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가 굵은 손바닥이 약 올리듯 시야를 어지럽혔다. 깊숙이 들어간 주름 잡힌 손금은 두꺼운 밧줄이 되어 목을 졸라왔다. 어둠이 몸을 짓눌렀다. 차단된 시각 속에서 촉각은 제 기능보다 훨씬 뛰어난 힘을 발휘했다. 까슬까슬한 밧줄이 점점 면적을 넓히며 목젖 위를 감싸왔다. 폐로 들어가는 산소의 양은 극심한 부족을 호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28개의 뼈마디, 그 위를 덮는 뜨거운 근육과 감싸는 차가운 피부. 그렇게 서서히 변해갔다. 목을 감싸 쥔 손은 노예에게 낙인을 찍듯이 불타올랐고 녹아 흘러내렸다.

벤지는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 그런 이유로, 늦잠을 잤어요.”

 

벤지는 하얀 꽃이 곱게 조각칼로 새겨진 접시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접시는 카르텔의 비밀계좌를 추적하기 위해 이단과 벤지가 스위스에 밀입국 했을 때, 잠시 들른 제네바의 주 마다 열리는 시장에서 구매 한 것이었다. 오래 사용하지 않은 접시에는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식기 세척기와 접시를 번갈아보던 벤지는 개수대의 물을 틀어 표면에 붙어있는 먼지들을 흘려보냈다.

 

이거, 기억나요?”

 

벤지는 마른 식기닦이 행주로 접시를 공들여 닦은 뒤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카르텔한테 쫓기는 건 기본이고, 밀입국한 게 꼬여서 국제 경찰한테도 쫓겼잖아요. 그 때.”

 

오랫동안 쓰지 않아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덕분에 접시는 어제 산 것 마냥 광택을 내고 있었다.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니까요?”

 

벤지는 후라이 팬을 들어 베이컨 두 장과 스크램블 에그를 접시 위로 조심스럽게 덜어 옮겼다.

 

, 어쨌든 이렇게 살아서 이런 접시에 아침도 챙겨 먹을 수 있고, 좋은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벤지는 나머지 접시에도 베이컨 두 장과 스크램블 에그 대신 발사믹이 뿌려진 양상추를 가득 올려놓았다. 한 손에 들어오는 유리컵에 담긴 우유, 가운데 접시에 미리 덜어놓은 잘 구운 토스트 네 조각. 꽤 그럴듯한 아침식사였다.

 

그 동네 경찰한테 쫓기지만 않는다면스위스는 참 아름다운 도시일 것 같지 않아요?”

 

토스트를 한 입 크게 베어물고, 베이컨을 입에 우겨 넣었다. 마지막 말은 입 안에 들어가있는 음식을 씹는 소리에 웅얼거리며 잘 들리지 않았다. 벤지는 우유 대신 콜라를 따를 걸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입 안에 든 것을 삼켜 넘겼다.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벤지는 가루가 잔뜩 묻은 손바닥을 털어 버린 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장자리가 새까맣게 탄 토스트 두 조각, 소스가 잔뜩 뿌려진 시들어 빠진 양상추. 말라 비틀어진 베이컨.

 

이 쪽에서 일이 다 끝나면, 스위스에 가서 사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벤지는 아무도 건들이지 않은 접시 위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일을 나오는 거야? 그런 일을 겪고도?”

“벤지는 안 좋은 일을 충분히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사건을 안 좋았던 일로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모두들 좋은 아침! 벤지는 목에 걸었던 카드 텍을 빼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루터와 그의 동료 직원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벽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어 선 루터는 고개를 살짝 까닥여 벤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벤지의 손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 두 잔이 들은 종이박스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좀 늦었네?”

오늘 아침을 성대하게 차려 먹었거든요. 늦지 않을 수가 없었죠.”

