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블랙홀 AU

디팁님 리퀘



벤지는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벤지. 놀라지 말고 들어줘. , 하루가 계속 반복 되고 있어.”

사실, 벤지는 알고 있었다. 이단 헌트는 벤지 던을 우습게 본다. 정확한 사실이 아닐지는 몰라도 사실에 근접했다. 벤지는 마지막으로 그를 좋아하고 믿었던 자신을 마음 속 쓰레기통에 눌러 담은 뒤 코웃음을 쳤다.

좋아요. 이단,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게요.”

벤지의 표정을 본 이단은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물론 벤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단은 자세를 고쳐 잡은 후, 벤지의 어깨위에 손을 얹었다. 꽤 완곡한 몸짓이었다. 이단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벤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넘어갈 뻔 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이단 헌트의 표정에.

며칠 째 하루가 반복되고 있어.”

이단, 조금 지친 모양인데...”

이단은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벤지는 이단이 저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려 시도했지만 그만 두었다. 자신은 좀 더 단호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단의 얼굴을 감싼 손바닥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뭐라구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단?”

이단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벤지는 이단의 손바닥을 하염없이 쳐다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벤지는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뭐, 뭐하는 거예요?”

그러게, 벤지.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이단 헌트?”

무례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벤지는 이단의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이단은 순순히 벤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 미안해요. 마스크인줄 알았어요.” 이단은 힘없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벤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몇 달간 쌓아온 현장요원 경력을 모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단은 IMF, 그리고 그가 몇 주간 쫓아온 타깃을 눈앞에 두고 짐을 싸는 도중이었다. 어디로 갈 지는 누구도 몰랐다. 벤지는 느긋하게 캐리어에 옷가지를 넣는 이단을 보며 그 주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벤지. 정신 사나워.”

벤지는 그 말에 걸음을 뚝 멈췄다.

타깃을 포기 하는 거예요?”

아니. 내일 다시 잡을 거야.”

눈치 챌게 분명해요. 도망 갈 거라구요.”

오늘은 좀 쉬고 싶어.”

벤지는 그 말에 결국 작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진짜 이단 맞아요?” 이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캐리어를 닫았다.

이단. 난 안 가요.”

벤지는 단호하게 이단을 쳐다보았다. 이단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벤지를 올려다보았다.

나 혼자 할게요.”

 

 

벤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타깃은 저 쪽에서 나올 거야.”

상황을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하지 말고,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우리가 원하는 건 정보니까, 타깃을 꼭 죽일 필요는 없어. 절대로 머리는 쏘지 마. 알겠지?”

이단은 손을 떨고 있는 벤지의 손을 맞잡아 준 뒤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와 다른 이단의 모습에 벤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다가, 급하게 총을 다시 고쳐 잡았다.

이단, 오늘 무슨 일이-”

.”

걸음 소리가 들리고, 서류가방을 품에 안은 불안한 모습의 남성이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는 쏘지 마.’ 벤지는 이단의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총을 그의 다리에 겨눴다. 이단이 고갯짓으로 신호를 주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깃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벤지는 총을 허벅지에 꽂아 넣은 체 쓰러진 타깃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단은 벤지를 제지했다.

총이 있으니까 조심해. 대충 오른쪽으로 피하면 될 거야. 우리는 증거품을 가지고 A-3 으로 갈 거야. 증거를 노리는 놈들이 대기하고 있겠지만 피해서 가는 길을 알아.”

벤지는 멍청한 표정으로 이단을 보았다. 이단은 그 표정을 이해한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곧이어 벤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갯짓했다. 벤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타깃과 이단을 번갈아 본 뒤 이단의 지시를 따랐다.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이단은 이 일을 겪은 사람마냥 정확히 그들의 방해요소를 제거해갔다. 민간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증거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벤지는 이 성공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단은 확실히 완벽한 요원이었지만,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이 할 행동을 미리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것을 벤지에게 알려주었다.



이야기는 각자 방에서 자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다. 이단은 차가운 맥주 캔을 양손 가득 안은 체 벤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벤지는 제 눈을 의심하며 도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단에 의해 가로막혔다.

벤지.”

, 그냥 오늘 좀 이상하네. 아니,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얼른 들어와요.”

벤지는 뒷걸음질을 치며 이단이 건네는 맥주를 받았다.

무슨 일 있어요?”

성공적인 임무완수를 위하여.”

, 성공적이긴 했죠.”

캔을 따자 탄산 소리가 들렸다. 이단은 벤지의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벤지는 자신의 방인데도 불구하고 어색한 몸짓으로 이단을 따라 들어갔다. 이단은 남은 한 손으로 침대를 두드리며 옆에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이단,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평소랑 달라서 그래요.”

내가 평소에 어땠길래?”

, .”

