편으로는 그 누구랑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정쩡하게 든 손으로 존을 부르려했지만 존은 고기를 손질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안녕, 친구. 바로 주문 할래요?”

 

숀은 밑에서 불쑥 튀어나온 정수리에 놀라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실제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손에 든 지갑을 그 머리통에 던져버렸다. 이마 한 가운데를 맞고 떨어진 지갑이 바닥에서 뒤집어졌다. 이마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쥔 남자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미안해요. 반가워서 인사했는데 당신이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네요.”

, 안녕하세요?”

이름이?”

.”

반가워요. . 오늘부터 윈체스터에서 일하게 된 브라이언이라고 해요.”

 

숀은 브라이언의 커다란 눈을 마주 봤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이 부담스러워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자연스럽게 뒤로 넘긴 풍성한 브루넷, 이야기를 언제든 잘 들어줄 것 같이 상대방을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 그리고 자신감이 넘쳐보이는 저 미소. 이 시골 동네에 있을 평범한 사람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브라이언은 바닥에서 지갑을 주워 숀에게 건냈고 숀은 그 안에서 지폐를 꺼내 브라이언에게 건냈다.

 

맥주랑, 위스키 샷으로 세 개요.”

 

브라이언은 숀이 건내는 돈을 받아들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비췄다. 바에 가지런히 놓인 꽃 장식만 멍청하게 쳐다보던 숀은 그런 브라이언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몇 번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브라이언은 축축하고 차가운 잔에 담긴 맥주와 독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잔 세 개를 숀의 앞에 놔주었다. 숀은 제 눈 앞에 있는 술들을 한번에 들이 마셨다. 거의 목구멍에 부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브라이언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숀의 얼굴이 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구요?”

 

밖은 밤바람이 쌀쌀했다. 윈체스터는 그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술에 취한 사람을 보호해줬다. 그 안은 술을 시키거나 서로의 험담을 하며 낄낄대는 소리로 가득했다. 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을 반쯤 감고 브라이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숀에게 하는 질책은 아니었다.

 

병 째로 가져다 줘요.”

, 지금 당신 꼴을 보면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닌 거 같아요.”

 

숀은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였다. 브라이언은 새하얀 천으로 광이 날 정도로 닦던 유리잔을 내려놓고 숀을 위로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고민했다.

 

잊어버려요. , 맥주가 있고 안주도 있잖아요?”

 

숀은 바에 얼굴을 처박고 어깨를 들썩였다. 브라이언은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젠장, 맥주고 안주는 무슨! , 봐요. 저는 지금 원래 살던 곳에서 어느 미친 여자한테 걸려서 온 동네에 제 섹스 라이프고 뭐고 다 소문났어요. 그리고 가게에서 제가 믿었던 스승과 주먹다짐을 했구요. 덕분에 그 쪽에서 바텐더 일은 하지도 못하게 생겼다구요.”

 

브라이언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못 알아챌 정도로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술을 먹은 것은 숀인데 자신이 대신 취한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실망감에서 비롯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숀과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모습이 프로답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제야 숀은 바에 눌린 얼굴을 떼고 눈물 가득한 눈을 굴려 브라이언을 쳐다보았다.

 

공부는 포기했고, 나이는 먹어가고. 결국 도망치다시피 온 곳이 이 곳이에요. 이 동네에 그럴듯한 술집에 취직한 다음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했어요. 근데, 지금 제 모습을 봐요. 여자친구와 네 시간 전에 헤어진, 맥주와 싸구려 위스키만 마시는 술주정뱅이와 이런 이야기나 나누고 있잖아요.”

 

브라이언은 말을 마치고 숀에게 얼음이 담긴 차가운 물을 건내주었다. 숀은 훌쩍이며 브라이언의 호의를 받아 마셨다.

 

, 미안해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계속 축 쳐져있지는 말라는 말이었어요.”

 

숀은 훌쩍임을 멈췄다.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윈체스터의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남은 술을 한번에 털어넣은 숀은 이전부터 대답이 없었다. 브라이언은 존에게 눈인사를 하고 옆에 빼놓았던 외투를 걸쳤다. 존은 손질한 고기 중 남은 것들을 종이봉투에 담아 브라이언에게 던져주었다. 브라이언은 휘파람을 불며 고기가 든 봉투를 챙겼다. 물론 바에 거의 눕다시피 한 숀을 챙기는 것도 있지는 않았다.