 

벤지는 그 날 아침 악몽을 꾼 것을 말하려다, 금방 관두었다. 루터는 더 이상 벤지를 잡을 생각이 없었고, 그것은 벤지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오른쪽 눈썹을 크게 까닥인 벤지는 자신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루터는 벤지의 그 얼굴에서 익숙한 그의 오랜 친우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 벤지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벤지는 캐리어에서 커피 두 잔을 꺼냈다. 시럽을 넣지 않은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 헤이즐넛 시럽 세 펌프를 넣은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 이단의 것이었다. 벤지는 데스크톱 전원을 키며 자신의 몫으로 사 온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 오늘도 별 일 없겠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벤지는 서류철 위에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커피를 올려놓았다.

 

이봐, 벤지.”

듣고 있어요.”

 

벤지는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루터는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알아 듣고 그의 공간으로 침입했다. 벤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벤지 그 자신조차도 그 예민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남은 커피, 내가 마셔도 될까?”

남았다구요?”

그래. 두 개 사왔잖아.”

남았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벤지.”

 

벤지는 아무것도 틀어놓지 않은 모니터의 백그라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루터는 차분하게 벤지의 이름을 불렀다.


벤지.

벤지.

벤지.


이단은 제 뜻이 벤지의 고집에 가로막혀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이렇게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것이 사건을 해결 해 줄수 있는 마법의 열쇠 인 것처럼. 그냥 이름을 부르고 벤지와 눈을 마주했다.

 

이단 헌트는 죽었다.

 

나도 알아요.”

 

벤지는 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영원히 그 속에 묻어 나오지 않을 사람처럼. 루터가 자리를 뜰 때까지. 계속.

 

 

지금 21세기인 거, 알고 있죠?”

 

벤지는 아무도 앉지 않은 쇼파 위에 신문을 던졌다.

 

이상한데서 고집이 세단 말이에요. 이단은.”

 

전 미국의 헤드라인이 적힌 신문지는 받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 바닥 위에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요즘은 패드로 뉴스 보는게 훨씬 편해요.”

 

벤지는 이단 헌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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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미션의 결과에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승리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주체가 이단 헌트일 경우 더더욱. 미션이 얼마나 어렵다든가, 얼마나 불가능하다든가는 몇 십 년 경력의 전설적인 현장요원에게 있어서 문제 따위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정확한 문제는 이단의 나이에 있었다. IMF는 언제나 이단에게 해결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 무리한 미션, 일반인이나 다른 보통 현장요원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미션을 변함없이 던져주었고, 그것은 이단이 고등학생 때, 스무 살, 서른 살. 그리고 쉰의 나이가 될 때까지. 변함없었다.

 

덕분에 이단은 미션이 끝나고 한차례씩 꼭 겪는 홍역처럼 침대에 누워 골골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이를 핑계대거나 짬밥을 내세우며 자신의 밑에 있는 요원들에게 일처리를 내려 보낼 수도 있었지만 이단은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이번 일도 어렵다며 걱정하는 벤지에게 어깨만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벤지는 며칠 째 똑같이 침대에 엎드려서 숙면을 취하고 있는 이단을 보고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일처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두뇌회전을 보여줬으면서, IMF와 관련 된 일에서는 미련할 만큼 수용범위가 넓었다. 혹시라도 이단의 잠이 깰 세라 조용히 넥타이를 벗어 걸어놓고, 셔츠도 벗어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으려던 차에 그가 베개에 묻었던 얼굴을 느릿하게 들어 벤지를 반겼다.

 

아직도 아파요?”

 

허리에 느껴지는 둔통을 호소한지가 벌써 이틀 전이다. 벤지는 셔츠를 벗다 말고 이단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이단은 벤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단의 표정이 아니라, 벤지의 표정이.

 

언제 은퇴 할 거예요? 나이도 생각해야죠.”

아직 날 찾는 사람이 많잖아.”