벤지는 손에 들린 캔과 이단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단번에 그것을 들이켰다. 목구멍부터 올라오는 기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늘은 진짜 현장요원이 된 기분이었어요.”

벤지는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캔 하나를 들어 마저 땄다.

이단 헌트와 같은 팀을 한다는 거 자체가 경력 없는 요원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인 건 알고 있지만...”

한 모금 더 마셨다.

가끔은, 이단이 모든 걸 해결했잖아요.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항상? 이단 헌트는 벤지 던을 현장요원이 아닌 사무직원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벤지.”

벤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

벤지, 네 말이 맞아.  무의식적으로 너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이단은 민망한지 목덜미를 긁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널 계속 볼 수 있었지. 넌 기억 못하겠지만. 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그걸 고치려고 노력했어. 벤지, 넌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 그걸 안 본 건 나야. 네가 아니라.”

벤지는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이단의 말 대부분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정확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이단 헌트에게 인정 받는 벤지 던. 그가 여태까지 꿈꿔왔던 이야기였으며, 전부였다. 벤지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진 것도 같았다. 이단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 캔을 침대 옆 탁상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벤지.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이단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짝 구겨진 이불보가 그가 앉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벤지의 귓가에서 울렸다. 그 누구의 결심도 아니었다.

안 가면 안 돼요?”

벤지는 여전히 현장요원이었다. 이단이 그것을 깨닫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날 처음으로, 이단은 벤지의 방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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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젠장, 도시로 나가면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니까! 윽박지르는 말투로 인상을 가득 쓰는 모습에 벤지는 듣기 싫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어댔다. 사실, 벤지의 눈앞에는 잔뜩 일그러트린 얼굴을 한 마티를 한 구석으로 밀치고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잘생긴 이마, 잘생긴 눈, 잘생긴 코 (하나하나 생각하려다가 너무 많아서 관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 볼 때 정말 마법처럼 빛나던 맑은 시선.

 

마티, ... 모르겠어.”

대체 왜 그러는건데?”

 

그것은 분명 사랑에 빠진 표정이었다. 눈동자는 하늘 위로 고정한 체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벤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 아무래도 이 곳에 남아야 할 것 같아.”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사랑에 푹 절여진 벤지는 가시가 잔뜩 박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벤지의 눈앞에 나타난 마법 같은 사람은 이미 그의 마음 속 지대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티는 갖은 협박과 약속, 뇌물까지 써가며 벤지를 설득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벤지는 마법같이 나타났다가 마법같이 사라진 그와 다시 만나기 위해, 그와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포옹을 하기 위한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놓은 상태였다. 적어도 이론은 완벽했다.

 

 

당신은 정말 재밌어요.

 

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단은 마법그 자체였다. 은유도, 직유도 아닌 사실이었다.

 

이단, 당신은 정말로 마법 같아요.”

난 진짜 마법인걸.”

 

어리둥절한 이단의 표정에 벤지는 이마를 붙잡으며 웃었다. 이단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말이에요. 실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벤지의 설명에도 이단의 표정은 여전했다. 벤지는 입을 다물고 순간을 즐기는 것을 선택했다. 깍지를 끼고 해변을 걷는 둘의 발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잔뜩 박혔다. 벤지는 발바닥이 따끔해지는 감각에 발가락을 움츠렸다.

 

올라갈까요? 계속 걸어서 그런지 슬슬 힘이 드네요.”

 

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벤지가 한 걸음 발을 옮기려고 할 때, 이단은 자연스럽게 벤지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뛰어 올랐다. , 세상에. 발끝이 바닥과 떨어질 때의 느낌은 언제 경험해도 좋지 않았다. 그것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공중으로 뛰어오르기 위한 것이어도. 벤지는 눈을 질끈 감고 이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벤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벤지, 심장이 엄청 빨리 뛰어.”

 

귓가에 가득 찬 바람 소리를 가르고 이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벤지는 대답 대신 이단을 더 세게 끌어안는 것을 선택했다. 이단은 벤지의 행동이 마음에 들은 모양인지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벤지의 발끝이 다시 지면에 붙은 것과 동시였다. 이단과 벤지는 해변에서 약 십 분 정도 떨어져 있는 벤지의 작은 밴 앞에 도착해 있었다.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는 벤지의 몸을 이단이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벤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단을 쳐다보았다.

 

, 위험하잖아요!”

. 벤지. 나는 네 말대로 마법인걸. 널 다치게 하지 않아.”

하지만... 그건 위험 한 행동이었어요.”

 

이단의 눈은 벤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접혔고,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었다. 경쾌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벤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단, 이단?” 자신의 이름을 여러번 부르는 벤지의 목소리에도 이단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왜 웃는 거예요?”

벤지, 난 네가 너무 재밌어서 웃고 있는 거야.”

내가... 재밌다구요?”

