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나도 온라인으로 바뀌지 않는 표시에 잭은 암담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잭은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닫은 후 다시 한 번 문자를 보내보았다. ‘데이빗,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그리고 보내기 버튼. 오 분 정도 기다리다가, 다시. ‘혹시 내가 실수라도 한건가요? ;(’ 고민하다가 슬픈 표정까지 넣어서. 이제 진짜로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핸드폰 액정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었다. 온라인 채팅 어플리케이션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건 꼴불견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 소용없는 혼잣말로 환기가 될 속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잭은 자신이 데이빗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데이빗은 말 그대로 흔해빠진 온라인 채팅 어플리케이션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잭이 데이빗이라고 부르는 이름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잭이 데이빗을 데이빗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아이디가 ‘david76’ 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빗이 실명이라면 아마 그 뒤의 숫자는 그가 태어난 년도겠지. ,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잭이 아는 데이빗은 즐겁고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조니 미첼과 모네의 진품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그들을 좋아하고, 스노우 보드를 즐겨 탄다고 했다. 데이빗을 알기에는 그것들이면 충분했다. 잭은 쉽게 그의 유려한 말솜씨에 빠져 들어갔고 그를 만나기를 원했다. 잭은 자신이 충분히 외로워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새로운 만남을 원했다.


머리를 감싸 쥐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어디 사냐고 물어볼 걸. 이와 비슷한 수많은 후회들이 잭을 잡고 흔들었다. 피하지 않고 흔들렸다. 차라리 실체가 있는 무언가가 정신이 없을 정도로 흔들어줬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그 뒤에 테이블을 뒤집어 흔들 만큼의 큰 진동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대도시와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운 광경에 잭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메시지에 적혀있던 주소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메시지에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잭이 사는 곳에서 새벽에 비행기를 탄다면 이른 오후에 도착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잭은 다시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막연히 생각했다. 생김새는 모르지만 그 외의 것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잭이 당도한 곳은 꽤 커다란 주택 앞이었다. 잭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문을 두드렸다. 안은 조용했다. 잭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세 번 정도 반복했을 때, 드디어 문이 열렸다. 잭의 눈앞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잭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의외의 인물께서 친히 주신 주먹이 날아왔다. 무방비 상태였던 잭은 그대로 얼굴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봐.”


온 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위험하게 풍기는 남자는 방금 잭을 때렸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꽤 친근한 말투로 잭을 불렀다. 당황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잭의 앞에 있는 남자는 데이빗이 아니었다.


데이빗?”


그는 잭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그가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잭은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어보였다. 하지만 잭은 지푸라기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찌됐던 그는 데이빗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다. 잭은 한순간의 분노로 일을 망칠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었다.


저기.”


젠장, 방금 목소리는 모자란 사람이 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스테이시.”


하지만 스테이시는 신경을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직도 현관에서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잭을 힐끗 본 스테이시는 그를 내버려두고 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초대받지 않은 곳에 온 기분이었다. 현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잭은 조심스럽게 그의 집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색하게 앉은 잭에게 스테이시는 맥주를 던졌다. 잭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작위적인 몸짓으로 테이블 위의 병따개를 집었다. 스테이시는 노골적으로 잭의 얼굴을 훑었다. 마치 심판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잭은 최대한 그의 시선을 모르는 척 하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스테이시. , . 그러니까, 말이죠.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너의 가슴 속 불꽃을 찾으러 온 거겠지.”

?”


입 안에 머금은 맥주를 바닥에 깔린 카펫에 흘릴 뻔 했다. 잭은 겨우 추스르고 스테이시를 쳐다보았다. 스테이시는 여전히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내가 널 초대했어. 그 것을 찾을 수 있도록.”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스테이시. 잭은 듣는 것을 관두었다. 잭은 이곳에 온 이유를 곧 잊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넓은 집에 스테이시 혼자 사는 것은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짐작이 맞았다.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려 잭은 맥주병에 고정했던 시선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스테이시와 비슷한 얼굴을 했지만 반쪽이 망가진 남자. 그는 잭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숨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다지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자동차 바퀴가 두 번은 밟고 지나간 것처럼 찌그러진 얼굴은 다시 스테이시에게 향했다.


?”


형제군. 잭은 속으로 생각했다.


데이빗. 이 쪽은 잭이야.”


처음 듣는 이름만 늘어간다. 아니, 데이빗

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국 카펫에 남은 맥주를 잔뜩 흘려버리고 말았다. 이번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데이빗이라구요?


? ?”


데이빗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빗?”


다시 한 번.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스테이시가 술병을 흔들며 대답했다.


내가 초대했어.”


초대라. 이 상황과 제일 안 어울리는 단어가 틀림이 없었다. 데이빗은 머리가 아파오는 모양인지 관자놀이를 몇 번 누르다가 잭을 불렀다. 데이빗은 비틀거리며 잭을 안내했다


기다란 복도 벽에 조니 미첼과 모네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잭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아주 좋은 취향이에요.”

.”

이렇게 직접 보니까 더. 당신도 마찬가지...”

관둬요.”


데이빗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벽에 기대 잭을 쳐다보았다. 끔찍한 침묵이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끔찍하지 않았다. 그래서 잭은 데이빗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르지만. 놀랍지는 않아요.”

놀랍지 않다니. 그거야말로 아주 놀라운 이야기네요.”

놀란게 딱 하나 있다면. 생각보다 키가 좀 작은 걸요? 운동을 즐긴다고 해서 저는 덩치 큰 사람이 나올까 겁을 먹었었는데, 다행이네요. , 기분 나쁘다면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능청스럽게 조잘조잘 말하는 잭의 모습에 데이빗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 과거죠. 얼굴이 이렇게 망가지기 전에 이야기에요. 미안해요. 당신을 속였어요.”

전 속은 적 없어요.”

그만 위로해줘도 돼요. 마찬가지에요. 익명 뒤에 이런 얼굴이 숨어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데이빗.”

아무튼, 스테이시한테 고마워해야겠네요. 당신이 이렇게 찾아올줄 몰랐어요. 방에 들어가서 술 좀 더 마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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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거대한 털뭉치를 보았을 때, 찰리에게 떠오른 감정은 충격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까웠다. ? 그 덫은 타깃을 위한 것이었지, 늑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 놓은 인간을 위한 교묘한 덫에 짐승 따위가 걸려드니 찰리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찰리는 천천히 늑대를 살펴보았다. 자신에게 위험한지 판단하기 위하여. 늑대는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르렁 거리는 가래 낀 소리는 덤이었다. 눈 한 쪽은 일자로 그어진 흉터와 함께 감겨 있었고, 코는 건조하게 일어난 것이 건강이 좋아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다. 찰리는 기다란 총으로 늑대의 배를 콕콕 쑤셔대며 건드렸다.