 

고개를 드는 것이 힘든지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웅얼 대답했다. 이단은 이십 삼 층 건물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아주 살짝 허리를 삔 것 같다고 했었다. IMF에서 제공하는 직원 복지를 위한 건강검진에서는 수많은 미션으로 인해 쌓인 피로와 노화로 인한 근력 약화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라는 진단을 했다. 어찌 되었든 둘 다 벤지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걔네들이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맨날 누명 씌우고 쫓아다니기만 하지. 벤지가 망신창이가 된 이단을 보고 분노를 숨기지 않을 때면 이단은 그냥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불편하게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바로 누웠다. 이단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뻐근함에 끙, 하고 신음을 했다. 벤지는 이단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저녁은 먹었냐고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이단은 방금 먹은 우유 한 잔을 기억하고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벤지는 그 어정쩡한 반응이 언제나 불만이었다. 항상 남을 위하고, 자신의 존재는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 마냥 대답하는 것들.

 

그래서, 벤지는 조금 고민을 했다. 피로에 지친 애인을 위해 벤지 던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지? 대신 그의 일을 해주기. 벤지는 이단과 똑같은 현장요원이었지만 이건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벤지 던이 아니라 이단 헌트로 태어나던가. 대신 사표 내주기. 헌리가 사표를 수리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헌리뿐만 아니라 브랜트 부터 길길이 날 뛰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 외에도 해결책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대부분 시덥잖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벤지는 일을 그만둔다던가, 대신 일을 해주는 등 근본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인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단. 허리 아직도 아프댔죠?”

어제보단 많이 괜찮아졌어.”

 

그래서 찾아 낸 해결책이. 바로 마사지였다. 벤지는 셔츠를 단단히 걷어 올리며 바로 누워 자신을 쳐다보는 이단을 다시 돌려 눕혔다. 이단은 벤지의 속셈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눈만 꿈뻑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벤지는 긴장 풀라는 듯이 이단의 어깨를 퉁퉁 쳐댔다.

 

허리 통증에 좋다고 해서요.”

 

벤지는 이단의 허리 위로 올라 타 살짝 깔고 앉았다. 궁금했던 모양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는 이단의 고개를 가만히 있으라는 듯이 쓰다듬었다. 이단은 얌전히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허리 통증이 심할 경우 어깨나 목에까지 퍼질 수 있대요.”

 

풍성한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두꺼운 목덜미에 손바닥을 올려 힘을 주었다. 이단은 피부 위로 묵직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손바닥이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벤지의 손바닥은 이단의 목덜미에서부터 어깨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꾸준한 운동 덕에 근육이 잘 잡힌 어깨가 벤지의 손 안에 만져졌다. 조금더 밑으로 내려가, 톡 튀어나온 견갑골부터 살짝 들어간 척추까지. 벤지는 손목에 힘을 실어 마사지에 집중했다. 이단의 표정이 나른하게 풀렸다.

 

시원해요?”

으응.”

 

이단은 벤지의 질문에 답하기 귀찮았던 모양인지 그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대답했다. 꼭 섹스가 아닌, 다른 평범한 행위에서 자신의 밑에서 물렁물렁 할 정도로 늘어져있는 이단을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벤지.”

?”

혹시, 엉덩이 만지는 것도 마사지에 포함 되어 있는 거야?”

 

. 벤지는 숨을 들이키며 이단의 엉덩이에 붙어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뜨거운 것이라도 쥔 듯이 재빨리 떼어냈다. 벤지 그 자신도 이단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었다. 정말로 의식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다는 듯이 손을 등 뒤로 돌리고, 머쓱한 웃음.

 

너무 밑으로 내려갔죠?”

나쁘지는 않아.”

아니에요...”

 

벤지는 이단의 허리 위에서 내려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벤지의 마사지 덕인지, 그의 귀여운 반응 덕인지. 이단은 몇 시간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어깨와 함께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허리의 통증도 같이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벤지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단 덕분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바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워?”

아니, 아니요. 그냥,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이단이 오해할까봐.”

그럴 의도 있었으면 뭐 어때서?”