 

이단은 웃는 것을 겨우 멈춘 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벤지를 쳐다보았다.

 

난 네가 너무 좋아.”

 

이단이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을 벤지는 잊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이단의 대답에 벤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일그러졌다. 이단은 심상치 않은 벤지의 표정을 뒤늦게 눈치챘다. “벤지?” 벤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이단은 불안한 표정으로 벤지의 얼굴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짭조름한 눈물이 손바닥에 닿았다.

 

왜 우는 거야?”

, 당신이 좋아요. 이단.”

 

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은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는 너무 달라요. 나는, 인간이고 이단은...”

 

보석이란 단어는 실체가 되어 벤지의 목을 막았다.

 

난 이단을 사랑해요.”

나도 널 사랑해. 벤지.”

난 이단과 영원히 있고 싶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어.”

 

벤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뒤 이단을 끌어안았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이단의 어깨로 스며들었다. 이단은 조심스럽게 벤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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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간단했다.

 

이단을 부르면 되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풀리는 일이 아니었다.

 

연락을 하는 게 곤란하게 됐어.”

어디에 있는데요?”

정신병원.”

 

젠장, 벤지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정신병원이라니, 그가 거기에 왜 있는 건데요? 책상에 막혀 웅얼거리듯이 들리는 벤지의 말에 루터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센프란시스코에서 나타난 유령을 잡다가 작은 오해로-”

거기까지는 안 궁금해요. 아니, 나는 이단이 은퇴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줄 알았죠!”

 

나를 버리고 말이에요. 벤지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뒷말을 겨우 집어 삼켰다.

 

스테이 퍼프트 마시멜로우 맨의 잔재가 뉴욕 근교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모습에 깔끔하게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 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빨리 다시 모습을 드러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일 이후로 고스트 버스터즈는 해체되었고, 이단은 팀이 해체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감췄다. 팀에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이단이 사라지자마자 팀이 유명무실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단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팀에 합류한 벤지, 이단의 친한 친구인 루터, 돈 때문에 일을 시작한 브랜트는 이단이 사라지자마자 각자의 핑계를 대며 자신의 일자리로 돌아갔다.

루터가 한 뼘 크기의 사악한 악마 (귀여운 세라복의 마시멜로우 맨의 모습을 한를 본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루터는 한숨만 푹푹 쉬어 대는 벤지의 어깨를 툭툭 쳐댔다. 벤지는 불퉁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단이 거기에 있다는 건 언제 알았어요?”

사라졌을 때부터.”

또 나만 모르고 있었구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한테는 중요해요.”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물론 벤지에게 남은 선택지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단, 정신이 들어요?”

 

한 치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바싹 묶어놓은 구속구가 이단의 손목과 발목에 흔적을 남겼다. 벤지는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 흉터를 없앨 수 있다고 믿는 것 마냥 이단의 손목을 쓸어댔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 약물에 취해 헤롱거리는 이단의 모습을 보는 건 그에게 있어 생각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이단이 작게 신음했다. 벤지는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울먹였다.

 

벤지?”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벤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없이 얼굴을 감싸 쥐는 손이 거칠었다.

 

으응, 잘 지내는 거 보니까 다행이야.”

잘 지낸다구요?”

 

소리를 빽 지르자 이단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머리가 아픈 탓이겠지. 벤지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벤지, 조금 작게 말해줄래? 벤지는 괜한 심술에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더 나아가 특유의 빠른 말투로 이단을 쏘아댔다.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가 간 곳이 겨우 거기예요? 주변 사람들 걱정하게 만들어놓고 지금 그런 말이 아주 잘 나오는 거 보니까 이단은 아주 멀쩡한 것 같네요. 잘 지냈는지 안 물어봐도...”

 

사실, 이단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프리스비 안에서 나타난 고대의 악마를 죽이는 법도, 박물관에 전시 된 사탄의 저주가 담긴 물건을 안전하게 파괴하는 것도. 그리고 이단은 무엇보다 벤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벤지의 뒷덜미를 감싸 쥔 손을 내리 눌렀다. 엉겁결에 이단을 덮치는 모양세가 되어버린 벤지는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뺐다

물론 그것은 시도로만 남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의 입맞춤은 벤지의 입을 봉인하는 것에 아주 적합한 행위였다.

 

,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이단은 벤지의 이마에 한 번 더 입 맞춘 뒤 나른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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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 사라졌다.

벤지는 텅 빈 집을 황망히 쳐다보았다. 허리를 숙여 신발의 뒤꿈치를 잡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조용했고, 방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한 입 베어 문 빵 한 조각과 한 모금 남긴 우유가 담긴 유리잔 따위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배기관을 타고 내려간 모양인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틀을 내려다보았다. 먼지가 쌓인 그대로 손자국이 나있었다. 사실, 창틀로 탈출을 감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항상 있던 일이었다.