살아있나?”


혼잣말이었다. 늑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찰리는 총을 거둬들었다. 총알을 낭비 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덫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고, 비쌌다. 찰리에게 이런 것은 매우 중요했다. 비싼 것 그리고 싼 것. 찰리는 죽어가는 늑대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좋은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 덩치에 저 정도로 윤기 나는 털가죽이면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무두질은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그만한 값은 톡톡히 해주었다. 말만 잘 하면 덫 두세 개는 더 놓을 정도의 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찰리는 조심스럽게 늑대의 앞으로 다가갔다.


찰리가 다가가자 늑대의 주둥이가 위로 들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였다. 위협적인 소리에 찰리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뒷꿈치에 밟히는 미끄러운 눈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씨팔. 상스러운 목소리로 욕을 했다. 늑대는 끊임없이 목을 울렸다. 찰리는 계속해서 욕을 뱉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늑대의 목숨은 찰리의 한 손에 들려있었다. 늑대는 찰리에게서 도망가려 몸을 일으키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새까만 털 곳곳에 새하얀 눈이 묻었다.


자세히 보니, 한 쪽 다리가 성하지 못하다. 찰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병신한테 농락당한 꼴이군. 바지에 묻은 축축한 눈덩어리를 거칠게 털었다. 늑대의 숨은 더 가빠졌다. 찰리는 다시 총을 들었다. 깔끔한 뒤처리, 깔끔한 죽음. 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죽음의 냄새를 맡았나봐?”


찰리는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늑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프지 않게 해줄게. 그 편이 좀 더 값을 더 받겠지.”


장전했다. 가늠쇠 한 가운데에 늑대의 머리통이 오게 두고,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찰리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총을 살폈다. 총알이 없었다. , 젠장. 바보 같은 실수를 했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지 주머니와 재킷을 살펴보았지만 여분은 없었다. 괜히 신경질을 부린다고 시체에 총알을 여러 발 더 쏜 탓일 것이다. 찰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덫은 산 속 깊은 곳에 있었고, 쫓던 타깃은 이미 멀리 도망갔을 테고, 덫은 소용없게 되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다 죽어가는 거대한 늑대 한 마리. 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 여기 가만히 있을 거지?”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어디 갈 곳도 없으니까.”


혼잣말이었다

늑대는 대답 같은 것을 하지 못하니까. 찰리는 발목까지 쌓인 눈을 푹푹 밟았다. 눈이 더 쌓이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찰리는 당황했다. 확실히 당황했다. 늑대는 사라졌다. 대신 덫에는 인간이 걸려있었다. 뒤질 때가 됐나. 헛것이 보이네. 두꺼운 장갑을 벗어 눈까지 비비며 자신의 눈앞에 쓰러져있는 덫에 걸린 벌거벗은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피부는 힘이 잘못 닿는다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찰리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며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 정신 좀 차려봐.”


손가락으로 뺨을 쿡쿡 찔렀다. 찰리는 그제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눈 한 쪽은 일자로 그어진 흉터와 함께 감겨 있었고 야윈 광대뼈와 살갗이 일어났지만 꽤 다부진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찰리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뭉툭하게 잘린 손목.


, 말도 안 되는데. ...”


찰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에게 들은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가죽을 벗겨 파는 것보다 이런 것에 취향이 있는 사람에게 팔아 넘기는게 더 돈이 되겠다.


외투를 벗어 그의 몸에 덮었다. 죽은 시체는 반값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데려가야 했다. 덫에 걸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패인 발목을 급히 수습했다. 엉성한 손놀림으로 건드리니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겨우 붙잡아 떼어 냈다. 그는 정신이 들었는지 흐릿한 눈으로 찰리를 올려다보았다.


수인이라고 미리 말하지 그랬어.”


그는 입을 열기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찰리는 낄낄 웃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럼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집이라고 하기는 그런 은신처였다. 몸을 눕힐만한 장소가 있었고, 음식을 해먹는 장소는 먼지가 두껍게 쌓인지 오래였다. 찰리는 등 뒤에 업은 남자를 두툼하게 깔린 이불 위로 던지다시피 내려놓았고, 덕분에 그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차. 뒤늦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름이 뭐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어설픈 영어에 찰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

편한대로 부르게. 클라우스 아니면 슈타우펜.”

슈펜이 좋겠어. 꽤 친해보이잖아?”


슈타우펜은 입을 다물었다.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은 찰리의 취향이 아니었다. 찰리는 다소 성급해 보이는 몸짓으로 방 안을 빙빙 돌며 슈타우펜에게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대부분의 질문은 무시당하거나, 단답으로 끝났다.


왜 그곳에 있었지?”


쉽게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막상 슈타우펜이 입을 다물고 있는 꼴을 보니 찰리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특히 밤새 눈보라를 온 몸으로 맞고 있던 사람이라면 더욱

말하기 싫으면 천천히 말해도 돼.” 

덧붙였다.

상처가 회복되면 당장 떠나겠네.”

떠나겠다고?”


어색하게 웃었다. 세워놓은 계획이 백지로 돌아갈 판이었다. 찰리는 슈타우펜에게 옷가지를 건네며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 늑대인줄 알고 그랬던 건 미안해. 난 또, 수인. 아니, 사람인줄 몰랐지 뭐야.”

익숙하니까 괜찮다네.”

그으래.”


찾아온 적막. 옷가지와 마른 몸이 부딪혀 버석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 삼 자의 입장에서 보건데, 찰리는 정말이지 어색했다. 찰리는 삐그덕대는 자신의 몸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분간은 마음 편히 있으라구.”


당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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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파일이 사라졌다.

파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마냥 감쪽같이 없어졌다.

니콜라스는 천천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E-011060. 사라진 사건 파일의 사건 번호였다. 보통 사건 번호는 사건이 접수 된 연도와 각각의 서에서 정해놓은 법칙에 따라 몇 가지의 부호를 조합해서 일련의 번호로 나열해 놓는다. 고작 스치듯이 본 것이지만 파일 정 가운데에 적혀있던 사건 번호는 니콜라스의 머릿속에 정확히 박혀있었다. 그 사건이 접수된 것은 적어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건 외에도 처리 할 다른 일이 많았던 니콜라스는 파일을 잠시 우선순위 밖으로 밀어 놓았다.