 

이봐요. ? 일어나서 갈 수 있어요?”

“... 당연하죠.”

 

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 기세에 밀려 바닥에 엎어졌다. 브라이언은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바에 덩그라니 놓여진 지갑을 챙겨 손의 외투에 넣어준 다음, 그의 허리를 잡고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집이 어디에요?”

집이요? 에드와 피트가, 기다릴텐데... 오늘은... 그냥... . 방금 뭐라고 물었어요?”

집이 어디냐구요.”

 

브라이언은 숀을 다시 한번 불렀지만 숀은 눈을 꾹 감고 상황을 회피하기에 바빴다. 꽤 곤란한 상황이었다. 브라이언은 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브라이언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뒷걸음질을 쳤고 숀은 결국 바닥에 여지껏 먹은 술들을 다 토해냈다.

 

 

결국 브라이언은 윈체스터에 흩뿌려진 그 흔적들을 다 치우고, 토하고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숀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 바닥에 그를 눕혔다. 새로운 동네에 걸맞는 성대한 환영식이었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손님이기도 한 그를 길바닥에 내버리고 도망갈 수 없었다. 무거운 짐 ()을 끌고 온 덕에 홧홧하게 올라오는 열기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브라이언은 단정하게 입은 셔츠를 벗고 숀을 침대에 눕혔다.

 

 

으악!! 숀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깼다. 입 안에서 텁텁한 기운이 맴돌았다. 심지어 눈 앞에 보이는 천장은 처음 보는 패턴이었다. 속은 쓰리고, 무슨 짓을 한 건지 눈은 침침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났네요?”

 

브라이언이 새빨간 음료가 담긴 잔을 내밀며 눈썹을 까닥였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숀은 모든 것이 기억났다. 부끄러울 정도로. 차라리 기억이 안 났으면 좋았을텐데. 브라이언은 숀에게 얼른 받으라는 듯이 그 잔을 흔들었다. 점도가 높은 새빨간 액체가 잔 안에서 흔들렸다. 숀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것을 받았다.

 

숙취에 좋은 술이에요.”

 

. 그 단어만 들어도 속이 미식거리는 기분이었지만 브라이언의 정성을 생각하여 숀은 그 음료를 단번에 들이켰다. 브라이언은 잘 받아 마시는 숀을 보며 웃음지었다. 토마토 맛이 입 안에서 강렬하게 맴돌았다. 숀은 눈을 꿈뻑이고, 입을 침으로 축였다.

 

, ... 어제는 죄송했어요.”

 

브라이언은 숀의 손에 들린 빈 잔을 회수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덕분에 숀은 더 죽을 맛이었다.

 

값은 오늘 윈체스터에서 받을게요. 올거죠?”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숀은 브라이언의 집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둥지둥 짐을 챙겨 나왔다.

 

놀랍게도. 리즈와 헤어진 숀은 그 날. 단 한번도 리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톰 크루즈의 필모그래피 콜래트럴의 빈센트 / 사이먼 페그의 필모그래피 몹시티 핵키 내쉬


성공했다. 그 말을 제외하고 할 수 없는 말은 표현력의 부족으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돈을 받았고, 필름을 넘겨주었다. 좆같은 미키. 좆같은 마피아들. 결국 승리 한 자는. 내쉬 해키였다. 바로 나라고 씨발. 좆같이 두툼한 봉투를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아니 마치 핀이 뽑힌 수류탄이라도 되는 듯 소중히 들어 올렸다. 결국 그것은 터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터지지 않을 것이다. 폭탄을 제어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남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나를 지킬 수 있는 핵폭탄이 되는 법이었다.


바닥에 늘어져있는 세 구의 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자동차에 올라탔다. 정황은 완벽했다. 고위 관직에 올라가 있는 두 명의 마피아와, 경찰계에 떠오르는 차기 유망주 하나의 총격전. 1925년의 런던에서는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그 곳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코미디언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사라지기만 하면 되는 완벽한 일이었다.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긴장으로 인한 악력으로 인해 손 등에는 굵은 핏줄이 거세게 올라와있었다. 시동소리에도 겁을 집어먹으며 언덕을 내려와 공중전화를 찾았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다 두 번이나 그것을 놓쳐버렸다. 초조했다.