그만 놀려요...”

 

결국 크게 웃고만 이단은 침대의 비어있는 공간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며 벤지에게 누워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에라, 모르겠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벤지는 이단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그의 옆에 누웠다.

 

은퇴는, 생각 해 볼게.”

정말요?”

 

벤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지금까지 열심히 IMF의 부당함과 동부에 바다가 보이는 집을 사놓았다는 등 열심히 이단을 설득했던 벤지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반응에 이단은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네 속까지 썩여가면서 일하고 싶지는 않거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목숨이 여러 개인 것 마냥 구는 이단이라도 자신의 사랑스런 애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에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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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베스 님의 언더테일 au를 기반으로 합니다.

- 약간의 스포주의



발등에 느껴지는 촉감은 아직도 생생했다. 무성하게 자란 나뭇가지와 햇볕을 받고 싱싱하게 피어 오른 넝쿨들. 30년 전. 찢겨진 종이위에 한 컵의 물을 부어버린 것 처럼 흐려져 확실치 않은 기억들. 하지만 그 당시에 느꼈던 촉감들만은 아주 생생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발등을 휘감고, 인간은 구덩이에 떨어졌다.

 

* 이 세상은 죽거나 죽이거나야!

 

약간의 속임수와 살의를 품은 공격.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공격을 대신 맞아준 털뭉치. 덕분에 인간은 단 하나의 생체기도 얻지 않았다. 악의를 가득 품은 꽃이 저주를 내리며 자리를 피한 후에도 인간과 괴물, 그 둘은 한참이나 서로의 몸을 포갠 그 상태로 있었다. 인간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혼란스러운 정신을 제대로 잡을 때 까지 기다려 줄 수도 있었지만, 복슬복슬한 털의 주인은 인간과 달리 참을성이 많지 않았다. 공격을 맞은 부위에서스믈스믈 올라오는 둔통을 무시하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인간을 쳐다보았다. 교과서 속에서나 보고 배웠던 처음 보는 생명체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꺼내 불러보았다.

 

* 인간?

* 맙소사, 내가 살아있는 인간을 보고 있는게 맞는 건가?

 

그래. 더 이상 기억이 나질 않았다.

 



UNDERTALE AU


 


* 이 곳에 떨어지는 인간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도록 한다.

 

벤지는 왕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는 괴물이었다. 지난 20년간 그는 구덩이를 통해 떨어지는 인간을 물어 죽이고, 이 지하세계에서 제일 풍성한 털을 가지고 있는 괴물 왕에게 그들의 영혼을 가져다 바쳤다. 그가 이 지하세계에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는 떨어진 인간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어디서 나타나는지 모르는 작은 꽃이 인간의 영혼을 가로채려 꾀를 부리는 것만 아니라면, 항상 비슷하거나 똑같은 하루였다.

 

폐허에 유일하게 햇볕이 비치는 공간은 공교롭게도 인간이 자주 발을 헛디디는 구덩이 바로 밑이었다. 벤지는 떨어지는 인간을 잡기 위해서, 또는 그 곳에서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낮잠을 자기 위해서. 폐허의 끝자락에 있는 집에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일과였다. 벤지는 그 짓을 몇 십년간 반복 하면서도 단 한번도 지겹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인간의 영혼을 회수하는 일에 단 한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제 단 하나. 단 하나의 인간의 영혼만 있으면 괴물들은 지상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영혼을 받은 왕이 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태 괴물들을 가두어 놓았던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고, 작은 구덩이에 내리쬐는 한 줌의 햇볕이 아닌 지상에 가득 내리쬐는 햇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괴물들은 그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벤지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도착한 구덩이 틈으로 비추는 햇살은 바닥에 떨어진 인간의 등을 잡아먹을 듯이 내리쬐고 있었고, 벤지는 최대한 걸음 소리를 죽여 인간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떨어지는 동안 돌덩이에 부딪혀 작은 내상을 얻었는지 인간의 단단한 어깨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벤지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숨겨진 주둥이를 벌려 인간의 목덜미에 서서히.