분명히 그 때까지만 해도 파일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켄터배리 대학 정치 및 사회학과를 수석으로 졸업 한 니콜라스는 자신이 기억하기로 마음먹은 모든 것 그리고 사건과 관련 된 단서라면 무엇이든지 기억하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단 한 가지, 그 전 날 술을 먹지 않았을 때만 빼고 말이다. 니콜라스는 다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니콜라스는 시점은 술을 먹기 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오후 일곱시 이십사. 조용하고 범죄율이 낮은 동네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경사는 교통 단속은 물론 소매치기나 도둑질 같은 자질구레한 범죄를 일으키고 다니는 잡범들을 잡아 법을 지키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도맡아왔다. 그날따라 속도광들이 한 곳에 모여 집회라도 연 모양인지 교통 단속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성추행범 두 명을 잡아 유치장에 가두어 놓았다. 일을 마치고 경찰서에 복귀한 니콜라스가 시계를 보았을 때는 오후 일곱시 이십사 이었다. 정확히.

현장 외에도 할 일은 많다. 니콜라스는 기동복과 방탄복을 벗어 캐비넷 안에 넣은 뒤 근무복으로 갈아입었다. 현장에서 일이 늦게 끝났기에 할 일은 많이 쌓여있었다. 잡범들의 신원을 등록하고, 유치장을 한 번 둘러본다. 대니가 권하는 초코 케이크는 한 번 정도 거절하고, 결국 거절이 통하지 않아 모니터 앞에 일회용 접시에 담긴 케이크 하나를 둔 체 문서 작성을 시작한다.

오후 여덟시 이십분. 근무시간은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 접수 된 파일들이 니콜라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 간 것도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언제나 자신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빈 파일을 책상 위로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내 사랑스런 동생아!”

젠장. 게리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 한 니콜라스는 책상 위에 머리를 박았다.

근무지에는 왜 찾아온 거야.”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노크라도 할 걸 그랬나?”

어느새 니콜라스의 앞으로 다가온 게리는 파일이 가득 쌓인 책상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나도 경찰서는 지긋지긋 하거든. 근데 천하의 니콜라스 경찰님도 놀라 자빠질 소식을 하나 들고 왔어.”

경찰관이라니까.”

니콜라스는 반사적으로 게리의 말에 대꾸를 하다 입을 다물었다. 피곤에 지친 니콜라스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게리의 표정은 매우 신이 나 있었다.

지금 집에 누가 있는줄 알아?”

스테이시?”

, 내가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면 실망인데. 벤지가 왔어. 십년만이지? 아니, 이십년이던가?”

이번에는 게리의 말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연락도 없었잖아!”

잭이 전화로 전해주는 것보다는 직접 듣는 걸 더 좋아할 거라고 그러더라.”

게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정말로 놀라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사건 파일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니콜라스는 다시 머리를 고쳐 짚었다.

지난 밤 형제의 회포를 풀기 위해 술을 위장에 들이 붓다시피 마셨고, 숙취로 절여진 뇌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니콜라스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확실한 건, 외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파일은 책상 위에 그대로 제 내용물을 품은 채로 있었을 것이었다.

대니, 이 근방의 어제 자 오전 여섯시부터 오늘 오전 여섯시까지의 cctv 기록이 필요해.”

 

 

대니는 한 아름의 비디오테이프를 품에 들고 왔다. 니콜라스는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니가 건네어주는 테이프를 받아 실행했다. 오전 일곱 시, 출근하는 니콜라스 경사의 모습이 보인다. 특이한 사항은 없으며 그 뒤를 이어 경찰서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니콜라스는 약간 지루해진 표정으로 비디오의 배속을 높였다.

오후 여덟시까지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다. 게리가 [잔디를 밟지 마시오] 간판을 무시하고 난간을 뛰어넘어 잔디를 밟고 들어 온 것만 빼면. 곧 이어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니콜라스와 게리가 경찰서를 빠져나온다. 열 시 오십 분. 니콜라스는 버튼을 눌러 영상을 느린 속도로 돌렸다.

이게 내가 잘 못 본게 아니라면...”

이 사람 지금...”

하늘에서 떨어진 거야? 니콜라스는 대니의 넋이 나간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다섯 번 정도 테이프를 돌려 보았지만 여전히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인물은 멋진 자세로 데굴데굴 굴러 아무렇지도 않게 경찰서 내부로 침입했다.

아는 사람이야?”

전혀. 얼굴도 알아 볼 수가 없어.”

도둑?”

없어진 게 하나 있긴 해.”

니콜라스는 테이프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제 오후 네 시 경에 접수 된 사건 파일이 분실 됐어. cctv에 잡힌 사람이 단순한 도둑이길 바라는 건 엄청난 우연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이 사람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침입 한 거야.”

어제 접수 된 사건 파일이라면...”

이 사람은 피의자 본인이거나, 공범이거나. 어떻게 됐든 증거 하나 없게 됐으니 일이 복잡하게 됐네.”

- , 이거 어제 내가 문서작업 하던 파일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니콜라스는 대니의 말을 한 순간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대니는 꽤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한 말을 되풀이하여 말했고, 엔젤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자마자 그가 보일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밝은 표정을 하고 대니를 한 번 꼭 안아주었다.

E-011060. 니콜라스가 근무하고 있는 경찰서의 소재지는 CIA에서 수배 중인 요원 하나의 고향이었다. 빈틈없는 CIA는 그가 칩거할 가능성이 있는 장소 곳곳에 요원의 수배령을 내렸고, 그의 고향에 수배령이 닿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드까지 제거 할 생각은 못했나보군. 망할 자식. 수배자이든, 공범이든 니콜라스는 그 둘을 잡아 CIA에 넘길 것이다. 이를 까드득 깨물며 다짐했다.

수배 중인 요원의 이름은 이단 헌트였다.

 

 

당분간 집에 못 들어올 것 같아.”

바쁜 일이라도 생겼어?”

좀 큰 건수를 잡은 것 같거든.”

... 큰 건수라면?”

“CIA에서 수배중인 범죄자가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 아직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하지. 꽤 위험 한 인물 같아.”

니콜라스는 공범이 있다느니, 수배자가 경찰서 내로 침입 한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확실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니콜라스의 선택은 매우 옳은 것이었다. 벤지는 엔젤이 쫓고 있는 수배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었고, 니콜라스의 집념은 그와 비등할 정도였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이야기였다. 니콜라스의 머릿속을 모르는 벤지는 침을 꼴깍 삼켰다. 퀭한 눈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니콜라스는 벤지에게 있어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벤지는 니콜라스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니콜라. 내가 십 오년 만에 왔는데 변한 게 없구나? 아직도 일에 푹 빠져 살고 있네.”