자스민?”


여전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 대신 신호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제발, 제발. 목이 말랐지만 바싹 마른 입에서는 침이 나오지 않았다. 제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애원했다. 여전히 전화는 받지 않았다. 튕겨져나오는 동전을 주워 넣고, 신경질적으로 공중 전화의 버튼을 쾅쾅 때려 눌렀다. 신호음이 끊겼다.


자스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엇을 그리 애타게 찾나.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수화기를 떨어트렸다. 수화기 속에서 그 목소리가 뭐라뭐라 떠들었지만 듣지 않았다. 들을 수가 없었다. 억울함에 눈물이 나왔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이유를 되물었지만 대답 해줄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한참을 벽에 머리를 박으며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현실로 닥친 공포감이 와닿았다. 난 죽을 수 없다. 죽을 수 없다. 당장 이 좆같은 나라를 떠나고...


그 이후의 핵키 내쉬는 무엇을 해야하지?

살고싶었다.

 

사업을 시작했다. 목숨 값 천 만달러는 시작에 불과했다. 목숨을 지키는 데에는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주변에 대한 의심은 깊어져갔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LA에 도착해 협박으로 얻은 돈으로 차린 것은 작은 연예관련 사업이었다. 시작은 미묘했다. 하지만 수를 읽는데 탁월한 능력 덕분인지 사업은 점점 세를 불려갔다. 그 것이 몸집을 키울수록 비례해 겁도 나날이 커져갔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옷차림, 새로운 성격. 살고 싶었다. 살고 싶은 욕망이 커질수록 해키 내쉬는 점점 죽어갔다.


새로운 경비 시스템을 적용했다. 이 시스템은 수 천 개의 cctv가 사장님께 위협을 가하는 모든 것들을 잡아내고, 무엇보다 현존하는 열쇠 중 이 잠금쇠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마 없을겁니다.


그래서, 이게 날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란 말이요?”

당연하죠, 사장님. 이 시스템은 ...”

당장 계약하죠.”

설치는 바로 지금 가능합니다.”

 

그 계약서에 찍은 도장은, 생각해보면 그 계약서도 가짜였겠지만. 손에 딱 들어맞는 권총을 쥔 남자가 총을 들고 집 안으로 처들어올 수 있게 하는 열쇠가 되어주었다.

 

제발, 제발...”

그렇다면 그 녀석들을 건들이지 말았어야지.”

죽이지, 죽이지 말아주세요. 살려달라구요. 살고싶어요.”

멍청한 짓이었어.”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얀 머리는 총구를 겨눴다. 턱을 힘 껏 처들고 양 발으로 땅바닥을 밀어 이 상황을 피해보고 싶었지만 그 총구와, 빌어먹을 하얀 머리는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목소리는 마구 떨리고 이제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놈은 석고상처럼 가만히 서 총만 겨눈체 우스운 꼴을 관찰하는 듯 싶었다.


그 새끼들이 돈을 얼마를 줬죠? 제가... 그 두 배를... 드릴게요.”

아쉽게도 이 세계에서는 신용이 중요하지.”

나는 아내도 잃고, 모든 걸 다 잃었어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듣기에도 우스웠다. 하지만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냥 목숨만은 온전히 내가 가지고 싶다구요...”


한참이 지났지만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총구를 들이막은 두 손바닥도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려왔다.


“핵키 내쉬.”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사형 선고를 위해 부르는 이름이라도.


최근에 뉴욕에 갔던 적이 있었지. 난 도시가 싫지만, 복수를 위해 부르는 놈들의 위치는 대부분이 도시더군.”


그는 말을 이어가면서도 한 치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다이아에서 공연하는 당신을 봤어. 그 이후로도 그 곳을 찾아갔지만 보이지 않더군. 몇 주동안 머물며 당신을 찾았지만, 없었어. 어디 있었지?”

다이아? , ... 저는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는 곳이 없어요. 그냥, 돈만 주면 돌아다니지... 저도 그 곳은 그, 두 번 밖에 안 가봤거든요.”

그 쓰레기같은 도시에 몇 번이나 들렀지만, 흔적도 없더군. 그 때 연락이 왔지. 당신의 사진을 주며 당신을 찾아 죽여 줄 수 있냐고. 꽤 위험한 조직을 건드렸더군.”