벤지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일이었다.

이단이 들어가지 못하게 잠가 놓은 방문을 열쇠를 이용하여 열었다. 거실과 다르게 텁텁한 냄새가 벤지의 폐부 내로 가득 들어왔다. 발가락 끝에 음료수 캔 몇 개가 치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벤지는 닫아놓은 데스크톱을 열어 화면이 뜨기를 기다렸다. 뻑뻑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한참동안 기다렸다.

벤지가 IMF에 들어 간 것은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 덕분에 이단 헌트를 만났으며 동경하던 그와 같이 일할 수 있었고, 그와 평생을 같이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몰랐을 위치추적과 같은 간단한 범법행위를 손쉽게 해낼 수 있다는 것도.

벤지가 이단 헌트의 어깨에 위치추적 칩을 심어놓은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근처 공원을 가리키는 빨간 점이 반짝였다.

 

이단!”

 

이단은 공원 한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 앞에 서 있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이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벤지는 조심스럽게 이단의 등 뒤로 다가갔다. 등 뒤에서 이단을 건드리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단이 가출을 감행했던 첫 날, 땀에 잔뜩 젖은 체 이단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벤지는 자신을 덮치는 줄 알았던 이단에게 잡혀 말 그대로 죽을 뻔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벤지는 조심스럽게 이단의 앞으로 가 얼굴을 비췄다.

 

걱정했어요.”

 

이단은 말이 없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이단은 그제야 벤지를 쳐다보았다. 제 말에 반응을 해 준 것은 또 오랜만이라 벤지는 조금 웃을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벤지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위험하게 창밖으로 나가면 어떡해요. 아니, 설마 아직도 한창 때 인줄 아는 건 아니죠? 허리 삐끗하면 치료도 어렵다니까.”

 

이단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벤지는 이단이 자신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른 집에 들어가요.”

미안해요, 당신이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아.”

 

벤지는 침을 꼴깍 삼켰다. 뭐라 해야 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저예요, . 벤자민 던이요. 당신의 동료, 당신의 친구, 당신의 애인. 당신의 보호자. 둘 사이로 한참이나 침묵이 감돌았다. 무거운 침묵, 달싹이는 입술,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

 

벤자민 던이에요.”

벤자민?”

벤지라고 불러도 좋아요. 이단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벤지.”

잘했어요.”

 

벤지는 조심스럽게 이단의 손목을 잡았다. 뿌리치는 일은 없었다. 이단은 계속해서 벤지의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집에 얼른 가요.”

 

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기다리는 거라도 있어서 그래요?”

 

고개를 끄덕였다.

 

벤지.”

벤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한 번 더. 벤지는 이단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내가 아는 벤지는 한 명밖에 없는데.”

 

이단은 묵묵히 버텨 섰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집에 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벤지는 한참동안 고민하다 이단의 옆에 주저앉았다. 분수대 바깥으로 튄 물방울이 엉덩이를 축축하게 적셨다. 이단은 키가 낮아진 벤지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기다려줄게요.”

 

벤지는 잡은 이단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단은 잠시 망설이다 벤지의 옆에 앉았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이단은 말을 고르는 듯싶었다. 벤지는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려주었다. 그가 예전에 자신에게 해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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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단은 제 앞에 있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쌓인 노인의 얼굴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이단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럭비공을 고쳐 잡고는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살짝 다리를 굽혔다. 노인은 그 배려에 눈만 꿈뻑이며 이단을 바라보았다.

 

저기, 댁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나도 내 집이 어딘지는 충분히 잘 알아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벤자민 던이라 소개 한 노인은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이단은 뒷덜미를 벅벅 긁으며 벤자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으며 항상 무료하게 이 길을 오가며 운동을 끝마치고 집에 가는 자신을 지켜봐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참이나 우물쭈물 거리며 한다는 말이, 이름도 모르는 당신에게 반한 거 같아요. 봉사를 해 주는 셈 치고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주면 안 될까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도 못할까요.”

이왕이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 해줬으면 좋겠는데.”

설명이 부족했나요?”

 

자유분방한 모습과 다르게 이단은 꽤나 예의바른 청년이었다. 치매에 걸린 것 같은 노인을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기에는 이단의 심성은 매우 올발랐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자신의 할 말만 하는 노인 앞에서는 그런 착한 심성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단은 결국 다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고 말았고, 그 한숨에 벤지의 어깨는 더욱 움츠려 들었다.

 

, 혹시 혼자 사는 거예요?”

부모님이랑 같이 살죠.”