초조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니콜라스는 거짓말 탐지기보다 무섭다. 아무리 벤지가 지난 몇 년간 거짓말 탐지기와 동거동락 하며 살았다고 해도 니콜라스의 매서운 눈초리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예전에는 더 심각했단 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니콜라스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벤지를 쳐다보았다.

, 서운하다고 해야 되나?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도 모르잖아.”

, 말 잘 했다. 너 그래서 지금까지 뭐하다 온 거야?”

직업병 나온다. 그거 나쁜 경찰 맞지? 난 좋은 경찰이 보고싶은데. ”

말 돌리지 말고.”

벤지는 입을 다물었다. 엔젤은 벤지의 꾹 다문 입술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해결하지 않는다면 더 복잡해질 수도 있는 문제야. 금방 처리할 수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과로사 할 마음은 없거든.”

니콜라스의 단어 선정은 벤지에게 있어서 불길하게 다가 올 뿐이었다. 처리? 벤지가 알고 있는 니콜라스는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아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그 상대가 이단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 너도 혹시 수상 한 사람 있으면 바로 연락 주는 거 잊지 말고.”

벤지는 겨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가 눈치 채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니콜라스는 벤지의 침울한 표정을 쉽게 잡아내었다. 니콜라스는 벤지의 표정이 지루함과 무료함에서 기인한 표정이라 지레짐작했다. 결국 노트북을 닫았다.

나가자. 오랜만에 같이 산책이나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망설이던 벤지는 엔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해서 엔젤의 수사를 미루는 것이 벤지의 첫 번째 목표였다.

 

 

엔젤의 수사를 미루는 것이 벤지의 첫 번째 목표였다. 하지만 상황이 어렵게 되어 버렸다. 벤지는 멀리서 운동이라도 하는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으로 뛰어오는 이단을 발견했고, 반갑게 벤지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단의 모습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벤지는 이단에게 간절한 눈짓으로 안 돼와 비슷한 신호를 보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이단은 벤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주고는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니콜라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니콜라스.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벤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니콜라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단과 벤지를 번갈아 보다가, 이단이 내밀은 손을 뒤늦게 발견하고 악수했다.

소개가 늦었나요? 존이라고 합니다.”

이단의 빠른 판단력에 벤지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수십 번 쳐댔다.

미안해. 일이 끝나면 소개 시켜주려고 했는데...”

아직도 말을 안 한 거야? 서운한걸. 벤지.”

손에 단단히 잡힌 굳은살과 악력이 심상치 않았다. 니콜라스는 이단과 맞잡은 손을 떼고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교통 관리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직업의 특성 상 출장이 잦은데, 이번에 어떻게 제 휴가와 벤지와 휴가가 맞았네요. 아쉽게도 아홉 시간 정도 뒤에는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지만.”

벤지와 같이 왔나요?”

그렇죠. 벤지가 가족들을 소개 시켜준다고 잔뜩 기대 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약속을 못 지키게 됐네요.”

니콜라, 존은 범죄자가 아니야.“

강하게 노려보는 눈에 벤지가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니콜라스는 영 탐탁치 않아보였다.

곧 떠나신다니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은 필요 없겠군요.”

이단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무래도 식사는 나중에 해야 같네요.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 아무래도 잠깐 존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벤지는 니콜라스의 눈치를 살폈다. 니콜라스는 벤지를 한 번 노려봐 주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된 일 이었다.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낯선 이방인, 경찰서를 날아서 들어 온 침입자, 석연찮은 벤지의 표정. 세 가지가 합쳐 얽힌 실타래처럼 니콜라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글로스터셔 샌드포드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한 통속이었던 동네 주민들, 이십 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살인 사건.

랜드 마크 하나 없는 작은 마을에 여행자들이나 외지인이 정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만 해도 니콜라스는 새로운 얼굴을 두 명이나 볼 수 있었다. 혈육인 벤지와, 그의 애인인 존. 아니면 세 명, 또는 네 명일지도 모른다. 니콜라스는 이단의 얼굴을 모르고 존이 이단일 경우도 배재해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 외부 cctv에 찍힌 사건 파일 도난의 피의자가 이단이라는 자일 가능성, 이단이 아니라 제 3자일 가능성 모두.

가족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니콜라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육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의 뒷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존과 반갑게 인사하던 벤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사명과 신념을 생각하며 그 얼굴을 떨쳐내었다.

엔젤은 그 길로 경찰서에 바로 도착했다. 해가 쨍쨍 내리 쬐는 날 덕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한 번 닦고,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 항상 놓여있는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을 작동 시키고. 구석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어 입을 대고 마셨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의자에 앉고 나서야 경찰서가 이상하게 조용함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봤지만 좁은 경찰서 안에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니? 토마스? 마이크? 근무번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살펴보며 그 위에 휘갈긴 이름들을 하나씩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니콜라스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차여진 권총을 빼어 들었다.

양 손에 힘이 잡히지 않았다. 약을 먹은 것처럼 온 몸은 흐물흐물하게 녹고 시야는 흐릿하게 변했다. 니콜라스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버티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으로 번진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경사님, 정신이 드나요?”

니콜라스는 헛구역질을 하며 눈을 떴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매스껍죠? 근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몸에 해는 없을 거예요.”

여전히 웩웩거리던 니콜라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헛구역질을 하는 것을 멈추었다. 눈두덩이에 닿는 까칠한 재질의 천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뒤로 젖힌 손목은 단단한 밧줄에 의해서 묶여놓았다. 다리는 묶어놓지 않은 모양인지 앞뒤로 움직일 수 있었다. 당황하지 않았다. 쓰러질 때부터 니콜라스는 자신이 이렇게 될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조용히 손목을 움직여 밧줄의 세기를 가늠했다.

“...이단 헌트?”

틀렸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이단 헌트의 파일을 가져간 사람이겠군.”

시야가 차단되니 예민해진 청각은 작은 옷깃이 스치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고무 밑창을 덧댄 운동화가 시멘트 바닥을 밟는 소리, 걸을 때 마다 스치는 얇은 점퍼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니콜라스라고 불러도 되겠죠?”

허락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어요. 니콜라스, 저는 돌려 말 하는 것을 잘 못해요.”