그는 드디어 총을 갈무리해 집어넣었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바닥에 바싹 붙였던 등을 떼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뉴욕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찾기는 쉬웠지.”

, 저를 죽이지 않을 건가요?”

죽이지 않는다고? 아니.”

, ...”

살려두는 거라고 하지.”


원하던 대답을 들었지만 그 속에서 새어나오는 의문을 감출 수는 없었다. 목구멍을 혀뒤축으로 막아 튀어나오는 말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

? 불만이 있는건가?”

아뇨! 불만이라니. 그런 건 전혀 없어요.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다이아에서 들은 당신의 농담이 재밌었다고만 해두지.”

꿈을 꿨어요.”


데이빗은 앞에 놓인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목구멍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찻잔은 미지근하고, 홍차는 뜨거웠으며 말을 이어가기에 모든 것이 최적의 시기였다. 단물 빠진 체리맛 풍선껌. 현재 자신이 있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맛의 홍차였다. 연갈색 액체를 들어 식도를 적시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타임스퀘어를 미친 듯이 달리는 꿈. 그 곳에서 유일하게 숨쉬고 있는 사람은 데이빗 혼자였다.


데이빗의 눈 앞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꿈을 꿨었던 그 날 밤의 상상을. 의사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하게 변했다. 의사는 인내심이 깊었다. 일그러진 얼굴 탓에 발음이 불분명한 데이빗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들었지만 그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측은하다는 시선도, 동정이 담긴 말도 건내지 않았다.


그게 꿈이란 것을 자각한 이유는 ... 그 곳에 사람이 전혀 없어서도 아니고, 아무리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아서. 그런 시시한 이유가 아니었어요.

거기서는 제 몸이 멀쩡했거든요. 절뚝이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내가 원래 가졌던 몸처럼."

꿈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는 깊은 무의식 속을 표현하고는 하죠.”

프로이트의 이론을 말할거면 당장 집어치워요. 히스테리? 그런건 이미 많이 겪었고, 그 죽은 양반보다 제가 더 잘 알걸요.”

데이빗.”

마음속 깊은 욕망이라. 좋죠. 아무튼, 꿈인걸 깨달았을 때는 저는 멈출수도 없고 그 꿈에서 깰 수도 없더군요. 다리는 움직이고 있고, 꿈이란걸 깨닫자마자 점점 아파오고. 거울이 없었지만 볼 수 있었어요. 제 얼굴이 점점 불에 타고 자동차 파편에 찔리고 일그러지는 것도.”


일 월의 날씨 탓에 창문을 다 닫아 놓았지만 어디서 바람이 세어 들어오고 있었다. 데이빗은 춥다고 말하는 대신 이미 다 식은 홍차를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


그 고통이 느껴졌어요 ... 꿈인데. 그 거지같은 통각이 제 기능을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이게 정말 꿈인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거부. 분노. 슬픔. 그 각가지의 감정이 저를 휩쓸고... 그 다음 단계는 포기였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 바닥에서 그걸 발견했어요.”

파란 목도리요?”

맞아요. 저번 상담에서 말씀드렸던 그거요.”

오늘도 하고오셨네요.”

그걸 주워서 둘렀죠. 알 수 없는 안도감. 약을 먹은 것 마냥 고통은 없어지고 ... 소피아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 그리고 잭. ... 눈 앞에 잭이 있었어요. 그는 저를 안아줬죠. 그냥 친구를 안아주듯이. 포옹의 정의를 알려주듯이. .”

행복했나요?”

행복이요?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은 것 같은데요.”

말 그대로에요. 당신이 그 꿈에서 느낀 것을 떠올려봐요. 목도리를 두르고, 잭이 당신을 안아줬을 때. 당신은 소피아가 떠올랐나요? 아니면 지금 몸이 불편하다는 것이 느껴졌나요?”

“...전혀요.”

사람들에게 따라 행복의 의미는 다 다르죠. 데이빗, 너무 완벽하고 모든게 정확해야 한다는 것도 강박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고...”