 

부모님. 이단은 노인의 부모님을 상상해봤지만 무덤 속에 있는 시체-그것도 풍파에 녹슬어 뼈밖에 남지 않은. 따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단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 뻔 했지만 곧바로 그것이 매우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쉽게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이단은 여전히 자신을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는 벤지의 얼굴을 세세하게 쳐다보았다. 지나온 세월을 여실히 보여주듯이 주름이 잡힌 얼굴, 만지면 수분기 하나 없이 버석할 것 같은 피부. 그 속에 있는 초록색 눈동자는 이단의 얼굴이 자신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 마냥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한 말들이 안 믿겨지나요?”

미안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하지만 사실인 걸요.”

이봐요, . 벤자민. 그래서 정말로 저한테 원하는 게 뭐에요?”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고, 같은 시간에 매일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원해요. 벤지는 체념한 말투였다. 그 모습은 이단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결국 이단은 백기를 던졌다.

 

좋아요.”

 

벤지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노인의 얼굴에서 저런 얼굴이 나올 수 있을까. 잠시 이단은 벤지의 말을 믿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봉사하는 셈 치자. 그렇게 바쁜 것도 없고 말이야. 이단은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이 아닐까라는 마음속의 외침은 꾹 눌러 버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든 들어줄게요. 대신 딱 30. 그리고 휴일에만. 이 정도의 조건이라면 불만 없죠?”

 

이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제 이름은 이단이에요. 이단 헌트.”

 

2. 이단은 벤지와 만난 날을 손꼽아 세어보았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공원에서의 첫 만남, 벤지의 부모님을 만나 인사드린 날. -무덤이 아니었다. 그리고 게임과 만화책 이야기로 신나게 떠들었던 그런 날도 있었다. 이단이 생각하는 것 보다 벤지는 젊었다. 이단과 말도 잘 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로 벤지는 날이 갈수록 점점 젊어지는 듯 했다. 하얗게 샜던 머리카락은 하나 둘 점점 검은 머리카락이 자라나 차지하고 있었고,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던 주름은 강력한 밀대로 밀어버린 것 마냥 팽팽해지고 있었다. 실제로 벤지는, 믿기지 않지만. 젊어지는 것이 확실했다. 눈썰미가 남들보다 더 뛰어났던 이단에게는 벤지의 사소한 변화는 크게 다가 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단은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벤지의 시간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게 진행된다. 이단이 그 절대불변 한 사실을 인정한 날, 벤지와 이단은 그가 노인일 때 만났던 공원의 벤치에서 키스를 했다. 벤지의 시간이 23년이 진행 된 날. 이단의 나이가 32살일 때의 일이었다.

 

3. 벤지. 벤자민은 이단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꽤 부끄러워하고는 했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마음에 안 들어? 이단이 웃자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벤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이단의 얼굴을 감쌌다. 벤지의 손등에 새겨진 젊음이 이단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보였다. 벤지는 엄지손가락으로 눈을 감은 이단의 눈두덩이를 살살 쓸어 넘겼다. 간지러운 모양이었는지 이단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단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벤지의 손길을 한껏 즐기다 그의 얇은 손목을 잡았다.

 

벤지.”

난 점점 젊어지고 있어요.”

 

당신이 늙는 것처럼. 벤지는 이단의 얼굴 위로 겹쳐진 세월의 흔적을 제 눈 안으로 담았다. 갓 성인이 된 얼굴을 한 벤지는 얼굴에 걸맞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난 내가 언제 죽을지 항상 궁금하고, 그걸 쉽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어요.”

 

이단의 손 안에 부드러운 살결이 만져진다.

 

내가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벤지, 사람은 모두 다 늙어. 단지 넌 그 방식이 다른 거고.”

 

위로에도 벤지의 얼굴은 풀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입술을 삐죽이 내민 벤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가끔 보이는 얼굴이 제 나잇대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단은 젊은 애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때, 내가 심술궂어서 너를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아마 어린 벤자민 던은 상처 입고 집에 갔겠죠.”

 

잠시 말을 고르던 벤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도 말을 걸었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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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나 거울을 들어다 보며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던 이단은, 결국 생각으로만 하고 있던 그 말을 뱉어버렸다.

“벤지, 나 요즘 살 찐거. 맞지?”

벤지가 당황하다가 그만, 마시던 홍차를 원래의 위치에 주르륵 뱉어버린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아뜨. 혀를 내미는 동시에 벤지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음,”

불만스러운 투였다. 이단은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거울에 턱선을 비추어 보았다. 확실히 날렵하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기에는 조금은 토실토실해진 상태였다. 벤지는 그 뒤에서 찻잔만 잡은 체 눈알을 도록도록 굴렸다. 이단은 거울을 보며 흐음. 이라던가, 으으. 그런 류의 소리를 계속 내었고 결국 벤지는 손에 들린 찻잔을 내려놓고 이단의 뒤로 가 그를 껴안았다. 거울의 한 쪽 면에 비치는 이단의 어깨 뒤로 벤지의 얼굴이 슬쩍 올라왔다. 이단은 벤지의 차분한 숨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일을 그만 두니까, 이게 금방 찌네.”
“하나도 안 쪘, 음. 사실. 3년 전에 현장에서 구를 때 보다는 살이 붙었죠. 우리 둘 다.”