무슨 말을 할지는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이단 헌트를 그만 쫓아요.”

상대방은 무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니콜라스는 그를 도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니콜라스의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니콜라스에게 한 뼘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협박인가?”

니콜라스,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매듭을 풀기 위해 꿈틀거리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니콜라스는 작게 욕을 읊조렸다. 꽤 단단히 묶어 놓았는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죄가 없어요.”

직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에 대해 폭행, 협박을 가하는 당신은 방금 죄가 하나 더 추가됐겠네. , 증거인멸에 관한 죄도 잊으면 안 되고.”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밧줄은 어느 정도 헐거워졌다. 가만히 앉아서 의자와 연결 된 매듭은 손만 움직인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겠지만 강한 충격을 준다면 예를 들어, 누구를 내리친다면. 쉽게 풀릴 수 있을 정도였다. 니콜라스는 그가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오기를 바랐다.

여기서 빠져 나간다면 난 그를 당장 잡아 CIA에 넘길 거야.”

당신이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날 도청하고 있었지?”

한 걸음 더.

자랑은 아닌데, 예전에는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많이 해 본적이 있어요. 도청기 하나 붙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

이단 헌트. 그가 내 동생과 교제를 하는 사실이... 이 사실을 변하게 하지는 않아.”

경사님과 같은 곳에서 일했다면 우리는 좋은 동료가 됐을 거예요.”

가까이 왔다.

그가 니콜라스의 옷깃에 있는 도청기를 떼기 위해 손을 뻗을 때, 니콜라스는 다리에 온 힘을 실어 그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니콜라스는 곧이어 어깨로 그를 강하게 밀어내었다. 바닥에 넘어진 모양인지 둔탁한 소리가 건물 안을 울렸다. 몸을 돌려 의자와 함께 그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녹이 슬은 철제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스는 갑자기 끼어 든 불청객들에 의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엎어졌다.

한 쪽 손이 자유를 찾았다. 니콜라스는 눈을 가린 천을 벗어 던져버렸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은 최대한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동공을 이완시켰다.

니콜라스의 눈앞에는 존, 그러니까 이단이 두 명이었다

그 중 하나의 옆에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벤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 니콜라스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로이!”

이건 이단의 목소리였다.

내가 해결한다고 했잖아.”

지금 이게 네 눈에 해결하는 걸로 보인다면, 그 정의를 다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엔젤, 괜찮나요? 니콜라스는 제 자신이 혹시나 약물 따위의 것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나란히 서있는 셋을 확인했다. 저를 걱정하며 팔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밧줄의 매답을 풀어주는 사람은 이단 그리고 삐딱하게 선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괴한의 이름은 로이, 잔뜩 울상인 얼굴을 하고 있는 벤지.
벤자민 던. 니콜라스는 벤지를 노려보았다. 잔뜩 날이 선 눈매에 벤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로이가 당신과 이야기를 한다고 나갈 때 그를 말렸어야 했는데.”

대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형도 알잖아?”

니콜라스에게 소용없는 위로의 말을 건네던 이단이 로이의 투정에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니콜라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젠장,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니콜라스는 눈앞의 이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 있는 범죄자 둘과 니콜라스가 가장 아끼는 사람 중 한 명인 벤지. 벤지는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벤지는 니콜라스의 신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사형제 중 니콜라스를 가장 잘 따르는 것도 벤지였다. 벤지는 자신의 꿈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니콜라스를 존경했으며 그가 CIA에 지원을 하고 IMF에 입사하게 된 일도 니콜라스의 영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벤지가 니콜라스를 속이고 그를 위험에 빠트리기까지 했다. 니콜라스의 배신감과 벤지의 죄책감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이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벤지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벤지.”

그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행위였다. 행위 안에는 수많은 격려와 뒤섞인 감정이 들어있었다.

벤지,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형을 속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어.”

이게 다 우연이라고 말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단은 누명을 쓴 거야.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당장 말 하려고 했어.”

니콜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그의 표정은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못해. 하지만 니콜라, 믿어줬으면 좋겠어. 이단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벤지, 너야말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는 이미 잔뜩 무너져있었다.

 

 

니콜라스가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웃기지도 않은 벤지와 이단의 변명을 듣고, 마지막으로 로이의 사과를 들은 니콜라스는 말없이 장소를 떠났다. 뒤에서 벤지가 니콜라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끝까지 쳐다보지 않았다.

십몇 년 만에 만난 형제의 말로가 우스운 꼴이 나버렸다.

니콜라스는 경찰서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그 근처에 있는 작은 펍에 들어갔다.

경찰 오셨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장의 말에 니콜라스는 예의 경찰이 아니라 경찰관이에요. 라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맥주를 건내는 사장에게 돈을 주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 없다.

뭐해?”

, 잠깐만요.”

니콜라스는 급하게 안주머니를 뒤졌지만 돈은 여전히 나올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잃어버린 것 같다고 짐작했다. 사장은 맥주가 넘칠 정도로 담긴 잔을 흔들어댔다. 니콜라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장과 맥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에서 돈을 쥔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로이?”

불길한 이름을 불렀다. 말 그대로였다. 니콜라스는 생글생글 웃는 로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 여기 경찰서 앞인 건 알죠?

물론이죠.”

제가 당신을 바로 유치장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카운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니콜라스는 맥주가 담긴 잔을 들고 절반 가까이를 위 속에 들이 부었다.

천천히 마셔요. 당신 술 못하던데.”

언제부터 감시하고 있었죠?”

수배서가 책상 위에 있을 때부터. 사실 그 전부터 파일을 없애려고 했는데 생각 외로 당신 친구가 일을 잘 하더군요. 내 실수였어요.”

니콜라스의 잔은 금방 비워졌다. 로이는 맥주를 두 잔 더 가져왔다.

이단과는 형제인 건가요?”

당신과 벤지처럼.”

니콜라스는 로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약을 먹인 건 정말 미안해요.”

술집은 시끄러웠다. 각자 할 말들을 크게 내뱉고 있었고 술집에 있는 모두가 니콜라스와 로이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니콜라스는 로이가 들고 온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니콜라스는 여태까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벤지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꿈이나 신념, 그런 것들. 파릇파릇한 얼굴로 CIA에 취직을 하게 됐다고 기뻐하는 벤지가 엊그제 같았다. 그런 벤지가 몇 십 년 만에 와 니콜라스에게 준 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인 거짓말과 범죄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벤지가 아닌 상실감, 니콜라스는 로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벤지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면 더 심한 짓을 할 각오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 빈 잔이 여러 개 놓였다. 니콜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단은 이곳에 계속 머무는 건가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떠났어요.”