 

서서히 자신이 떨어진 공간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든 인간의 익숙한 얼굴에 벤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왜 이 인간이 다시떨어진 것이지?

 

벤지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멀리는 아니고, 인간과 딱 다섯 걸음이 떨어진 곳에. 인간의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의 어둠 속에서 바닥에 손을 짚고 등을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간을 관찰했다. 벤지는 인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지상의 인간들과 괴물들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을 때, 이단은 지하에 떨어진 첫 번째 인간이었다.

 

지금은 마지막 인간이 될 수도 있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수백가지의 갈등이 벤지를 둘러 쌓았다. 혼란스러웠다. 왜 이단이 이 곳에 다시 온 걸까? 이단은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괴물들을 미워할까? 이단은 그 때 있었던 그 일을 기억할까? 벤지는 이단을 죽일 수 없었다. 이 곳에 떨어지는 인간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도록 한다. 봉인으로 결계가 닫히고, 피가 잔뜩 묻은 벤지의 털을 쓰다듬으며 왕이 피눈물물과 함께 했던 그 말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어떡하지? 나는 어떡하지? 벤지는 쏟아지는 모순과 불안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동시에 검은색의 도톰한 육구가 꿈틀거리며 인간의 손으로 탈피했다. 온 몸에 탐스럽게 기른 털은 피부가 갈라지며 그 안으로 들어가 평범한 인간이 입고 있는 옷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단 한가지 확실한 것은. 벤지는 이단을 죽일 수 없었다. 벤지는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던 인간의 이름을 불렀다.

 

이단?”

 

이단은 벤지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이단의 손에는 진짜 칼이 들려져 있었다. 벤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단이 괴물들을 죽일 수 있을까? 평범한 괴물들에게는 이미 성인의 체형을 한 이단을 막을 수 있는 힘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단이 괴물들을 죽인다고 말하면, 나는 이단을 죽일 수 있을까?

 

“벤지에. 기억 나요?”

, 괴물인가? 걱정 마. 헤칠 생각은 없어.”

무기를 들고 그런 말을 하면, 아마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이단은 오른 손에 쥐고 있는 칼을 내려보았다. 전혀 위협을 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천천히 바닥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벤지는 진정하라는 듯이 이단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른 뒤, 자신의 이름이 벤지라는 것을 소개했다. 벤지는 만에 하나 혹시, 이단이 제 이름을 듣고 모든 것을 기억할까 싶었지만 이단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 없었다.

 

잠깐, 날 알고 있어?”

이단. 당신을 여태까지 기다렸어요.”

이 곳에 옛날에 온 기억이 있어.”

알아요. 내가 그 때...”

 

괴물이다!’ ‘괴물이 인간 아이를 납치했어!’ 

악몽같은 그 기억들이 등 뒤를 타고 기어 올랐다. 벤지는 입을 다물고 이단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단, 이 곳은 말 하기가 좋지 않은 곳이에요. 괜찮다면 집으로 초대해도 될까요?”

 

 

 

이 곳에는 왜 온 거예요?”

 

벤지는 다시.‘ 라는 단어를 붙이려다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을 골랐다.

 

6명의 사람이 이 지하로 떨어진 이후로 돌아오지 않고 있어. 나는 그 사람들을 찾으러 온 거고. 무엇보다 나는 이 곳에서 살아 나온 적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벤지는 자신이 죽이고 영혼을 빼앗은 6명의 인간을 떠올렸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평소에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명령은 덤이었다. 표정이 일그러질 뻔 한 것을 겨우 참아내었다.

 

이제, 내가 질문 할 차례야.”

이단...”

“30년 전에, 괴물 하나가 꽤 오래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 하나를 물고 지상에 올라왔다고 전해 들었어. 마을 사람들은 퍼져있던 흉흉한 소문이 괴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고, 힘을 합쳐 괴물을 물리치고 지하를 봉인했다고 했지.”