이단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웅얼거렸다. 가벼운 진동에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쪽, 쪽. 통통하게 오른 살에 살짝 묻혀버린 쇄골에서부터 톡 튀어나온 목젖까지. 벤지는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굳은살이 두툼하게 박힌 이단의 손가락이 벤지의 정수리를 감싸 안아왔다.

“갑자기 왜 신경 쓰는거예요?”
“으음. 아무래도 좀.”
“아무래도?”

으응? 벤지는 어느새 이단의 턱에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이단은 벤지의 부드러운 머리털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주름도 생긴 거 같고.”
“잠깐, 벤지는 지금 이단 헌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말 그대로야. 벤지, 나. 다시 일을 시작해야겠어.”
“뭐? 절대 안 돼요.”
“아니, IMF 말고.”
“그럼?”

이단은 열린 창문을 곁눈질로 슬쩍 보았다. 이단과 벤지가 일을 그만 두고 정착 한 곳은 시애틀의 항구도시인 올림피아였다. 짭쪼름한 바닷바람이 방 안을 훑었다. 벤지는 이단의 시선이 머문 곳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아, 제발. 이단.

“절대 안 돼요.”
“벤지, 방금 똑같은 말 했었거든?”
“안 돼. 차라리 IMF에서 다시 일한다고 하지 그래요?”
“그래? 그럼 현장요원 다시 할래.”
“그, 그것도 절대 안 돼요.”

벤지는 나름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럼 키스할래?”
“절대 안, 으, 빌어먹을.”
“뭐?”

장난스레 웃는 이단의 얼굴에 벤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단 헌트의 방식이었다.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어 놓고 혼까지 쏙 빼놓는 그런 것. 이단은 벤지의 양 볼을 붙잡고 가볍게 뽀뽀했다.

“그냥, 얌전히 배에서 물고기만 잡고 돌아오겠다는 거야. 낚시 좋아하지? 위험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또, 스릴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잖아.”
“이단이 가는 곳에는 꼭 사건이 터지잖아요...”
“사건이라고 해봐야 노인과 바다 찍는 것 밖에 더하겠어?”

항상 그랬듯이 벤지는 이단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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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 한 구석에서 고개를 꾸벅꾸벅 떨어트리며 졸고 있는 고양이를 언제 처음 봤냐고 물어본다면, 이단은 한참동안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 할 것이다. ‘원래부터 있었어.’ 어불성설한 말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또 옳은 말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단은 자신이 IMF에 갓 입사했을 때 모습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었다고 자주 묘사했었고, 그 고양이는 이단의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때. 그가 처음으로 집에 짐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테라스 밖으로 삐죽이 나온 작은 공간에서 제 몸을 눕히고 볕을 쬐고 있었다.

 

오전에는 먹이라도 찾아 돌아다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양이는 꼭 해가 제 모습을 탐스럽게 비추는 오후 두 시쯤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며 어슬렁어슬렁 골목을 돌아다녔다. 직업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이단은 아주 가끔마다 그 고양이와 마주쳤지만, 이단은 안타깝게도 동물 애호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단과 고양이는 같은 골목에 몸을 눕히고 사는 같은 주민임은 틀림없었지만 서로 친한 척은커녕 인사도 하지 않는 그런 무미건조한 사이였다.

 

이단이 그 고양이에게 관심을 준 것은 정말 우연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아직도 생생했다. 동료들이 모두 죽어나갔다.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고, 그 충격은 크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글리츤, 클레어... 동료들의 이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단은 그 날 차에 치인 고양이와 마주쳤다. 이단은 자신의 몸에 딱 달라붙은 물에 홀딱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데면데면한 친구였던 고양이를 들여다보았다. 숨만 꼴깍이며 넘어갈 듯이 쉬고 있는 고양이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체다와 비슷한 탐스런 노란 빛깔 털에는 사고를 당한 시간이 꽤 오래 전 이었는지 딱딱하게 굳은 진한 갈색 피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가슴께에 핏방울이 동그랗게 번졌다. 고양이는 반항 할 힘도 없는지 주둥이만 뻐끔이다가 곧 눈을 감았다.



그 뒤로 여러 사건이 있었다. 고양이는 천성이 도둑고양이인 모양이었는지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며 며칠 이단의 집에서 지내다 훌쩍 떠났고, 이단은 그 뒤로 벌어진 수많은 일 따위에 휘말려 고양이를 떠올릴 세도 없었다.