해결?”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좀 더 떳떳한 모습으로 당신과 인사 할 수 있겠죠.”

 

 

이틀 째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 니콜라스의 모습을 보며 마이크와 대니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놓고 있었다. 드디어 엔젤 경사가 스파트필름 대신 사람과 교류를 시작 한 걸까? 아니면 스파트필름이 죽어서 그 상실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점심시간 막판을 이용하여 니콜라스를 코앞에 두고 숙덕이는 둘은 이렇다 할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그 둘이 제 모습을 안주삼아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았지만 말릴 기운도 없어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라진 파일은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자물쇠로 잠그어 놓은 뒤 열쇠는 캐비넷 깊숙한 곳에 넣어 놓았다. 이단이 돌아오면 찾을 작정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에 힘이 없었다.

엔젤 경사님. 엔젤.”

대니가 니콜라스를 불렀다. 니콜라스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체 대충 대답했다.

... 누가 찾아왔는데.”

불길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사님, 당신과 일을 하면 좋은 동료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반가워요.”

그 얼굴을 보는 니콜라스의 황당한 표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젠장, 어제 있었던 일이 니콜라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중간 중간 기억에 빈 공간이 있었지만 기억하기 싫은 것은 아주 잘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걸을 힘도 없어서 휘청 거리는 다리를 로이가 부축해주며 집에 데려다 줬던 것도, 놀라던 벤지의 모습도.

무슨 일 입니까?”

어제 술 먹고 제 옷에 토 한 건 기억 안 나나보죠?”

니콜라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농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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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우펜은 자신의 존재가 독일에, 더 나아가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란 믿음을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전통 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위관이란 지위로 참전 한 자랑스러운 독일인 이었고, 최전방에서 수많은 청년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강철만큼이나 단단한 신념으로 독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슈타우펜은 자신의 손을 자른 병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안개가 끼어 있는 것 마냥 탁하게 슈타우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전투 중 대량 생화학 무기에 중독되어 슈타우펜의 간이 병동으로 이송 된 젊은 청년이었다. 독한 가스는 뇌신경까지 침투하여 군인들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마치 살육만을 반복하는 괴물처럼 제 옆에 있는 적과 아군을 구분 못하고 모두를 죽였다. 슈타우펜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가스에 중독되어 살아남은 몇몇 군인들을 병동으로 이송시키기를 원했다. 상부도 멀쩡한 전투 인원이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에 슈타우펜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빠른 시일 내로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단순한 억제구로 군인들을 묶어둔 체 쉽게 실험이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 그것은 슈타우펜의 오만이었다.

 

그의 발밑에 손가락 세 개가 떨어져 꿈틀거렸다. 

자신의 절단부를 보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슈타우펜은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며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중위, 당장 나가서 지원을 요청해주게나.”

하지만 대위님이...”

지원이 필요하네.”

 

다른 한 명을 묶어둔 억제대가 비명을 지르며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슈타우펜은 아직 멀쩡한 두 다리로 뒷걸음질을 쳤다. 허리춤에 피스톨이 있었지만 큰 소리를 듣고 아직 기절해있는 군인들이 흥분하여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슈타우펜은 지원이 빨리 오기를 바라며 다섯 명 정도의 정신을 잃은 젊은 군인들과 대치했다.

 

 

확실히, 두 손을 잃은 자네가 군의관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자네가 여태까지 군에 해 준 일은 모두가 알 것이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지.

명예 제대를 하는 것이 자네나 우리나, 모두에게 좋을 것 같군.

 


찰리는 셔츠에 튀긴 핏방울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내며 폐건물 밖을 나섰다. 온 몸이 축축한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젠장! 한 시간 전만해도 쨍쨍하던 밖은 변덕이라도 부리는 모양인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차는 이십 분 떨어진 거리에 대 놓은 것이 떠올랐다. 오늘 안에 해야 할 의뢰는 없었으며 늦장을 부려도 문제 없었다. 거기가지 생각을 정리한 찰리는 다시 한 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다. 공기가 습한데다 바람까지 부는 탓에 라이터는 제대로 된 동작을 하지 않았다.


담뱃불을 붙였을 때, 찰리는 발끝에 돌부리가 체이는 소리를 들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은 찰리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고인 빗물에 담배를 비벼 껐다.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허벅지에 꽂아 놓은 리볼버를 잡아 쥐었다. 목격자는 귀찮은 일들을 일으키곤 했다. 일부러 목격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목표를 폐건물로 유인 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가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찰리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귀찮은데다가 꽤 돈이 드는 일이었다. 도둑고양이거나 건물에서 떨어진 벽돌 따위의 것이기를 바랐는데, 찰리의 시야에 비에 홀딱 젖은 남자가 들어왔다. 찰리는 총을 들어 그에게 겨누었다. 두 번째 손가락을 방아쇠 위에 얹고,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정수리 한 가운데를 가늠했다. 찰리는 짧은 시간의 관찰 결과, 그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총을 다시 허벅지에 꽂았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봐도 나쁠 것은 없어보였다. 그는 양 손을 피딱지가 굳은 붕대로 둘둘 감은 부상자였다.

 

이봐.”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귀까지 안 들리는 건가?”

듣고있네.”

왜 비를 맞고 있는 거지?”

비를 피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확실히 정상은 아니어보였다. 찰리는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 느꼈다.

 

언제부터 이 곳에 있었지?”

자네가 이 곳에 들어올 때부터.”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총성이 들리더군.”

 

비가 그쳤다. 찰리는 얼굴을 굳히고 그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대화는 끝이 났다. 두 번째 손가락은 이미 방아쇠 위에 올려 있었다.

 

시체를 처리하는 건 힘들지만 나중에 일이 커지는 것 보다는 훨씬 쉽지.”

 

찰리는 푹 젖은 그의 턱을 쥐어 자신과 눈을 마주칠 수 있도록 잡아 들었다. 두 손만 없는 병신인줄 알았는데, 제대로 보니 한 쪽 눈도 하얀 공막이 드러나 있었다. 찰리는 그의 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기억 속을 뒤집어 놓았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이 익숙했다. 찰리는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몇 분 늦췄다. 익숙한 억양에, 익숙한 얼굴.

 

슈타우펜 대위?”

“...누군가?”

 

찰리는 슈타우펜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관찰했다.

 

군의관이 왜 이 지경까지 된 거지?”

누구냐고 물었네.”