데이빗은 그제서야 주머니에서 진동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어정쩡한 자세로 겨우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 데이빗이 전화를 받으려고 액정을 누르기 위해 손가락을 뻗었을 때 진동은 멎어버렸다. 의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버튼을 누르려고 시도를 했을 때 데이빗은 무심결에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찬 바람이 세어 나오던 창문. 두툼한 코트에 장갑까지 낀 잭이 그를 향해 열심히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데이빗은 잠시 고민하다가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잭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고 벽 한 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았다. 다섯시 오 분. 이미 상담시간이 오 분 정도 초과된 상태였다. 푹신한 쇼파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의사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오늘도... 유익했어요. 닥터 헥토르.”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다음 상담은 이번에 똑같이 이 주 뒤 이 시간에 보면 되는 건가요?”

... 이번에는 제 사정 때문에 아마 한 달 가량은 상담소에 못 있을 것 같아요. 휴가를 갈 예정이거든요.”

.”

남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직업이다보니 저도 가끔은 전환이 필요해서요. 다음 상담은 제가 다시 영국에 돌아오면, 그 때 이야기하죠. 얼른 가보세요. 잭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잭은 서서히 걱정이 되었다. 약속시간인 두 시. 그리고 삼십 분. 데이빗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탑에 기대어 왼쪽 손목에 걸린 시계를 수십 번 정도 들었다 내렸다 보기를 반복했다. 삼십 오 분. 여전히 데이빗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잭은 허탈감에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잭이 데이빗에 대해 아는 것? 별로 없었다. 데이빗은 현재 작은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것과 라디오 헤드를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꽤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점. (그는 이런 외적인 이야기를 하기 꺼려했다.) 잭은 그가 시계 속에서 튀어나올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데이빗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잭의 핸드폰이 주머니 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 발신자 표시는 뜨지 않았다.


잭입니다.”

미안해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대뜸 사과라니. 잘 못 걸은 전화인가? 아니면 설마, 데이빗? 잭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입을 다물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데이빗?”

맞아요. , 미안해요. 정말요.

지금 어디에요?”

... 뉴욕?


잭은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삐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들만 얼쩡댈 뿐 데이빗일 거라고 의심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잠깐! 잠깐만요. 끊지 말아봐요. 지금 좀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래요. 그래서, 지금 뉴욕이라구요? 런던이 아니라?”

.

왜죠?”

... 잊었어요. 바빠서. 이 약속이 있다는 것을 쌔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제 말은, 런던에 왔으면서 아직도 뉴욕에 있다고 거짓말을 왜 하냐는 거예요. 데이빗.”


그러니까, 사람의 감이라는 것이 가끔은 제대로 스트라이크를 날릴 때도 있다. 잭은 자신의 넘겨잡은 물음에 데이빗이 입을 꾹 다물고 고민을 하는 모습을 수화기 너머로도 상상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맞췄구만. 잭은 홈런을 시도하기 위해 다시 핸드폰을 고쳐잡고 열심히 떠들어댔다.


데이빗,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제 자리에서 지금 당신이 수화기를 잡고 망설이는 모습이 다 보여요.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일단 약속 장소로 나와요. 그리고 이야기 해 봐요. 고작 인터넷으로 만난 인간, 서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준 사람이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구요. 봐요, 데이빗. 당신도 절 봤을 거 아니에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해꼬지를 할 사람처럼 보여요?”

...

봐요, 데이빗. 일단 나와요. 나와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전 이미 삼십 분도 넘게 기다렸고. 당신을 보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 유서에 제 사인으로 당신의 이름과 제가 아는 당신의 정보를 적을거구요. 국제경찰이 당신을 찾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겠죠? 그러니까, 당장. 전화 끊고. 이리로 와요.”


데이빗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잭은 초조한 마음으로 한 쪽 다리를 짚고 섰다. 제발, Yes라고 말해, 데이빗. 그냥 고개라도 끄덕이던가, 뭐든 하라고.


데이빗?”

, 잠깐... 생각에 빠졌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손이라도 흔들고 있을까요?”

금방 갈게요. 당신 말대로, 근처니까.


데이빗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바쁘게 걷는 사람들 틈 사이로 이질적인 가면이 둥둥 떠다녔다. 데이빗은 잭의 눈앞에 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면 아래에 있는 표정이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구멍 사이로 그가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저는 데이빗이에요.”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뉴욕이라 거짓말 하는 데이빗을 설득시켜 제 앞으로 데려놓았다. 하지만 잭은 그 라텍스 재질의 새하얀 가면을 보자마자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제 이유였어요.”

그러니까, 그 가면...”

, 우스운 이야기죠.”