 


고양이를 다시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이단은 식사로 자주 때울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을 사들고 가는 길이었고, 한 길로 이어진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 곳에서, 오랜 친구였던 고양이를 만났다. 그동안 아주 잘 먹기라도 한 것인지 저번에 본 것보다 몸집이 두 배는 불어있었다. 친하지도 않았지만, 그간 못 본 것이 뭐라고. 이단은 오랜만에 본 얼굴에 반가움을 느꼈다.

 

고양아.”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한 손에 쥔 채 무릎을 굽혀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는 망설이기라도 하듯 제 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이단의 옆으로 와 내민 손에 살짝 몸을 비벼 댔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생각 외로 좋아 이단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대도 하지 않고 건진 수확이라 느끼는 바는 더 컸다. 충동적으로 말을 뱉었다.

 

나랑 같이 갈래?”

 

물론 고양이가 대답을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단을 따라 갔고, 그 이후로 이단과 고양이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어.”

 

고양이는 말이 많았다. 운동하는 이단의 모습을 바라보며 야옹. 우걱우걱 피자를 씹어 먹는 이단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야옹. 샤워를 하고 허리에 가운을 걸친 모습을 보고는 뒤 돌아 꼬리를 붕붕 바닥에 쳐대며 야옹. 하지만 이단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미소를 머금고 한 저 말에는 고집스레 주둥이를 꾹 다물 뿐이었다.

 

결혼은 아직 모르겠지만... 아마 결혼을 한다면. 그녀와 하지 않을까?”

 

이단은 고양이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과연 내가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해질 수 있을까?”

 

고양이는 자신을 매만지던 손가락을 아프게 깨물고 웅크려 있던 몸을 활짝 펴 이단의 손이 닿지 않는 창문 위로 뛰어 올랐다. 꽤 세게 물었던 탓인지 엄지손가락에 작은 송곳니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 고양이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단은 턱을 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며칠 뒤, 고양이는 다시 집을 나갔다. 이단은 가끔 그 고양이가 생각났지만 그의 천성을 생각하며. 보고 싶다는 마음을 겨우 눌러 내렸다. 그리고 이단은 그 것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벤자민 던 입니다!”

 

반가워요. 이단. 그동안 정말로 뵙고 싶었어요! 아주 오래 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반갑게 얼굴을 들이미는 신입 요원 덕에 이단은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이단은 재빨리 평정심을 유지하고, 입꼬리를 시원스레 올려 기대에 찬 눈으로 반짝이는 벤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

벤지요.”

벤지. IMF에 온 것을 환영해요.”

 

벤지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단과 맞잡은 손을 위 아래로 붕붕 흔들어댔다. 벤지는 그밖에도 IMF에 들어오고 싶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앞으로의 미션이 아주 기대된다는 등. 조잘조잘 열심히 떠들어댔다. 오랜만에 새로운 활기 넘치는 얼굴을 본 이단은 그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실제로 작은 동물이 말하듯이 끊임없이 떠드는 벤지의 얼굴을 보니, 예전에 살았던 작은 고양이가 떠오른 탓도 없지 않아 있었다.

 

, 미안해요.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죠?”

 

이단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그냥 반가워서 그랬어요. 이단,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저야말로 즐거웠어요. 이 부서에서 일하는 거죠? 가끔 찾아 올게요.”

 

그 말에 벤지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벤지는 이단을 말 그대로 오랜만에 만난 것 처럼 대했다. 이단은 아주 잠깐 속에서 피어오른 가벼운 의문에 뒷목을 긁적였지만 곧바로 떠오른 다른 생각에 금방 빠져들었다

이단은 바로 오늘, 줄리아에게 반지를 주며 청혼 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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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팁 님의 빌런벤지이단을 보고 썼습니다.


약간 어지러울 거예요. 목소리는 한 곳에 모이지 않고 안개처럼 희뿌옇게 흩어졌다. 벤지는 초조하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바닥에 무릎을 굽혀 이단과 눈을 마주했다. 이단은 웃옷을 벗은 채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차고 기둥에 묶여 쓰러지다시피 앉아 있었다. 벤지는 조심스럽게 그의 몸뚱이를 살펴 내려갔다. 다행히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반증하듯 가슴팍이 아주 느린 속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눈꺼풀은 온 세상의 중력을 혼자 다 받는 것 마냥 무거워 뜨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은 굽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벤지는 그제야 제가 한 짓에 대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미 엄지손톱은 사포나 톰 따위의 날카로운 것을 가져다 긁은 것처럼 닳아 있었다. 입 안에 까끌까끌하게 남아있는 손톱 쪼가리를 침과 함께 바닥에 뱉으며 벤지는 천천히 이단에게 다가갔다.

 

이단?”