넌 날 모를걸. 손바닥 구멍 난 걸 꿰매준 직후에 바로 탈영했거든.”

 

찰리는 군 이야기가 나오자 몸을 흠칫 떠는 슈타우펜을 잡아내었다. 찰리는 삐딱하게 서있던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물었다.

 

왜 그런 꼴이 된 거지?”

작은 사고가 있었네.”

하긴 그런 꼴로는 의사하기는 어렵지?”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슈타우펜의 표정은 무거웠지만 찰리는 상관없다는 듯이 낄낄 웃으며 총을 집어넣었다.

 

안 봐도 뻔하잖아. 그렇게 충성을 다하더니 군에서 버림받은 개가 되어버렸네.”

 

찰리의 말투는 유난히 신나있었고, 슈타우펜은 그 방정맞은 말에 대답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갈 곳은 있나?”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이 머금고 있던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추천 해 줄 만한 직업이 하나 있긴 한데...”

 

찰리는 며칠 전 뒷골목에서 칼에 난도질 당한 시체로 발견 된 장의사 하나를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슈타우펜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찰리를 쳐다보았다.

 

할 거 없으면 따라오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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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손을 꼽아 가늠하기도 어려운 아주 옛날에. 크고 나쁜 늑대 한 마리가 살았다. 늑대는 자신이 가진 날카로운 송곳니와 거대한 몸집으로 동화 속 사람들과 동물들을 괴롭히며 자신의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채우고는 했다. 모든 동화 주민들은 늑대를 싫어했다. 늑대는 그들이 보내는 미움과 분노를 즐겼다. 늑대는 항상 혼자였고, 그럴수록 더 더욱 이빨을 드러내며 사람과 동물 그리고 괴물들을 위협하곤 했다. 늑대는 아주 거대했으며 또, 그 몸집만큼이나 외로웠다.

 

 

왜 아직도 그 일이 해결 안 됐는지 모르겠군!”

 

사무실 안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슈타우펜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일은 실정 상 불가능 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푸른수염. 그는 항상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고 애를 쓰는 인물이었다. 슈타우펜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푸른수염은 이미 그의 말을 듣는 척 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그 얼굴은 자신의 패악으로 인하여 빨갛게 일그러져 있었다. 푸른 수염은 위협적으로 슈타우펜에게 다가갔다. 슈타우펜의 앞에 놓여있던 서류뭉치 위에 그의 커다란 손을 올려놓았다. 슈타우펜은 그의 손바닥 아래에 놓여있는 서류와 그의 흉악한 표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만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이 봐, 클라우스. 자네는 참 입으로만 하는 건 잘 한단 말이야?”

 

슈타우펜은 그 말에 얼굴을 굳혔다. 푸른수염은 그 찰나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자네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앉아있을 것 같나?”

더 이상의 발언은 모욕적인 것으로 알아 듣겠습니다.”

이 마을에 돈을 대 주는 것은 나야. 자네는 내가 시키는 것만 잘 하면 돼.”

 

허리를 숙여 앉아있는 슈타우펜과 눈높이를 맞췄다. 푸른수염의 입 꼬리는 비열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세 손가락, 눈 한 짝인 병신이 짐승이나 다를 것 없는 보안관 뒤에서 기세등등 하는 것도 이제...”

 

푸른수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를 세게 잡아 누르는 악력에 몸을 비틀며 슈타우펜의 앞에서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세어 나왔다. 이미 그의 어깨는 날카로운 손톱에 긁혀 피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입을 가만히 두는 법은 아직도 못 배웠나봐.”

찰리.”

 

찰리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푸른수염의 어깨에서 자신의 손을 떼어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불안한 듯이 쳐다보는 슈타우펜의 눈길에 찰리는 괜히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발언, 지금 굉장히 안 좋게 들리는군.”

보안관 나부랭이는 빠지는 것이 좋아.”

아니. 못 빠지겠는데.”

 

구겨진 셔츠를 소리 날 정도로 털어내었다. 둘 사이에서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보다 못한 슈타우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 송곳니를 드러낼 것 같은 찰리의 옆에 섰다.

 

그만 하시죠.”

 

푸른수염은 물러날 때를 아주 잘 알았다. 그 때를 알았던 것이 그가 지금까지 살아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였다. 그럼, 다음에는 좋은 대답을 바라고 오도록 하지. 슈타우펜은 푸른수염의 시선을 피했다. 푸른수염은 일부러 대답을 기다리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이 봐, 또 그런 식의 말을 한다면 주둥이를 두 갈래로 찢어발겨주겠어.”

 

그의 값비싼 구두는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머리를 긁적인 찰리는 헛기침을 하다가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앞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던 찰리는 자신에게 라이터가 없음을 알고 작게 욕을 뱉었다. 그 모습을 본 슈타우펜은 책상 구석에 놓여있는 라이터를 집어 찰리에게 건네주었다.

 

고맙네.”

 

찰리는 말없이 라이터를 켰다.

 

 

늑대는 돼지 삼형제의 집을 무너트렸고, 빨간 망토의 할머니를 잔인하게 잡아먹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들 늑대를 싫어했다. 늑대는 그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보다 더 포악하게 굴었다. 모두가 늑대를 혐오하고 늑대에게 총과 무기를 겨눴다.

슈타우펜은 동화 속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늑대는 숲 속에 떨어져 정신을 잃은 슈타우펜을 처음 발견 한 짐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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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할 정도로 올곧은 인간이었다. 대령은, 마지막까지도 등을 꼿꼿이 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 곳곳에 새겨져있는 세월의 흔적은 그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또 얼마나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찰리는, 담배를 바닥에다 떨구고 발꿈치로 불씨를 비벼 껐다. 발바닥 사이로 연기가 비명을 지르며 새어나온다. 한참이나 그것을 비벼 없앨 수 있다는 것처럼 행위에 열중했다. 연기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손끝에 연기가 맴돌았다. 찰리는 통나무처럼 뻣뻣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대령의 코끝에 손을 대어보았다.

대령을 들어 올려 낡은 침대 위에 놓았다. 감긴 한 쪽 눈 언저리를 집어 올려 의안을 빼내어 탁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손 모양을 어떻게 잡아야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찰리는 여태 봐왔던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떠올렸다. 두개골에 총알 한 방, 왼 쪽 심장에 두 방. 꺾어진 관절, 그리고 비명을 지르다 멈춘 입 구멍들. 찰리는 다시 대령을 내려다보았다.

, 결국 평범한 것이었다. 원래 있었던 일처럼.