이거 어떨까요. 저는 가면 대신 머플러가 있고. 데이빗, 당신은 가면이 있으니까. 둘이 교환하는거죠. 저는 그 라텍스와 데이트가 아닌 당신과 데이트를 즐기고싶거든요. 설마 피부에 붙어서 떼어지지 않는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그건 아니지만...”

그것도 멋있는 아이템이란 생각이 들지만... 아무리 블라인드 데이트라고 해도 만나서까지 블라인드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잭은 동시에 머플러를 벗어 데이빗의 목에 걸어주었다. , 한바퀴. 그리고 옷도 좀... 구겨졌네요. 혼자 중얼거리며 데이빗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벗겨도 될까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결국 데이빗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조심스럽게 실리콘 재질의 가면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냈다. 얼굴에 밀착되어 있던 탓인지 가면을 벗기는 동시에 살가죽이 같이 딸려 올라왔다.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 짙고 잘생긴 눈썹. 그리고... 지독한 사고의 흔적이 남아있는 오른쪽 얼굴, 잭은 그 얼굴을 훑어보며 그가 겪었을 일들이나, 그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사람 헷갈릴 일은 없겠네요.”

나는...”

, 그럼 선택해봐요, 데이빗.”

뭘요?”

뭐긴 뭐겠어요. 식사, 아니면 술. 아니면 둘 다?”


둘 다가 좋겠어요. 데이빗의 대답을 들은 잭은 데이빗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데이빗은 절뚝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래서, 또 저에게 숨기는 건 따로 없나요?”


가벼운 술기운은 그들을 붕 뜨고 속마음을 말하게 만들었다. 롤링스톤즈, 아니면 섹스피스톨즈? 위스키, 아니면 맥주. 고양이 또는 강아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잭이 데이빗에게 몸을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데이빗은 늘어져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항상 왼쪽 눈을 찡그리고 있는 표정은 데이빗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단순히 잭을 헷갈리게만 만들뿐이었다.


숨기는 것?”

런던과 뉴욕을 헷갈렸다던가, 그런거 있잖아요.”

이런 외모인걸 숨긴 것?”

...”

농담이에요.”

혹시 무례한 질문이었나요?”

전혀요. 일단, 전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지 않아요. RISE 읽어 본 적 있어요?”

되게 유명한 잡지 아닌가요? 읽어본 적은 없지만 거기 실린 연예인 가쉽거리가 끝짱이란 건 알고있죠.”

그 외에도 많은 잡지를 출판한 출판업계에서 일하죠. 그리고... 그 곳의 사장이기도 하구요.”


잭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 젠장! , ...데이빗 에......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잭은 이름을 되뇌었고 데이빗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임즈요. 나름 유명인사였는데. 영국까지는 소문이 안 퍼졌나보네요.”

전혀 눈치 못챘어요. 내가 그 데이빗과 채팅을하고, 이렇게 만나다니.”


잭은 앞에 놓인 맥주를 비웠다. 시끄러운 음악 덕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데이빗, 혹시 볼링 좋아해요?”

... 좋아했죠.”

지금도 좋아한다는 뜻이죠?”

좋아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렴 어때요. 제가 좋은 곳 알아요. 같이 갈래요?”

엔젤은 보기보다 술을 못마신다. 로이는 엔젤에 대해 관찰한 기록지에 여든 일곱 번 째의 사실로 이것을 적으리라 마음먹었다. 말 그대로, 항상 우리 술 마시러 갈래요? 라는 스무 번의 시도 끝에 엔젤은 겨우 승낙의 의사를 내비췄고 로이는 옳다꾸나. 근처 펍에 엔젤을 데려가 과일 홉이 향긋하게 들어간 맥주 여섯 잔과 데낄라 샷 두 개를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로이는 입가심으로 주문 한 얇게 저민 오이가 들어간 진토닉을 홀짝이며 몸을 가누기 어려워하는 엔젤의 어깨를 잡아 바로 서는 것을 도와줬다.


엔젤 경사님. 조심해야죠.”

으음, 로이, 대체 나한테 뭘... 먹인 거예요?”

맥주랑, 데낄라. 그리고 탄산음료 조금. 오해는 말아요. 저도 같이 마셨으니까요.”

속이, 좋지 않네요.”

여기 데낄라가 조금 독하네요.”