 

그가 항상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동경과 애정이 반 쯤 섞인 말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인지 이단의 얇은 눈두덩이 아래에서 눈알이 꿈틀대며 움직였다. 벤지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애타게 쳐다보았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을 멈췄다. 이단의 갈라진 입술이 효과적으로 신음을 뱉기 위해서 약하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벤지는 조심스럽게 이단의 볼 위로 손을 뻗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벤지는 모로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단은 벤지의 무모한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이단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일이 끝난 후에도 끝끝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벤지는 이단을 구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단을 채갈 일은 없을 것이다. 벤지는 영원히 그를 내보이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볼에 닿는 차갑고 축축한 손에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톱날처럼 깎인 손톱이 이단의 턱 끝을 긁어댔다. 이단은 약 기운이 듬뿍 묻은 숨을 천천히 뱉어냈다. 벤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고, 이단은 울상인 벤지의 얼굴을 보고 안심하라는 듯이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며 웃어주었다.

 

으윽, 일단. 이것 좀 풀어줄래?”

 

웃어주었다. 이것은 이단의 웃음이 아니었다. 벤지는 수갑을 들어 보이며 신음하는 이단을 보고 웃어주었다. 이단은 자신이 약기운에 몸이 절어져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악 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일단, 이 곳에서 빠져나가자.

 

어딜 가요?”

 

벤지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이단은 그제야 불분명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의 존재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단은 벤지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무릎을 꿇다시피 앉아있는 자신의 하체를 내려 보았다. 복숭아뼈와 발뒤꿈치를 보이지 않게 가린 붕대 위로는 짙은 갈색의 피딱지가 응고되어 있었다. 이단은 천천히 무릎을 들어, 일어나기 위해 시도를 했다. 단단한 굳은살의 흔적이 박힌 발바닥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꺾였다. 이단이 고통스럽게 한숨을 뱉었음에도 벤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약을 생각보다 많이 탔나 봐요. 엄청 걱정했어요.”

벤지?”

이름 좀 그만 불러요.”

“내 질문에 대답 해.”

 

이단은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부정하듯이 몸을 바르작댔다. 단단한 손목이 수갑에 긁혀 생채기가 났다. 벤지는 이단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단은 벤지의 손이 불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뜨겁고, 칼날로 표피를 긁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벤지의 손이 닿은 곳마다 타오르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냥, 근육을 살짝 자른 것 뿐이에요.”

 

분명히 알아 들을 수 있는 단어를 이용해 내뱉는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단은 벤지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단을 위해서예요.”

제발. 장난은 그만해.”

장난이라구요?”

일단 이것 좀 풀고...”

 

벤지는 이단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간단히 힘을 주자 주사기의 액체는 재빠르게 그의 근육 속으로 흡수되었다.

 

전 언제나 진심이었어요.”

, 망할. 이게 무슨...”

조금 졸릴 거예요.”

 

커다란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들어가 있다. 분노, 배신감, 불신, 절망. 눈동자에 비치는 벤지의 모습 위로 그것들이 반짝였다. 벤지는 그의 눈을 사랑했다. 애정뿐만이 아닌 모든 감정을 알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보이는 이단의 눈빛은 가장 열정적이며, 아름다웠다. 벤지는 텅 비어버린 주사기를 뽑아 바닥에 던져놓고 이단의 얼굴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랑에 빠진 표정, 분노에 차오른 표정이 바로 앞으로 맞닿았다. 벤지는 이단의 뒷덜미를 강한 힘으로 붙잡아 고정시킨 뒤 입을 맞췄다. 갈라진 입술이 찢어져 핏방울이 맺혔다. 아주 작은 방울이었음에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착각을 주었다


이단은 수마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어깨를 비틀어 혀를 섞어오는 벤지를 떼어내려 했지만 결박 된 상태에서 제 힘을 발휘하기 쉬울 리가 없었다. 목덜미를 집어 누르는 손이 이단의 반항을 내려찍기라도 하듯 더 힘을 주었다. 피와 타액이 섞여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이단은 벤지의 입 속에서 쿨럭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단은 이를 세워 뱀처럼 꿈틀거리는 벤지의 혀를 깨물었다.

 

벤지가 비명을 지르며 입을 떼어냈다. 이단은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진홍색의 침을 뱉었다. 벤지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벤지는 손바닥에 힘을 실어 이단의 뺨을 내리쳤다.

 

이해해요. 아직 적응을 못한 거 같아요. 그렇죠?”

 

이단은 벤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오른쪽 뺨은 얼얼하고, 공간이 뒤틀리고 몸이 공기 중으로 부유하는 것이 느껴진다. 벤지의 말대로 약효는 굉장했다. 이단은 수마를 이기기 위해 눈에 핏줄을 세우며 벤지를 쳐다보았다. 몸이 휘청이며 고정 된 수갑이 부딪혀 듣기 싫은 금속음을 크게 질러댔다.


벤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붕대가 감긴 발목 위로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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