보통이라면, 한 시간 이내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초과했다. 답지 않은 감상에 젖은 탓이었다. 삽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끝까지 날 고생 시키는군.”

 

대령은 말이 없었다. 찰리는 그 얼굴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경동맥 부근을 다시 한 번 꾹 눌러 보았다. 똑같은 결과였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자신의 모습이 꽤 웃기게 비췄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구덩이는 다 파놓았다. 하지만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찰리는 제 성격처럼 뻣뻣하게 굳은 대령을 들어 같이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흙이 가득한 바닥에 대령의 몸을 두었다. 찰리는 쉽게 구덩이를 빠져 나왔다. 불편하게 딱 맞는 옷에 흙이 잔뜩 묻어있었지만 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찰리는 삽에 기대었다. 해가 질 때까지.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서류 보고 연락 드려요. 지금 당장 베이비시터가 필요해요. 혼내야 될 애들이 몇 명 있거든요.

 

발랄한 목소리의 여자는 장소를 말해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순간 벨 소리가 울리고, 한 손에 총을 쥔 채로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그 앞에 놓인 종이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르기 쉽도록 만들어진 봉투를 찢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웃기게 생긴 수염에, 꽤 신경질을 많이 부리고 다니는 모양인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까지.

 

혼내야 할 어린이라.”

 

빈센트는 봉투를 품 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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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AU

band of brothers William Evans x Interview with the Vampire lestat


환영을 본 사람이 과연 무슨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연기와 같이 공기 중으로 흩뿌려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단정하게 묶은 금발, 그 사이로 보이던 얇은 얼굴선 까지도. 그 순간. 우습게도 윌리엄은 알코올에 절여진 솜처럼 쉽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윌리엄은 농사나 짓고 살던 한적한 시골에서 갓 상경한 평범한 청년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밭을 갈고, 하루 일의 마무리로 되새김질을 하는 소의 앞에 여물을 가득 던져 준 윌리엄은 발끝에 체이는 흙이 묻고 잔뜩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제국에서 뿌리는 흔한 징집 선전용 전단지였다. 윌리엄은 아직도 여물이 묻은 손바닥을 대충 털어 버린 뒤 허리를 굽혀 전단지를 주워 읽었다.

 


당신의 힘을 제국에 보태주세요.


 

지금 생각하면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 전단지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홀린 듯이 전단지의 아래부터 위까지 천천히 훑었다. 적당히 사기를 북돋는 말과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될 것같이 써진 언어들. 윌리엄은 마지막으로 붙어있는 온점까지 속으로 읽고 난 뒤, 그 안에서 끌어 올라오는 전의를 느꼈다.

 

이렇게 수많은 시골 청년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안고 제국군에 입대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윌리엄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우연히 마주친 환영에게. 제국 내 온갖 소문의 중심지인 레스타에게. 갓 상경하자마자 제국 군복을 받아 입은 윌리엄이 그 레스타를 알 리는 없었다.

 

윌리엄에게 있어서 사랑의 열병은 유행 바이러스보다 더 독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기운 없이 거리를 비척비척 돌아다니던 윌리엄은 아주 우연히, 제국 안에 돌아다니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제국 뒤편에 있는 산이라고 하기는 낮고, 언덕이라고 하기는 높은 커다란 공터에 아주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사는데. 그 마법사는 모르는 것이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윌리엄의 귀가 번쩍 뜨였다. 마법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환영을 본 것인지, 아니면 그 환영이 진짜인 것인지 까지. 더 나아간다면 윌리엄에게 그 환영의 이름과 그가 사는 곳을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윌리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는 것 밖에 없었다.

 

윌리엄은 훈련이 일찍 끝나는 날을 택해 그 마법사를 찾아 가기로 결심했다.

 

그를 둘러싼 추잡한 소문들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윌리엄은 마법사를 보기도 전에 그가 정말로 무시무시하다는 소문은 사실이었음을 인정했다. 윌리엄의 바로 눈앞에 거대하고 기괴한 건물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쓰레기들을 모아 전시하겠다는 듯이 붙여놓은 건물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삐그덕 거리며 존재했다. 그것을 집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사람이 한 발만 내딛는다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윌리엄은 바싹 말라오는 목구멍 안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바닥에서 십 센티 정도 떨어진 계단에 올라서기 위해 떨어질 것 같은 난간을 두 손바닥으로 붙잡고 겨우 문 앞에 섰다. 윌리엄이 주먹을 쥐고 문을 노크하기 전에.

 

누구야.”

 

문이 열렸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히 금발을 묶은 환영의 남자가 나타났다. 윌리엄의 표정은 꽤 멍청했고.

 

제국군이잖아.”

 

그 표정을 보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마법사, 레스타는 멍청이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윌리엄을 쳐다보았다.

 

난 제국군을 좋아하지 않아.”

 

윌리엄은 얼굴 하나 크기로 작은 키의 레스타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누가 내려다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레스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윌리엄의 바로 코앞에서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집은 주인의 마음처럼 불청객을 쫓아내기라도 하듯이 예고하지 않은 큰 동작으로 움직였다. 덕분에 윌리엄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바닥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찌르르 통증이 올라오는 꼬리뼈는 물론이고 윌리엄의 머리속은 레스타와 마법사 그리고 사라진 환영이 뒤죽박죽 섞여 엉망이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었을 때는, 레스타의 거대하고 기묘한 집은 이미 안개 속 멀리로 사라진 뒤였다.

 

 

레스타!”

 

제국 내에서 레스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용기가 있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레스타는 우아한 몸짓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군복을 입은 불청객이 서 있었다. 며칠 전에 집으로 찾아온 제국 병사. 자연스럽게 그 얼굴을 기억해 낸 레스타는 불쾌한 안색을 겨우 숨겼다. 레스타에게 있어 표정을 숨기는 것은 아주 능숙한 일이었다.

 

윌리엄 에반스라고 합니다.”

 

긴장된 어투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윌리엄은 곧바로 등 뒤로 숨긴 것을 레스타에게 건냈다. 레스타는 갑작스럽게 건내진 손에 흠칫 몸을 떨었지만, 손에 들린건 꽃이었다. 레스타의 옅은 금발과 색이 비슷한 수선화가 장식 되어 가득 꽂혀 있는 꽃.

 

첫 눈에 반했습니다.”

 

레스타는 제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을 기억이라도 하는지 엉거주춤 서서 꽃을 건내 주는 윌리엄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날 처음으로. 레스타는 자신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전혀 짐작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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