 

그 날이 아직도 생생했다. 벤지는 의도적으로 이단의 눈길을 피했다. 죄책감과 그리움이 섞여 벤지의 속을 매스껍게 만들었다. 이단은 제가 하는 말에 빠져 벤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사람은 깨어났지만 지하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어. 마을 사람들은 제 멋대로 깨어난 사람을 걱정하고 동정했지만... 하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어.”

 

이단, 이단은 이 곳에서 살기 너무 연약해요.’

원래 살던 곳에 데려다줄게요. 하지만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에요. 이단은 언제나 이 곳으로 놀러 올 수 있잖아요?’

 

네가 날 구해준 그 괴물이지?”

 

벤지는 정말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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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끝나면 바로 와요. 이단.


벤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정리 된 파일을 건내주었다. 으응. 피곤한 모양인지 손등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이단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뭐라도 도움을 더 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타깃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 밖에 없었다. 위험해지면 당장 빠져 나오는 거예요. 알겠죠? 벤지는 걱정스러운 투로 파일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당부했다.


위험 할 일은 없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니까,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계획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면 이단은 진즉에 미션을 끝냈을 것이고, 벤지도 애꿎은 달력만 바라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단은 돌아오지 않았고, 벤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던 12월은 끝나고 달력이 한 장 뜯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씨는 서서히 추워지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꽂아 넣으며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벤지는 이단이 없는 삶에 서서히 적응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예로, 퇴근 후 저녁으로 사가는 저녁거리로 이단의 몫을 사지 않는다. , 주말 늦게 일어나서 이단을 부르는 일도 눈에 띄게 적어졌다. 하지만 벤지는 항상 이단이 당분간은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좋아하는 달달한 간식류를 한 두 개씩 사와 찬장에 묵혀두는 버릇은 관두지 못했다. 그 덕분에 벤지는 흥미가 없는 과자나 젤리, 케이크를 입에 물리도록 먹고는 했다.


그 날도 평소와 똑같았다. 최근 들어 벤지에게 있어서 평소란 이단이 없는 하루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사무실에서 늦장을 부리다가 저녁 늦게 쯤 집에 들어간다. 벤지가 불이 켜지지 않은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tv를 켜는 일이었다. 한참동안 샤워도 하고, 식탁에 올려놓은 달달한 과자 몇 개를 집어먹으며 쇼파에 눕는다. 그리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깨닫지도 못한 체 해가 뜨면 아이패드로 메일을 확인하며 일처리가 밀려있는 IMF 내로 출근을 한다. 벤지는 그 날 아침도 자신과 챗바퀴 안의 햄스터의 차이점을 고민하다가 생각하기를 관뒀다.


신입 요원들의 데이터 분석은 애저녁에 끝났지만 벤지는 상황실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저 분이 전설의 요원 이단헌트님의 동료분이시래...


새로 들어온 요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벤지는 못 들은 척 커피를 홀짝였다. 자기들끼리 몇 번 말을 주고받더니 그 중 머리를 짧게 쳐내고 눈매가 꽤 사납게 생긴 여성 요원이 벤지에게 말을 걸어왔다.


벤지?”


말을 걸어오는 건 예상 못했는데. 벤지는 컵에서 입을 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신체 변화량 정리 해주시는 거. 벤지가 하는 거 맞죠? 고맙다고 하고 싶어서요.”

고맙긴요. 할 일인데... 물론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입사한지 몇 년 안 됐지만 당신 팀 이야기 많이 들어왔어요. 솔직히 대단하잖아요? 크렘린 궁은 말 할 것도 없고.”

그거 폭발했는데.”

그만큼 화끈하단거죠!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정말... 꿈만 같아요.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소문이라뇨? 그거 때문에 고생했던게 아직도 생각난다구요.”