로이는 엔젤의 앞에 있는 한 모금이 남은 샷을 입에 털어 넣으며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수확을 건진 것이라해도 모자름이 없었다. 무엇보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의 엔젤 경사님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었다. 고프로를 챙겨올 걸. 로이는 핸드폰에 달린 카메라로 엔젤의 달아오른 얼굴을 몰래 찍어 남기며 후회를 했다. 물론 엔젤은 바닥만 쳐다보고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로이의 검은 속을 깨달을 일은 전혀 없었다.


약은 안 돼요.”

어어, 경사님. 저도 경찰이라니까요.”

경찰이 아니라, 경찰관.”

네에, .”



엔젤은 눈을 가늘게 떠 로이를 쳐다보았다.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날, 엔젤은 최근들어 옆집에 이상한 사람이 사는 것 같다는 신고를 받고 그 이상한 집을 찾아갔고, 이상한 집에 있던 이상한 남자 로이 밀러는 신고를 받고 찾아왔다는 엔젤에게 명함 대신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엔젤의 방호복에 권총을 들이밀었다.


공무집행 중이니, 조용히 입 다무시고 나가주세요.’


물론 그 말을 듣고 엔젤은 가만히 있을만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엔젤은 바로 로이를 덮쳐 밀었고, 평화로운 마을에 정의심 투철한 엔젤 경사가 있을 거란 것을 상상도 못한 로이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갔다. 총은 저 멀리, 엔젤과 로이는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로이가 쫓던 마약상이 저격총으로 로이의 어깨에 총상을 남기고 도망갔을 때서야 그들의 싸움은 멈출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로이는 진짜로 인터폴에서 도망친 마약상을 쫓아 공무를 집행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아무 것도 몰랐던 엔젤을 꽤 과격한 방식으로 쫓아낸 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로이가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자 엔젤도 더 이상 그 사실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우선 도망친 마약상을 잡아 넘기는 것이 우선이었고, 로이는 엔젤의 도움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건은 두 사람의 협업으로 무사히 종결되었다.


어찌저찌 범죄의 누명은 풀렸지만 그동안 쌓인 불신은 지워 낼 수 없었다. 로이는 그 사건 이후로 엔젤의 동네에 남아 자기도 경찰()이라고 우기며 엔젤의 일들을 도와주거나, 미묘한 선에서 방해하며 약올렸다. 그래도 사건을 해결하며 쌓아온 정이라고, 엔젤은 로이를 냉정히 밀쳐 낼 수가 없었다. 로이는 정이 아니라 사랑이었지만.


술이 위장 속에서 섞이는 기분이었다. 엔젤은 결국 이대로 있다간 바닥에 토를 하는 실수를 저지를 것이란 위기감에 몸을 떨었다. 로이는 앞에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도움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댔고 엔젤은 로이의 잘생긴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 치웠다.


화장실... 화장실에 좀 가야겠어요.”


엔젤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이 파도마냥 밀려왔다가 쓸려나간다. 화장실까지 같이 가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이를 다시 앉히고, 엔젤은 자신에게 덤비는 테이블을 열심히 외면하며 화장실까지 기어가다시피 걸어갔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익숙한 검정 코트. 숱 없는 머리. 담배 냄새. 술 냄새. 게리.


씨발! 문 안 닫아?”


게리는 제 밑에 앉아있는 남자의 두툼한 허벅지를 매만지며 소리 질렀다. 엔젤은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말 대로 해줄 기력마저 싸그리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문을 닫아 준 건 어느새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 온 로이였다. 엔젤은 번뜩 든 생각에 손을 휘저으며 질문했다.


로이,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수요일이요.”

젠장.”


엔젤은 그제서야 대니가 달력에 날짜를 하루씩 밀어 체크해놨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늘이 수요일. 그러니까 제 큰 형인 게리가 술집을 이용하는 날인 것을 기억해냈다. 엔젤은 제 손으로 게리를 경찰서에 집어 넣고 싶지 않다며 펍을 이용하는 날을 나눠서 이용하기로 했고, 월수금일요일은 게리가 펍에서 진탕 마셔도 엔젤이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속은 어때요?”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것 같네요.”

경사님, 화장실 좋은 모텔 아는데 거기 갈래요?”


정말로. 오늘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엔젤은 로이가 이끄는 대로 휘청이며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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