또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비행기 안이 아니라 밖에 매달린 것도, BMW 타고 세 바퀴 굴러 떨어진 것도. 미친 놈을 이단이 잡지 않았다면 지구가 터질 뻔 한 것도. (술렁술렁) 벤지는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제 앞에서 눈을 반짝이는 병아리 같은 요원에게 지금까지 겪었던 미션들을 말해줬다. 멀리서 눈치만 보던 신입들도 벤지와 동기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고, 벤지는 몇 가지 기밀은 교묘히 숨기며 위험했던 사건들을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대부분 이단의 자랑이었으며, 간간히 벤지는 자신의 자랑도 끼워 넣었다.


그 이야기가 끝을 보인 것은 소재가 떨어져서도, 벤지나 요원들의 흥미가 떨어져서도 아니었다. 어느새 뚱한 얼굴을 하고 다가 온 브랜트가 벤지의 뒤통수를 치고 잔소리를 해댔다. 열심히 벤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요원들은 벤지의 이야기를 경청한 적도 없었던 것 마냥 조용히 브랜트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임마, 애들한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 사실이잖아?”

저러다가 제 흥에 빠져 사고치는 애들도 있거든. 지들이 이단헌트인 줄 알고. 괜히 바람만 불어 넣지마. 훈련 안 된 요원은 폭탄보다 더 위험하니까.”


벤지는 잠깐 투덜거렸지만 브랜트의 말도 일리가 있었으므로 수긍했다.


근데 웬일로 날 찾아온건데?”

넌 왜 집에 안 들어간건데? 이단이 도착했어. 그거 알려주려고 왔지. 니가 가서 잘 좀 돌봐주라고.”


이단이 도착했어. 그 말 밖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벤지는 브랜트를 한 번 꽉 껴안아주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불이 켜져 있었다.


이단!”


이단은 쇼파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까치집마냥 잔뜩 엉켜있는데다가 얼굴에는 정체 모를 까만 것들이 묻어있었고 다크서클은 눈보다 더 크게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신발을 겨우 벗은 벤지는 한걸음에 이단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이단도 천천히 눈을 떴다.


이단, 꼴이 말이 아니에요. 잠은 제대로 잔 거예요? 씻은 건 언제고? 아니 일이 잘 안 풀린거예요? 다친데는 없고?”

질문은 한가지만.”

보고싶었어요.”


벤지는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보이는 이단을 꼭 끌어안았다. 이단은 벤지의 그 말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벤지는 조금 더 그를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최대한 자제한 체 이단의 얼굴과 몸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상처는 없고 팔뚝과 목에 경미한 타박상만 남아있었다. 오른쪽 볼에 묻은 검댕이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준 다음 옷으로 가려진 몸을 확인하기 위해 이단의 팔을 자신의 목에 걸은 뒤 이단의 옷을 슬쩍 들어올렸다.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했죠?”

이단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내려 벤지의 허리를 매만졌다.

으음, 벤지. 살 찐 것 같은데...”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말도 어물거리는 걸 보니 잠결에 대답하는 것이 분명했다. 벤지는 허리에 닿는 이단의 손을 치우며 최근에 이단 대신 먹었던 달달한 간식들을 떠올렸다. 초코 케이크, 프라푸치노, 마카롱. 어쨌든 이단이 그 간식들을 보며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일단 제대로 된 대화는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단이 마저 상의를 벗는 것을 도와줬다.


씻고 자요. 졸린 건 알겠는데 일단 씻는게 좋을 거 같아요.”

나중에. 벤지.”


이단이 예고도 없이 벤지를 자신의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벤지가 이단에게 안기는 꼴이 되는 건 쉬운 문제였다. 벤지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불편한 자세를 취했다.


으으, 말 안 듣죠. 듣고있는 거 다 알거든요?”


이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 올려본 이단은 평온한 얼굴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벤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단이 요구하는 것을 따랐다. 잘자요. 보고싶었다는 말은 내일 해도 되겠지. 자세를 편하게 고쳐 잡으며 이단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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